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은 ‘양천십경’ 두 벌을 그려 한 벌은 이병연에게 보내고 한 벌은 자신이 보관했다. 그리고 후에 다른
그림들과 묶어 첩을 만든 것이 「경교명승첩」이다. 정선의 집안에서 보관하던 이 첩은 정선의 둘째아들 정만수
(鄭萬遂), 손자 정황(鄭榥)을 거쳐 1802년 심환지에게로 넘어간다. 천금을 준다 해도 절대 남의 손에 넘기지
말라는 ‘천금물전(千金勿傳)’ 도장을 거의 모든 그림에 공들여 찍은 정선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정선이 죽고
불과 40여년 만에 첩은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첩을 인수한 심환지는 원래 1권이던 첩을 2권으로 개첩(改捷)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상첩(上帖), 하첩(下帖)의
구분이 생겼다. 하첩에는 정선이 살던 집과 그 주변, 그리고 거기서 바라본 도성의 경관, 양천현령 당시
이병연의 시찰을 화제로 그린 고사인물화, 이병연이 타계한 10여년 뒤에 옛날 일을 회상하며 그려 보충한 그림
등 여러 소재의 그림 14점이 섞여있다. 또한 이병연의 글씨 5점과 이 화첩을 양도한 정선의 아들 정만수의
편지, 이를 인수한 심환지가 1802년 7월에 쓴 발문도 합장되어 있다.
심환지(沈煥之, 1730-1802)는 영조에서 순조 때의 문신으로 1800년 순조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영의정에 올랐다. 철저한 벽파(僻派)의 선봉으로, 1801년 천주교도 탄압사건인 신유사옥에 관여하여
반대파를 크게 살육한 것으로 원성을 얻었다. 관료로서의 치적은 별 것이 없으나, 다만 죽을 때까지 검소한
생활을 한 것은 칭찬받았다고 한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인곡유거(仁谷幽居)> 1755년경, 지본담채 27.4 x 27.4cm 간송미술관]
정선은 평소 친분이 있던 문인들의 부탁을 받아 그들의 저택이나 정자 등을 많이 그려주었고 또한 자신이 살던
동네와 집도 자주 그렸다. 정선은 50줄에 들어서면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그동안 살던 북악산 밑의 집에서
지금의 옥인동인 인왕산 자락 골짜기로 집을 옮겼다. 그리고 그 집에서 52세부터 30년을 넘게 살았다. ‘인왕산
골짜기의 그윽한 거처’를 뜻하는 인곡유거(仁谷幽居)는 바로 정선이 살던 집이다. 그러니 그림 속 창문을 활짝
열어 제친 방안에서 책을 펼쳐놓고 앉은 인물은 정선일 것이다. 집은 슬쩍 구석에 걸쳐 놓고 넓은 마당과 집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에 더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은자(隱者)의 집처럼 고즈넉하고 한가로워 보인다.
정선의 집 전체를 보여주는 그림이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에 있다.
[정선 「퇴우이선생진적첩」 中 <인곡정사(仁谷精舍)> 1746년, 지본수묵 32.5 x 22.5 cm , 개인소장]
정사(精舍)는 학문을 연구하거나 정신을 수양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인곡유거>보다 10년 전쯤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의 집은 규모도 있고 꽤 번듯해 보인다. 마당의 두 나무는 덜 자란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는데 대문 위의 지붕이 기와인 것이 다르다. 그 사이 기와를 걷어내고 초가지붕으로 바꾸었을 수도 있지만,
정선이 <인곡유거>를 그리면서 집의 소박한 운치를 살리기 위하여 그림에만 초가로 그렸을 수도 있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장안연우(長安烟雨)> 지본수묵 30.0 x 39.8 cm 간송미술관]
정선은 어려서부터 지금의 청와대 뒤쪽인 백악산 아래 살면서 화흥(畵興)이 일면 문득 산을 대하여 사생했다고
한다. 정선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서울 장안의 모습을 수도 없이 보고 또 그렸을 것이다.
안개비가 내리는 어느 날, 지금의 효자동로터리에서 주한교황청대사관 앞을 지나 창의문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중간 어디쯤에서 도성을 내려다 본 풍경이다. 어쩌면 북악산 밑에 있던 정선의 옛 집에서 본 풍경일
수도 있다. 가깝게는 경복궁 후문인 신무문과 담장도 보이고 광화문 누각의 실루엣도 보인다. 연무(煙霧)가
낮게 깔려 장안의 대부분은 가려있지만 멀리 남산은 그 자태가 오히려 더 또렷하다. 멀리 관악산과 우면산
자락이 아련하다. 안개비에 잠긴 한양의 모습은 무릉도원인 듯 아름답고 평안하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장안연월(長安烟月)> 지본수묵 28.2 x 41.0cm 간송미술관]
밤안개에 묻힌 장안 위로 둥근 달만 교교하다. <장안연우>를 그렸던 곳과 같은 지점에서 본 것이겠지만
<장안연우>의 근경에 있던 지역은 생략하고 좀 더 멀리 내다본 느낌이다. 지리산의 운무 광경처럼 안개에 잠긴
옛 한양의 밤은 또 다른 선경(仙境)이었을 것 같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은암동록(隱岩東麓)> 지본담채 31.5 x 30;5cm 간송미술관]
화제에 나오는 은암(隱岩)은 북악산 기슭에 있던 큰 바위인 대은암을 가리킨다. ‘동록(東麓)’은 ‘동쪽 산기슭’
이다. 그러니까 그림은 대은암이 있는 산의 동쪽 기슭을 그린 것으로 그림에는 대은암이 나오지 않는다.
