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경교명승첩 3

從心所欲 2019. 7. 15. 15:19

 

 

[정선 <안현석봉(鞍峴夕烽)>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안현의 저녁 봉화’

해질녘 양천현아가 있는 궁산에서 강 건너편 안현의 봉화대를 바라본 정경이다. 안현은 길마재, 안산(鞍山),

모악산(母岳山) 등으로 불리는 산으로,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봉원사와 연세대, 이화여대를 품고 있는

산이다. 안산 또는 안현이라 부르는 것은 산 모양이 말안장 같이 생겼다는 이유에서다. 모악재(무악재)또는

모악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풍수지리설에서 유래한다. 한양의 명당의 근원이 되는 으뜸산인 조산(祖山)은

삼각산(북한산)인데 그 모양이 마치 어린아이를 업고 서쪽으로 달아나는 모양이라, 이를 막기 위해 인왕산의

서쪽 산을 어미산인 모악(母岳)으로 불렀다고 한다.

 

원경 정상부에 붉은 점으로 봉화를 표현한 안현과 와우산, 정토산을 연이어 그렸다. 안현에는 태조 때부터

봉수대(烽燧臺)를 설치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의 국경 상황을 전하는 역할을 하게 하였다. 별 일 없이 무사하면

봉홧불이 하나만 오르는데, 그림을 그리던 날 저녁은 조선 땅이 평안하였던가 보다. 

근경의 왼쪽에는 궁산 자락 숲 속의 소악루, 그리고 오른쪽에는 탑산과 공암을 배치하였다.

 

有味老淸時 계절 맛 참으로 좋은 때,

捲簾山色晩 발 걷으니 산 빛이 저물었구나,

笑看一點星 웃으며 한 점 별 같은 불꽃을 보고,

飽喫陽川飯 양천(陽川)밥 배불리 먹는다.

 

[정선 <양화환도(楊花喚渡)>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양화나루에서 배를 부르다.’

배로 한강을 건너 오가던 시절, 한강의 양화나루는 북쪽은 잠두봉 절벽아래에, 강 건너 남쪽은 선유봉 아래에

나루터가 있었다. 양쪽을 모두 양화나루라고 불렀다. 지금은 각기 양화대교 북단과 남단이다.  와우산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능선이 한강변에 이르러서 불룩하게 솟아오르자 마치 머리를 치든 누에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렀다. 머리를 치든 모양 때문에 '들머리'라고도 불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때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잠두봉으로 끌려와 목이 잘리고 시신은 한강에 버려졌었다. 이후로 잠두봉은 절두산

(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유봉(仙遊峰)은 영등포구 양평동, 한강 변에 위치하였던 봉우리로 산의 형국이 고양이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일명 고양이산 또는 굉이산으로 불렸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여 뱃놀이가 성행하던 곳이었으나 일제에

의한 김포비행장 건설과 1962년 양화대교 건설을 하면서 산을 깎아내고 허물어뜨려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림 오른쪽 아래 구석에 보이는 삼각 모양의 봉우리가 신선들이 놓았다는 선유봉이다.

예전에 이곳에서는 삼각산으로부터 관악산에 이르는 서울 주변의 명산을 한눈으로 조망할 수 있을뿐더러,

광활한 백사장과 호수 같은 너른 강물이 아래위로 이어지는 큰 강의 호쾌한 풍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양천쪽 양화리는 동네 한강변에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꽃이 필 때면 장관을 이루어서 양화(楊花)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병연의 제시를 정선이 썼다.

 

前人喚船去 앞사람이 배를 불러 가면,

後客喚舟旋 뒤에 온 손님이 배를 돌리라 한다.

可笑楊花渡 우습구나 양화나루,

浮生來往還 뜬 구름 인생 헛되이 오가는 것 같다.

 

[정선 <종해청조(宗海聽潮)>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종해헌에서 조수(潮水) 소리를 듣다’

종해헌(宗海軒)은 양천 관아의 동헌 이름이다. 종해(宗海)는 ‘모든 강물이 바다를 종주(宗主·우두머리)로

삼아 흘러든다’는 옛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한강이 모든 강물을 대표하고 한강물은 양천 앞에서 바닷물과

부딪치므로 이곳을 종해(宗海)로 비유한 것이다.

한강이 흘러드는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지역으로, 그 중에서도 한강물이 바다로 물머리를 들이미는

강화만 일대는 그 격차가 가장 큰 곳이다. 한강 하류 강변에 있었던 양천현의 동헌에서도 물이 들고 나는 그

요란한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그림은 관아가 들어서 있는 궁산 중턱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종해헌을

위시한 양천관아와 부근의 풍광을 담았다. 종해헌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는 선비는 아마도 정선 자신일 것이다.

 

大哉滄海信 크구나 믿을 만한 너른 바다,

感槪佐潮歌 밀려드는 감개가 조수의 노래를 돕는다.

