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20

從心所欲 2019. 3. 9. 14:46


[신윤복 「혜원전신첩」中 <정변야화(井邊夜話)>, 28.2 x 35.2㎝, 간송미술관]


서 있는 여인은 턱까지 궤고 무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다. 밤에 여인 둘이 우물가에서 무슨 얘기로 이렇게

심각한 것일까?

상상이다. 담 너머에 보이는 남자가 쪼그려 앉아 두레박줄을 쥐고 있는 여인에게 부탁을 했다. 평소 눈여겨

보았던 여인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일만 잘 되면 톡톡한 보상도 약속했다. 그래서 부탁받은 여인이 서 있는

여인을 밤에 우물가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이런저런 얘기로 여자를 설득하는 중이다. 갑작스런 제안에 여인은

고민에 빠졌다. 꼬드기는 말에 여인이 거절하기 힘든 유혹거리가 있든지 아니면 거절했을 때의 뒷일이 걱정되는

상황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가정이 있는 부녀자로서의 윤리를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방관을 쓴 남자는 담 너머에서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다. 두 여인의 얘기를 엿듣고 있는 것일까? 이 그림을

현대의 스냅 샷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즉 남자가 실제로 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그림에서

남자와 두 여인 간의 물리적 거리와 위치는 사실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리얼리티를 생각한다면

찐덥지 않은 속내를 털어놓은 남자는 집안 어디선가 두 여인의 얘기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마땅하다.

어쩌면 초조하게 마당을 서성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집밖 우물가에 있는 두 여인과 집안 어딘가에

있는 남자를 사실적 거리감을 두고 그린다면 서로의 상관관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화가는 멀쩡한 담을 반쯤 무너져 내린 것처럼 낮추어 집안의 남자를 여인들 가까이에 그렸다. 여인들의

이야기가 이 남자와 관계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또한 남자가 결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남자의 모습이 없었다면 두 여인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누가 어떻게 짐작이나 하겠는가!



[신윤복 「혜원전신첩」中 <무녀신무(巫女神舞)>, 28.2 x 35.2㎝, 간송미술관]


이 그림은 ‘굿하는 집의 아낙과 이웃 남자가 굿판에서 눈이 맞았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두

남녀가 눈이 맞는 상황이 그림과 같은 상황일 수는 없다. 남자가 여자의 맞은편에 있어야 서로 눈을 맞추더라도

맞출 수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사실적으로 그려 놓으면 구경꾼들 속에서 누구와 누가 눈을 맞추는지, 무슨

의미로 눈을 맞추는지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화폭 오른쪽에 다른 구경꾼들 틈에 섞여있어야 할

남자를 딱 떼어내 여인 가까이 담 너머에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그림의 군더더기가 될 화폭 오른쪽에 있어야 할

구경꾼들도 다 생략해버렸다. 담이 비사실적으로 낮게 그려진 것은 남자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사실성은 떨어져도 그림의 의미는 명확해졌다.



[신윤복 「혜원전신첩」中 <월야밀회(月夜密會)>, 28.2 x 35.2㎝, 간송미술관]


제목은 ‘달밤의 밀회’이지만 이 그림은 밀회 그 자체보다는 밀회를 들켰다는 사실에 더 중점을 둔 그림이다.

철편을 든 포교가 한 여인을 끌어안고 거의 입을 맞추는 모습으로 있다. 설마 그 옛날에 근무 중에 부인 불러내서

이 짓을 할 리는 없으니 일단 남의 부인이라 봐야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한 걸음만 나서면 뻔히 보일 위치에

한 여자가 담벼락에 몸을 숨기듯 붙어 서서 두 사람의 밀회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여인은 포교에 안겨있는

여인보다는 복색이 좋아 보인다. 장옷을 걸치고 머리에 얹은 가체도 크다. 이 여인의 신분이 기생이라는 주장도

있고 양반집 부녀자라는 말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신윤복이 다른 그림에서

보여준 기생들의 분위기와 여인의 분위기가 다르다. 기생이라고 주장하는 측은 부녀자가 한밤중에 저렇게

밖에 나올 수 있겠냐는 것인데 그것은 여자가 그림처럼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그림은 ‘난봉꾼

포교가 기왕에 사귀던 여자를 놓아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다 들통이 났다’는 이야기를 당시의 화법대로 그린

것이다. 실제 여자가 밀회장면을 숨어서 봤느냐 안 봤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위 <정변야화> 의 사방관을 쓴

남자와 같은 경우다. 《운우도첩》의 스님 파계 장면을 훔쳐보는 동자승이나 《건곤일회첩》의 방안 정사

장면을 문 열린 옆방에서 훔쳐보는 처녀나 모두 같은 의미의 배치다. 그림에서 배신을 당한 여자가 기생이냐

양반집 부녀자냐에 따라 이야기가 전해주는 감흥이 다르다. 아무려면 신윤복이 감도(感度) 낮은 기생과의

삼각관계를 소재로 삼아 그렸을까!



