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6

從心所欲 2019. 2. 12. 12:30

김홍도와 신윤복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면 풍속화의 수요가 일반 서민에게까지 확산되면서 풍속화의 제작은

더욱 활발해진다. 화풍도 다양해져 김홍도의 화풍이 유행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화풍, 문인화풍,

민화풍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김홍도, 신윤복을 정점으로 이후 풍속화의 작품성은 오히려 저하되었다.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문인화의 흐름으로 인하여 풍속화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유숙 <대쾌도(大快圖)>지본채색. 105㎝ x 54㎝,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화풍을 계승했다는 혜산(蕙山) 유숙(劉淑, 1827 ~ 1873)의 그림으로 전해지는<대쾌도(大快圖)>이다.

'대쾌(大快)'는 '크게 즐겁다'는 뜻으로 제목 왼쪽에는 병오년 온갖 꽃이 만발한 때 격양세인이 태평성대에

의지하여 그렸다(丙午萬花方暢時節 擊壤世人寫於康衢煙月)”1라는 관지(款識)가 있다. 세로 길이가 1m가

넘는 큰 화폭에 씨름과 택견 하는 모습과 그것을 구경하는 인물들을 넓은 공간에 배치하여 그렸다. 등장인물도

많고 그림에 여러 요소들이 많다. 씨름, 택견에 들병장수와 화려한 옷차림의 대전별감과 그 일행까지 찬찬히 뜯어봐야 하는 그림이다. 

그림 관지에 병오년이라고 했는데 유숙의 생몰년도를 고려하면, 1846년, 즉 유숙의 나이 20세에 해당하는 해이다. 그런데 이 그림의 분위기와 인물들의 특성은 유숙이 7년 후에 그린 그림과는 너무 다르다. 

 

[유숙 <수계도> 1853년, 지본담채, 30 × 800㎝, 개인 소장]

 

 

유숙이 27세 때 그린 <수계도(修稧圖)>는 30명의 중인(中人)들이 1853년 3월 3일 서울 남산 기슭에서 정확히

1,500년 전 왕희지의 ‘난정수계(蘭亭修稧)2‘를 따라 계를 닦고 시 한 수씩을 지은 장면을 기록한 8m 길이의

횡권(橫卷)으로 된 그림이다.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시회 장소로 들어가는

인물과, 중앙 탁자를 중심으로 앉아 있는 인물들, 그리고 왼쪽 끝에서 곡수(曲水)를 바라보며 시상(詩想)에

잠긴 인물이다. 특히 중앙에는 총 참석자 30명 중 22명의 인물을 배치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유숙은 초상화를

잘 그린 화가답게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각 인물의 특징이 최대한 잘 드러날 수 있게 정교하게 그렸다.

 

[유숙 <수계도> 부분]

 

 

그림 속 인물들은 사대부가 아닌 중인이지만 그림의 부분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담백하고 아취 있는 문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과연 위 <대쾌도(大快圖)>가 유숙의 그림인지 의구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전(傳) 신윤복 <대쾌도> 215.7cm x 60.4cm, 축 길이 67.3cm 국립중앙박물관]

 

혜원 신윤복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또 다른 <대쾌도>이다. 위 유숙의 그림과 닮은 곳이 너무나 많다.

상단의 가마와 기생, 성벽 위의 구경꾼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똑 같다. 심지어 인물들의 얼굴 느낌까지도 같다.

그리고 그림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한눈에 느낄 정도로 그간 보아왔던 신윤복의 그림 솜씨와는 많은 차이가 있디.

그럼에도 그림 우측 상단에는 혜원이라는 관지가 들어있다. 화제 옆에 쓴 글은 병오(丙午) 대신 을사(乙巳)로 연도만

바뀌고 내용은 유숙의 그림에 있는 글과 똑 같다.

이 경우 을사년은 병오년보다 한 해 빠른 1845년과 61년 전인 1785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845년은 신윤복이 살아있다면 87세가 되는 해이다.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은 1813년 이후로 작화연도가 밝혀진 작품이 없다. 1785년으로 친다면 신윤복이 28살 때 그린 그림이 된다. 그것을 62년 뒤에 유숙이 모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국립박물관이 혜원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을 ‘전(傳) 신윤복’의 작품으로 소개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묘하게 두 대쾌도는 같은 사람이 그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 작가가 누구이든 간에 두 <대쾌도>는 왕실(王室)용의 경직도(耕織圖)3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경직도는 농사짓는 일과 누에치고 비단 짜는 일을 그린 풍속화로 궁궐 안에 있는 왕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활을 이해시켜 스스로 근검절약하게 하고 바른 정치를 하도록 힘쓰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는 그림이다.

