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경교명승첩 2

從心所欲 2019. 7. 13. 18:56



정선은 금강산 그림에서 보여주던 특유의 힘차고 호쾌한 산악 중심의 진경산수화와는 달리, 「경교명승첩」

에서는 강변 풍경에 어울리는 맑고 화사하며 섬세한 청록산수 중심의 새로운 구도와 화법을 선보였다.

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66세의 정선은 그림의 소재에 알맞게 부드러운 선묘, 서정적인 선염, 그리고 청록색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채색으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여 또 다른 품격의 그림을 그려냈다.

「경교명승첩」상첩은 양천10경이 주축을 이룬다. 간혹 양천8경이라고 전하는 글도 있는데, ‘양천8경’은

정선이 이 첩에 10경을 그린 다음 해에 또 다시 그린 다른 그림이다.



[정선 <목멱조돈(木覓朝暾)>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목멱조돈(木覓朝暾)은 ‘목멱산에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목멱(木覓)은 남쪽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인 ‘마뫼’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으로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정선이 부임해 온 양천현의 관아는

지금 서울 가양동 궁산 아래에 있었다. 강 건너로는 삼각산 연봉이 백색의 신비로움을 자랑하며 줄기줄기

내려와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장관이 한눈에 잡히고, 동남으로는 한강상류 방향 강 건너편에 남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19세기 초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 속의 양천]


그래서 양천현의 동헌(東軒)인 종해헌(宗海軒)이나 궁산 기슭에 세워졌던 소악루(小岳樓)에 앉아서 해 돋는

정경을 바라보면 초봄의 해는 남산, 즉 목멱산(木覓山)에서 솟아올랐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아는 이병연이

목멱조돈(木覓朝暾)이라는 시제(詩題)로 시를 지어 보냈고 정선은 이를 그림으로 그려냈다.


曙色浮江漢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觚稜隱釣參 전각의 높은 모서리들이 낚싯배에 가린다.

朝朝轉危坐 아침마다 방향 바꿔 무릎꿇고 앉으니

初日上終南 맨 처음 뜨는 해가 남산에 올랐네.


[정선 <공암층탑(孔巖層塔)>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공암(孔巖)은 구멍이 뚫린 바위라는 뜻인데 『동국여지승람』에는 “바위가 있는데 물 가운데 서 있고 구멍이

있어 그로 인연해서 이름을 삼았다.”고 지명에 대한 주(註)가 달려있다.

이 바위는 대대로 여러 이름이 있었는데, 고려 때에는 재차바위[齊次巴衣]라고 했다 한다. ‘차례로 서있는

바위’란 뜻으로 강 속에 솟아있는 세 개의 큰 바위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전해진다. 그런가 하면 ‘허가바위’라고도

했다. 그림 오른쪽 탑이 있는 산의 바위로 된 절벽 밑에 꽤 넓은 석굴이 있다. 이 석굴에서 양천 허(許)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출현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이 바위 절벽을 허가바위라 한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934) 90여세의 나이로 강을 건너는 편의를 제공하고 군량미까지 제공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허선문을 공암촌주(孔巖村主)에 봉하고 그 자손이 이 땅을 대대로 물려받아 살게 했다.

공암 허씨 또는 양천 허씨는 모두 이 허선문의 후손들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광제(廣濟)바위 혹은 광주(廣州)바위라는 이름도 있다. 광제(廣濟)는 ‘너른 나루’라는 의미로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두고 있을 때는 공암나루가 꽤 큰 나루 중 하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고 있다.

광주바위는 이 광제바위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는데, 이 이름에도 또 전설이 있다. 이 바위가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던 것인데 홍수가 나서 이곳까지 떠내려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가 개인 뒤 광주 고을에서 없어진

바위를 찾아다니다가 양천의 탑산 끝머리에 와 있는 것을 보고는, 광주관아에서 바위 대신 조세를 바치라고

하였다. 양천고을 원님도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그 바위에서 생산되는 싸리나무로 해마다 비

세 자루를 만들어 보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를 귀찮게 여긴 양천현령이 이 바위들이 배가

드나드는 데 거치적대니 광주로 다시 옮겨가라고 했다. 그 뒤로는 광주에서 다시는 이 바위를 광주바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는 내용이다.



[옛 지도 속의 양천현아와 공암]


이병연이 보낸 제시다.


孔岩多古意 공암에 옛 뜻 많으나

一塔了洪蒙 탑 하나만 아득하구나,

下有滄浪水 아래에 푸른 물결 넘치고,

漁歌暮影中 고기잡이 노래, 저녁 그림자 속에 잠기네.


공암은 1980년대 초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올림픽대로가 건설하면서 둑길이 강 속을 일직선으로

긋고 지나면서 이 두 바위는 육지 위로 올라서게 되었고 현재는 구암 허준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구암공원

인공호수 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림의 산 중턱에 보이는 석탑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산은 지금까지도 탑산(塔山)이라고 불리지만, 일제강점기 때 양천우편소장이던 왜인이 석탑을 양천우편소에

옮겨 놓은 이후, 현재는 탑의 간 곳을 모른다.