[전(傳) 신윤복 <사시장춘(四時長春)>, 지본담채 27.2cm x 15cm, 국립중앙박물관]


신윤복 전칭작인 <사시장춘(四時長春)>은 <기다림>과 더불어 은유와 상징성에 있어 조선 최고의 춘화가

아닐까 싶다.


화폭 왼쪽의 나뭇가지에 가려 건물은 방문의 일부만 보이는데, 닫힌 방문 앞에는 남녀의 신발 두 켤레가

놓여있다. 이 건물이 어디인지 또 방안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신발이 가죽과

비단으로 만드는 혜(鞋)이니 방안의 인물들이 상민은 아니다. 그런데 신들이 섬돌이 아닌 쪽마루 위에

올려져있다. 여러 해석이 분분하지만 방안에 남녀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신발을

잘 보이는 위치에 그려 넣은 것 뿐이다. 신발을 실제보다 크게 그린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두 남녀가

급한 마음에 쪽마루까지 신발을 신고 올라섰다는 해석은 좀 억지스럽다. 아무리 급하기로 조선시대의 성인

남녀가 쪽마루에까지 신발을 신고 올라간다는 것은 습관적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화가가 그런 의도로

그렸다면 당연히 쪽마루 밑에 섬돌도 그렸을 법한데 나뭇가지에 가려진 섬돌의 위치에는 섬돌의 그림자도

안 보인다. 더군다나 여자의 신이 놓인 모양새가 너무 가지런하지 않은가! 물론 남자의 흑피혜(黑皮鞋)가

흐트러진 것은 남자의 급한 마음을 표현한 화가의 의도된 솜씨다.

이 그림의 백미는 마당에서 술 쟁반을 받쳐 들고 서있는 계집종이다. 사실 이 소녀가 방으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가다가 중간에 우뚝 선 것인지는 알 수 없는데 예리한 눈을 가진 감상자들이 이 소녀의 상황을 기막히게

분석해냈다. 방안에 들어있는 두 남녀 중 누군가의 분부에 따라 계집종이 술상을 차려오는 사이 방안에서는

이미 일이 벌어졌다. 술 쟁반을 들고 방으로 다가가던 계집종은 뒤늦게 방안의 사태를 눈치 챘다. 방안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상황인데 그렇다고 주인이 가져오라는 술상을 안 가져 갈 수도 없고.... 그래서

진퇴양난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계집종의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계집종이 안쓰럽지만 상황은 너무

해학적이다. 화가는 기둥의 주련(柱聯) 문구를 통해 화룡점정을 한다. 사시장춘(四時長春).

일 년 사시가 늘 봄과 같기를 바라는 글귀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방안의 분위기가 어떠한지를 짐작케 한다.

오른쪽의 계곡은 여성의 음부를 상징한다고 한다. 음(陰)이 있으면 양(陽)도 있기 마련이니 그렇다면 왼쪽의

무성한 나뭇가지는 양을 상징하는 것일까?


신윤복이 그렸다고 하면 누구라도 수긍할 이 그림이, 전칭작으로 불리는 까닭은 역시 후낙관(後落款)

때문이다. 후세에 누군가가 그림 값을 올리기 위해 신윤복의 낙관을 찍은 것이다. 사실 「혜원전신첩」에도

신윤복의 낙관이 없는 그림들이 여럿 있다. 오히려 가만 놔두었으면 신윤복의 그림으로 이의가 없을 그림이

욕심으로 찍은 도장 때문에 전칭작 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리 옛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선 경교명승첩 2  (0) 2019.07.13
정선 경교명승첩 1  (0) 2019.07.12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9  (0) 2019.03.02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8  (0) 2019.02.25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7  (0) 2019.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