대은암(大隱岩)은 크게 숨은 바위라는 뜻이다. 지금 청와대가 들어서있는 북악산 남쪽 기슭의 동네를 예전에는
대은암동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대은암의 위치는 청와대 경내 어느 곳으로 추정된다.
그림 왼쪽에 남산이 크게 보이고 오른쪽 멀리에는 희미하게 관악산이 보인다. 중간에 담장너머로 소나무들이
보이는데 여기가 경복궁이다. 그림 속 경복궁 북쪽 담장이 군데군데 무너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고 훼손된 이후 손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복궁은 그때까지 폐허처럼 내버려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림 앞쪽에 잔디밭처럼 보이는 지역이 지금 청와대가 들어서있는 자리다.
그림 중간, 오른쪽에서 내려오는 산자락 위에 건물이 보인다. 경희궁의 어느 전각이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길이 비교적 평탄한데다, 중간에 들어선 건물들이 시야를 막아 경희궁 터가 이렇게 높이
올라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상청 자리를 지나 내려오는 능선이 꽤나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산 꼭대기에는 나무 몇 그루가 우뚝한 모습이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하다는 애국가
가사의 모티브가 된 나무들인지 궁금하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양천현아(陽川縣衙> 견본담채 29.1 x 26.9cm, 간송미술관]
이 그림을 포함하여 <인곡유거>, <시화상간>, <홍관미주>, <행주일도>, <창명낭박> 등 6폭은 원래 정선과
이병연이 주고받은 그림이 아니다. 그림에는 이병연이 정선에게 보낸 시구(詩句)의 일부가 정선의 자필로
적혀 있어 이병연의 시를 소재로 제작된 것은 맞지만, 화풍으로 볼 때 이병연의 사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은 겸재가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경신년 세밑에 겸재에게 시로 엮은 편지를 보낸 일이 있었다.
莫謂陽川落 양천에 떨어져 있다 말하지 말게
陽川興有餘 양천에 흥이 넘칠 터이니,
妻努上宦去 처자를 데리고 부임해 가면
桂玉入倉初 보배가 비로소 곳간에 들며,
雨後船遊客 비온 뒤엔 선유객 되리니.
정선이 10여년 후에 이 시의 앞의 두 구절을 화제로 하여 <양천현아>를 그렸다.
「양천읍지」에 양천현아의 동헌 종해헌이 건좌손향(乾坐巽向), 즉 ‘서북쪽에 자리하여 동남쪽을 향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아 건물의 방향이 동남향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선도 그림에 동남향에 맞추어 건물을
살짝 비틀어 그렸다.
중앙에 동헌인 종해헌(宗海軒)이 있고 오른편 동쪽에는 객사인 파릉관(巴陵館)이 보인다. 그림 속 양천현아는
적막하고 한적해 보인다. 1740년 정선이 양천으로 부임할 때 이병연이 지었다는 또 다른 전별시가 전한다.
迎吏楊花渡 마중 나온 아전들과 양화나루를 건너니
津頭是縣衙 나루 끝이 바로 현아로구나
去都三十里 서울에서 삼십 리,
闔境百餘家 경계 내에 집이라곤 모두 백 여 채
政事元無獄 일을 맡아보니 죄인들은 없고
樓臺但有茶 관아 건물에서 차(茶) 마시는 일 뿐
時時覓團領 때때로 관원이 찾아와도
星蓋入江華 사신 행차는 모두 강화로 들어가네.
시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 양천은 큰 고을이 아니어서 관아 공무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선을 아꼈던
영조가 정선을 배러하여 경치 좋고 한가한 곳으로 보냈을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행주일도(涬洲一棹)> 견본담채 29.1 x 26.9cm, 간송미술관]
그림 제목은 행주의 노 젓는 배 한 척이고, 제시는 ‘큰 구름이 난주에 묵점을 뿌리고 동정 파릉에는 상강이 흐르네
(宿雲散墨點蘭洲 洞庭巴陵湘水流)’이다.
양천현의 예전 이름이 파릉(巴陵)이라 그림 제목에 ‘행주’가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제시에 나오는 모든
지명은 중국 것이다. 난주(蘭洲)는 중국 서북북에 잇는 감숙성(甘肅省)의 성도(省都)이고 상수(湘水)는
광서(广西)에서 발원하여 후난(湖南)성을 지나,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가는 샹강(湘江)을 가리킨다. 파릉도
앞에다 동정(洞庭)을 붙여 중국 호남성(湖南省)의 악양(岳陽) 일대를 지칭했다.
감숙성은 산이 많은 지역이고 동정호는 대표적인 중국의 호수이니 이병연은 험준한 산과 넓은 호수가 있는
풍경을 중국의 지명을 빌어 시를 지었을 것이고 정선은 그 시상(詩想)을 바탕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창명낭박(滄溟浪泊)> 1755년경. 견본담채 27.0 x 29.3cm, 간송미술관]
제시는 북쪽에는 큰 빛이 구름을 열고 동쪽에는 큰 바다 물결이 잠잠하다(太華雲開北 滄溟浪泊東)이다.
제시와 그림으로 봐서 동해바다와 금강산을 그린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홍관미주(虹貫米舟)>. 견본담채 27.0 x 29.3cm, 간송미술관]
秪恐龍爭山谷扇 定應虹貫米家舟
용이 싸우는 산곡의 바람은 무서운데 무지개를 통과하는 미씨 집안 배는 평안하다
여기서 미가(米家)는 중국 송대(宋代)에 시(詩), 화(畫)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글씨로는 송4대가의 하나로
꼽히는 미불(米芾, 1051 ~ 1107)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 1090 ~ 1170)을 가리키는 듯하다. 두 부자는
수묵화에 뛰어났는데 그들의 화풍을 미법산수(米法山水) 또는 미가(米家)산수라고 불렀다.
참조 : 미술백과(간송미술문화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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