 

[작자미상, 경직도 병풍 中 <논갈이와 누에치기> 비단에 수묵 채색. 149 × 44cm. 독일 게르트루트 크라센 소장]

 

 

민간에까지 유행한 경직도는 대부분 화가가 알려져 있지 않다. 화원풍의 섬세한 채색화부터 조악한 필치의

그림까지 차이가 나는데 내용은 대체로 농가의 세시풍속을 복합해 놓은 것이다. 19세기 중후반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경직도 병풍 그림에는 중단에 논물대기와 논갈이모습, 하단에 누에치는 모습을 그렸다. 상단에는

길을 오가는 행인들과 주막 풍경도 보인다. 논갈이와 누에치기 장면 중간에 뽕잎을 따러 나무에 올라간 여인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아래 그림은 같은 경직도 병풍에 있는 <달구경> 中 부분이다.

 

[작자미상, 경직도 병풍 中 <달구경> 부분, 비단에 수묵 채색. 149 × 44cm. 독일 게르트루트 크라센 소장]

 

 

혜원의 낙관이 있지만 선뜻 신윤복의 그림이라고 동의하기 어려운, 같은 형식의 <달맞이> 그림도 있다.

 

[신윤복 추정 <달맞이>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 박물관]

 

 

후기로 가면서 조선시대의 화풍에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서양화풍의 영향이 뚜렷한 풍속화로는 신광현(申光絢, 1813~?)의 <초구(招狗)>가 있다. 바람개비를 든 아이가 문 앞에서 개를 부르는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풍속이라기 보다는 일상의 한 장면이다. 이 그림은 인물, 건물, 나무 등에 음영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림에 처음으로 빛을 화면에 끌어들여 사람과 개의 그림자를 표현하는 등 서양화의 음영법에 의한 구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의 품격이 높아졌다고 말하기는 어렬울 듯하다.

 

[신광현, <초구> 지본수묵담채, 35.3 × 29.5㎝,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다녀간 외국인들이 그린 풍속화도 있다. 아래는 프랑스 화가 드 라 네지에르

(Joseph de la Nézière, 1873 ~ 1944)가 1901년의 조선 여인들의 생활상 중 식사하는 모습과 의상을 스케치한

석판화이다. 1903년에 발간된 「극동의 이미지(Extrême Orient en Image)」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4.

 

 

 

아래는 같은 작가가 무당과 무당의 의상을 그린 석판화이다

 

 

 

 

  1. 강구연월(康衢煙月) : ‘강구(康衢)’는 사통오달의 큰길로서 사람의 왕래(往來)가 많은 거리, ‘연월(煙月)’은 달빛이 연무(煙霧)에 은은하게 비치는 모습을 형용하는 것으로 강구연월은 태평성대의 평화로운 풍경을 비유하는 사자성어이다. 또한 ‘배를 두드리고 흙덩이를 친다’는 고복격양(鼓腹擊壤)이 매우 살기 좋은 시절(時節)을 의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격양세(擊壤世)’ 역시 태평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문으로]
  2.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21∼379년)가 동진(東晋) 353년 3월 3일 절강성 소흥현 남서에 위치한 회계산 아래 곡수(曲水) 난정(蘭亭)에서 42명의 명사와 더불어 베푼 시회(詩會) 모임이다. 역대 사대부들에게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으로 특히나 글씨를 쓰는 서예가들에게는 더욱 큰 의미가 있다. 그때 지은 시집의 서(序)를 왕희지가 행서(行書)로 썼고 이를 난정서(蘭亭序)라고 부르는데, 술이 취한 상태에서 쓴 글이지만 다음날 약간의 수정한 흔적을 남기긴 했으나 아주 자연스런 글이라고 평가되고 이후 ‘천하제일행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난정서는 모두 324자에 불과하지만 어느 한자도 같은 유형이 없고 특히 ‘之’자만 하더라도 20자가 모두 자형을 달리한 것으로 인하여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3.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과 잠직업(蠶織業)의 풍속을 월령(月令) 형식으로 읊은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豳風七月編)의 내용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남송(南宋)때 누숙(樓璹)이 송(宋) 고종에게 바치기 위하여 처음 그렸다고 하여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라 하였다. 이후 청나라 때는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로 바뀌었다. 조선 후기에는 판화인 패문재경직도가 병풍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조선화되어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보급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즉 패문재경직도의 구성과 기법을 토대로 하되 소재는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으로 대체된 경직도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원래 왕실용으로 쓰이던 ‘경직도’가 일반인의 수요에 의하여 만들어져 민화(民畵)에서도 많이 취급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4. 그림 출처 : 위키미디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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