路阻朝宗後 조종(朝宗) 길 막힌 후에,

乾坤怒氣多 하늘과 땅의 노기만 가득하다.

 

조종(朝宗)은 중국에서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던 일을 가리키는데. 봄에 알현하는 것을 조(朝)라 하고, 여름에

알현하는 것을 종(宗)이라 했다 한다. 또한 조종은 강물이 바다로 흐르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한데 여기서는 중의적으로 쓰인 듯 하다. 조종 길이 막혔다는 것은 중국의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로 여기는

청나라가 득세한 현실을 비유하는 것으로 그런 현실에 천지가 분개한다고 표현했다. 이것이 단지 이병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던 조선 지식인들 대다수의 시대감각과 세계관이었다.

조수의 들고남은 노래해도 세상사의 들고남의 이치는 눈과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보다.

 

[정선 <행호관어(杏湖觀漁)>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행호(杏湖)에서 고기잡이를 보다.’

행호는 현재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덕양산 부근의 한강이다. 예전에는 한강이 개화산과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 앞에서부터 호수처럼 넓어져 행주(杏州) 또는 행호(杏湖)라고 불렀다 

지금 그 행호에서 여러 척의 배들이 한데 모여 고기잡이에 한창인데, 너른 물길에 쳤던 그물을 좁혀가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이런 고기잡이가 벌어지는 것은 별미 중의 별미로 알려진 행호의 웅어와 황복어을

잡기 위해서다. 모두 임금의 수라상에 오르는 계절의 진미여서 사옹원(司饔院)1에서는 음력3,4월이 되면

고양군과 양천현에 진상을 재촉했다 한다. 그래서 때가 되면 고양군과 양천현에서 어선을 모아 본격적으로

웅어와 황복어 잡이에 나서게 되는데 이 그림은 그 때의 풍경을 그린 듯하다.

 

春晩河腹羹 늦봄에는 복어국이요,

夏初葦魚膾 초여름에는 웅어회라.

桃花作漲來 복사꽃 가득 떠내려 오면,

網逸杏湖外 행호 밖에서 어망을 잃겠구나.

 

강 건너편은 한강변의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던 경승지로, 당대 고관들의 별서들이 들어서 있었다. 맨 좌측

벼랑 위 수풀에 숨겨진 기와집 두어 채는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별서인 낙건정(樂健亭)으로 지금

행주대교가 지나가고 있는 덕양산의 끝자락이다. 김동필은 이병연의 이종사촌 아우였다고 하며 그의 둘째 아들

김광수는 당대 서화골동 수집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정선의 그림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가운데는 행주대신으로 불리던 송인명(宋寅明, 1689 ~ 1746)의 장밀헌(藏密軒)이다. 세 별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데 송인명은 당시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세도를 좌우하던 인물이었다 한다.

맨 우측은 김시좌(金時佐, 1664~1727)가 벼슬에서 물러나 지내던 집과 귀래정(歸來亭)이다. 당시의 귀래정

주인은 김시민(金時敏)이었는데 농암 김창협(金昌協)과 삼연 김창흡(金昌翕)의 삼종질인 동시에 그들의

문인이어서  정선, 이병연과는 동문이자 시벗이었다. 그 역시 진경시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다.

 

[정선 <빙천부신(氷遷負薪)> 견본채색 23.0 x 29.4cm, 간송미술관]

 

 

‘얼음벼루에서 나뭇짐을 지다’라는 화제로, 벼루는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을 가리킨다.

 

層氷薪在背 登髮不言難

惟恐洛城裡 曲房歌舞寒

층층이 얼음길에 나뭇짐 등에 졌어도

모래땅 밟으며 어렵다 하지 않네

다만 걱정하는 것은 도성 안이니

가무하는 곡방(曲房)2이 춥지나 않을까.

 

나무꾼의 위험한 수고와 그 덕분에 안락하게 지내는 성안 사람들의 삶을 비교하여 선비로서 마땅히 근신하고

자족(自足)해야 함을 드러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제시 말고도 이 그림 뒤에는 이병언이 동짓달 22일에 보낸 편지가 붙어있다.

 

“글월이 동어(凍魚)3 풍미를 띄우고 오니 아침이 와도 방상 대할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받들어 보니 정무가 매우 바쁘신 모양이나 어찌 조금 참지 않으시겠습니까? 십경(十景)이 매우 좋아서 시가 좋기 어려울까 걱정입니다. 곧 벽에 걸어놓고 보겠습니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이 그림이 양천10경의 마지막 그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조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정선과 이병연의 ‘콜라보’(경향비즈), 한국역대서화가사전(2011),

서울지명사전(2009.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조선시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한국민족대백과) [본문으로]
  2.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방 [본문으로]
  3. 언 생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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