[정선 <금성평사(錦城平沙)>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금성평사(錦城平沙)는 ‘금성의 평평한 모래펄’이라는 뜻이다. 그림은 양천에서 지금의 난지도를 바라본 풍경이다.

금성(錦城)은 모래내와 홍제천 사이에 있던 금성산(지금의 성산동)을 가리킨다. 옛날 난지도 지역은 모래내,

홍제천, 불광천이 서로 물머리를 맞대고 건너편에는 안양천까지 있어 이 물들이 실어온 흙모래가 쌓인 커다란

모래섬이 있었다. 그림 속의 모래섬은 강 가운데까지 깊숙이 들어온 모양인데, 섬의 모양은 홍수가 날 때마다

달라졌다. 특히 이 지역은 한강 폭이 호수처럼 넓어서 ‘서호(西湖)’라고도 불리던 경치 좋은 곳이었다 한다.


欄頭來晩色 十里夕陽湖

난간의 머리에는 저녁 빛이 다가오고

십리 호수에는 저녁 햇살 비추네

拈筆沈吟久 平沙落雁圖

붓 들고 나지막이 바라보니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 내리는 그림이라.



[정선 <설평기려(雪坪騎驢)>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화제는 ‘눈 쌓인 벌판을 나귀 타고 가다’라는 뜻이다. 눈 덮인 들판의 좁은 길을 나귀타고 가는 선비. 아마도

눈 내린 어느 날 새벽, 나귀를 타고 일찍 현아를 나와 양천 들판을 향하는 정선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맹호연(689 ~ 740)은 도연명(陶淵明)을 존경하여 깊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 유랑과 은둔생활을 하며 술과 가야금을 벗 삼아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이른 봄에, 당나귀를 타고 장안에서 파교를 건너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났다는 고사(古事)가

전해지고, 이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탈속하고 고아한 선비의 대명사로 인식되기도 했다. 또한 그러한 고사를

화제로 하여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또는 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라는 이름으로 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설평기려>라는 화제가 없었다면 이 그림도 아마 그런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역시나 이병연의 제시에도

맹호연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시 구절이 등장한다.


長了峻雙峰 길구나. 높은 두 봉우리.

漫漫十里渚 아득한 십 리 벌판일세.

祗應曉雪深 다만 거기 새벽 눈 깊을 뿐

不識梅花處 매화 핀 곳 알지 못해라.


나귀 탄 인물이 출발하는 곳은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부근 양천현아 입구이고, 드넓은 벌판은 등촌3동이며,

멀리 보이는 두 봉우리는 우장산으로 지금 발산2동 우장근린공원에 해당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성산 남쪽 기슭에서 우장산을 바라보면 이 그림에서 보이는 산과 들의 모습을 그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정선이 부임하던 해 ‘이병연이 동지 이틀 전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직전에

이 그림이 그려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영조실록 기사에 의하면 정선이 부임한 날은 12월 11일로

나온다. 새로운 임지에 부임한 며칠 사이에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 여유가 있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양천10경’ 가운데 가장 먼저 그려진 그림일 것이다.



[정선 <소악후월(小岳候月)>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화제는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라는 뜻이다.『양천읍지』누정조(樓亭條)에 의하면, “악양루 옛터에

소악루가 있으니 현감 이유가 지은 것이다. 그는 자를 중구, 호를 소와 또는 소악루라 하는데 영조 조에

동복현감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중국 악양루 제도를 모방해 누각을 창건하고 소악루라

이름 했다”고 한다.

악양루(岳陽樓)는 중국 후난성[湖南省] 동정호구 악주부(岳州府)의 성(城) 서쪽 문 누각으로, 동정호의

동안(東岸)에 위치하여 호수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고 풍광이 아름다운 것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유(李渘, 1675~1753)가 소악루의 경치가 이런 악양루 경치에 버금간다 하여 작은 악양루라는 의미로

'소악루(小岳樓)'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술, 시문,서화를 사랑하여 사람들은

그를 ‘강산주인(江山主人)’이라 불렀다고 한다. 소악루가 양천현아(陽川縣衙)의 지척에 지어진 것은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부임하기 불과 2, 3년 전의 일이었다.


巴陵明月出 파릉(巴陵)에 밝은 달뜨면

先照此欄頭 이 난간머리에 먼저 비춘다.

杜甫無題句 두보 시에 제구(題句) 없으니,

終爲小岳樓 마침내 소악루가 된 것이다.


파릉(巴陵)은 중국의 악양(岳陽)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인데 양천현(陽川縣)의 옛 이름이기도 했다.



참조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2002. 정옥자), 서울지명사전(2009.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 설평기려(최완수), 한국역대서화가사전(2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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