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8

從心所欲 2019. 2. 25. 14:25

 

남녀의 직접적인 성 풍속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춘화(春畵)라고 한다. 유교적 윤리관이 투철했던 조선에서는

춘화(春畵)의 등장이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늦었다. 명나라 말엽부터 늘어난 중국의 춘화와 우키요에(浮世繪)

화파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일본의 춘화가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인물들에 의해 이따금 조선에 알려졌지만

그것이 널리 퍼질 사회 분위기는 아니었다. 유교적 가치를 신봉했던 조선의 사대부들로서는 노골적인 남녀

간의 성애 그림을 해괴하게 여겼을 것이고 그런 그림을 들여다봤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질책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에서도 춘화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춘화가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의 강한 유교적 윤리 의식으로 인하여 중국이나 일본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지금 전하는 조선의 춘화는 그리 많지 않다. 김홍도 전칭작(傳稱作)인 《운우도첩(雲雨圖帖)》과 신윤복

전칭작인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 작자미상의 《무산쾌우첩(巫山快遇帖)》, 일제시대에 그려진 정제

최우석의 《운우도화첩》정도이다. 애초에 많이 제작이 안 된 것인지. 아니면 남우세스럽거나 흉측스럽다고

생각하여 은밀히 보관하다가 중간에 유실되어 버린 탓인지는 알 수 없다. 낙관을 하지 않은 조선 후기의

유품들도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회화 작품으로의 가치는 없는 것들이다.

《운우도첩》은 원래 40점의 화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10점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 중 5점의

그림을 묶은 화첩 표지에는 ‘단원선생진품 운보배관1’이라고 쓰여 있는데 매 그림마다 음각으로 ‘金弘道印

(김홍도인)’과 양각의 ‘檀園(단원)’도장이 찍혀있다. 《건곤일회첩》은 모두 12점의 그림인데 현재는 6점씩

두 개로 분첩된 상태이다. 6점에는 혜원이라는 글씨와 함께 양각도장 ‘時中(시중)’과 음각도장 ‘蕙園(혜원)’이

찍혀있고, 나머지 6점에는 음각도장 '蕙園'만 찍혀있다. 《건곤일회첩》의 첫 장에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누군가에게 선물하면서 행서체로 쓴 발문과 수장인이 찍혀있다.

 

“秀色可飱 千載佳話贈君几下

日入溫柔鄕 何羡元帝風情也

甲辰 早春

빼어난 여색은 좋은 저녁 반찬이라는 말은

천 년을 두고 내려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대의 책상 아래 이 화첩을 드리니

날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별천지에 들어가면

어찌 원제(元帝)2의 풍정인들 부러울까.

1844년 이른 봄 “

 

이 두 화첩은 배관기와 옛 사람의 발문, 그리고 김홍도나 신윤복의 솜씨라 하여도 이의가 없을만한 수준의

그림들임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찍힌 도장들로 인하여 오히려 위작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전칭작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춘화는 혼교가 많고 화사하다고 하고 일본은 성행위의 감정을 극대화 시켰다고 한다. 이에 비하여

조선의 춘화는 은근한 관능미와 소란스럽지 않은 성 풍습을 담고 있다고 소개된다. 조선의 춘화들은 표현이

중국과 일본처럼 노골적이거나 변태적이지 않다. 남녀의 성기를 노출한 그림들에서도 그 묘사가 과장되거나

비현실적이지 않고, 남녀가 엉켜있는 장면을 화폭 가득하게 그리지도 않았다. 반면 일본의 춘화는 뱀처럼 엉킨

남녀가 화폭을 가득 채우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얼핏 봐서는 남녀 구분도 쉽지 않다. 일본 화가들은 남녀의

나체가 성적 매력을 지니고 있거나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대그리스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들었다면 깜짝 놀랄 말이지만 어쩌면 왜소했던 왜인들의 자기성찰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옷을 걸친 채

하반신만 드러낸 상태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성기만은 기괴하게 과장하여 크게 그리고 채색이

화려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아크로바틱 자세로 얽혀있는 남녀의 성애장면 역시

일본 춘화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18세기 초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온 조선 관리는 “왜인 남자는

반드시 품속에 운우도(雲雨圖)를 가지고 다니면서 정욕을 돕는데 쓴다”고 기록했다. 일본 남자들은 부적처럼

춘화를 하나씩은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일본 춘화에 비하면 조선의 춘화는 일견 소소하고 서정적이다. 그래서 19세기에 반짝했던 조선의

춘화가 일본 창녀와 일본 춘화가 유입되면서 쇠퇴해버렸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의

춘화에는 일본의 춘화에 없는 것이 있다. 그림에 이야기가 있다. 조선의 춘화는 남녀의 성애장면을 묘사하는데

치중하는 대신, 자연이든 실내이든 성애장면과 함께 그려진 배경을 통해 화면 속의 상황에서 어떤 이야기를

유추하도록 만든다. 남녀의 성기가 노출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그림이 더 자극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드물다. 화가도 그림을 그리면서 굳이 선정적으로 보이도록 애쓴 흔적도 없다. 여인들을 육감적으로

그리지도 않았고 변강쇠 같은 남자의 모습도 없다. 그래서 조선의 춘화는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 참 시시한 춘화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전 김홍도 《운우도첩》中 28.0x38.5cm, 개인소장]

 

[전 김홍도 《운우도첩》中 28.0x38.5cm, 개인소장]

 

《운우도첩(雲雨圖帖)》에 있는 그림 중에서는 비교적 성기노출이 덜 한 그림들이다. 두 그림 모두 성행위를

하고 있는 장면이지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기 보다는 로맨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분위기다. 화면에서

소리가 들린다면 남녀의 뜨거운 숨소리보다는 귀뚜라미 소리나 새소리, 시냇물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볼수록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참으로 이상야릇한 춘화다.

 

[전 신윤복 《건곤일회첩》中, 종이에 수묵담채;  23.3×27.5cm]

 

《운우도첩》의 그림이 야외와 실내가 섞여있다면 《건곤일회첩》은 모두 실내이다. 《건곤일회첩》의 그림들은

《운우도첩》의 그림들 보다 조금은 더 조신한 편이기는 하지만 이 그림은 유독 더 얌전하다. 물론 춘화라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가슴부터 하체까지 몸을 드러내고 있는 여인의 뒤쪽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남자의 얼굴은

한껏 붉어져 있다. 남자의 왼손이 어디에 가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짐작은 가능하다. 그럼에도 두 남녀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격정적이지 않다. 두 사람의 표정이 위 《운우도첩》의 두 그림 분위기와 많이 닮았다.

그림의 격조를 한층 높여준다는 인상이다.

 

[위 전 신윤복 그림의 부분]

 

《운우도첩》과 《건곤일회첩》에 조금 더 선정적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있기는 하다.

 

[전 김홍도 《운우도첩》中 ]

 

[전 김홍도 《운우도첩》中 ]

 

[전 신윤복 《건곤일회첩》中]

 

그러나 이런 그림들조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남녀의 신체에 눈이 머물게 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더 신경을 쓰게 만든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춘의(春意)가 남녀의 신체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狀況)’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남녀의 신체나 행위로 춘정(春情)을 불러일으키려

했다면 이렇게 나이 든 인물들의 그림은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전 김홍도 《운우도첩》中]

 

소위 춘화첩이라는 《건곤일회첩》의 나머지 그림들에는 성기의 노출은 물론이고 성애장면도 없는 그림들이

있다. 조선의 화가들은 그런 그림을 춘화라고 그렸다. 성기를 보여주지 않고 노골적인 행위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춘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조선의 화가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상징, 은유, 또는

은근함이라고 부른다.

 

[전 신윤복 《건곤일회첩》中]

 

[전 신윤복 《건곤일회첩》中]

 

[위 그림 중 부분]

 

[전 신윤복 《건곤일회첩》中]

 

이런 그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 상상은 보는 이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결말을 보여주는 영화보다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영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듯 조선의 화가들은 상상의

단초만 제공하고 그림의 완성은 보는 이에게 맡겼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급함 대신, 춘화라도 어떻게든 그

안에 낭만과 해학, 예술을 담으려 했던 화가의 자존심이거나 세간의 비난을 비껴가고 싶은 고심에 찬 방책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위키백과,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춘화, 외설과 예술 사이

  1.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 1913 ~ 2001)은 왜색이 짙었던 스승 김은호의 영향으로 초반에는 일본화풍에 충실한 채색화를 그리다가 이후 수묵담채화의 반추상적 경향을 보인 뒤 계속 화풍을 바꾸어 ‘바보산수’, ‘바보화조’ 연작, ‘청록산수’ 연작과 같은 독창적인 화풍을 선보이면서 현대 한국화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생시에는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만 원 권 지폐에 있는 세종대왕의 얼굴은 그의 작품이다. [본문으로]
  2. 원제(元帝)는 중국 고대의 4대 미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는 왕소군(王昭君)의 일화로 유명한 전한(前漢)의 제11대 황제이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원제(元帝)는 후궁이 너무 많아 화공(畵工)이 그린 후궁들의 초상화를 보고 잠자리를 할 후궁을 골랐는데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었다. 소군이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가기 위해 떠날 즈음에 원제가 왕소군이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한 것을 보고 크게 후회하였다. 이에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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