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경교명승첩 6

從心所欲 2019. 7. 22. 19:59

 

「경교명승첩」하첩에는 4점의 고사인물도(古事人物圖)가 있다. 고사인물도의 형태를 갖춘 <시화상간도>까지 포함하면 실상은 5점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학식과 덕이 높은 성인군자, 출사를 거부하고 자연과 벗하며 수양했던 은일처사를 동경했다. ​그래서 옛 성현의 일화나 책에 담긴 이야기, 그리고 명시(名詩)를 주제로 하는 고사인물화를 즐기며 그 속에서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귀감(龜鑑)을 찾으려 했다.

 

중국 북송(北宋)때의 사상가이자 시인이었던 소옹(邵雍, 1011-1077))도 그런 대상 중의 하나였다. 특히 그의 대표적 저서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7편 외서(外書)에는 ‘어초문대(漁樵問對)’라는 글이 있어 이를 소재로 한 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어부와 나무꾼이 묻고 답한다’는 뜻의 ‘어초문답’이라는 화제의 그림들이 그것이다.

소옹의 ‘어초문대(漁樵問對)’는 그 내용이 철학적이고 길이도 짧지 않아 소개되는 일이 많지 않은데 그 처음과 끝부분만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주로 나무꾼이 묻고 어부가 대답하는 형식이다.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7편 외서(外書) ‘어초문대(漁樵問對) 앞부분’]

 

고기잡이가 이수(伊水)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무꾼이 지나가다 짊어진 짐을 벗어 놓고 너럭바위 위에 앉아 쉬면서 고기잡이에게 물었다.

 

초부(樵夫) : 고기는 좀 낚았습니까?

어부(漁夫) : 예!"

樵 : 낚싯바늘에 미끼가 없어도 됩니까?

漁 : 안 됩니다. 낚이지 않습니다. 미끼는 물고기에게 먹음직스럽지만 해(害)를 줍니다. 사람은 물고기를

이롭게 하는 척하면서 날찍1을 얻습니다. 그 이로움은 같지만 해로움은 다릅니다.

樵 : 외람되지만 여쭙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漁 : 당신은 나무꾼입니다. 나와 하는 바가 다르므로 어떻게 나의 일을 알겠습니까? 그렇지만 당신을 위해

말해 보겠습니다. 그대의 이익은 나의 이익과 같고 그대의 손해 또한 나의 손해와 같지만, 당신은 작은 것만

알 뿐 큰 것을 알지 못합니다. 물고기가 먹기에 이로우면 나 또한 먹기에 이롭고 물고기가 먹기에 해로우면

나 또한 먹기에 해롭습니다. 당신은 물고기가 종일토록 먹을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와 같이 미끼의 해로움은 크고 낚싯바늘의 해로움은 가볍습니다. 당신은 내가

종일토록 물고기를 잡는 것이 이롭다는 것만 알지 내가 종일토록 물고기를 잡지 못하더라도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처럼 나의 손해는 크지만 물고기의 손해는 적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로

사람의 한 번 먹거리를 해결하면 물고기의 손해가 크며, 사람의 한 몸으로 물고기의 한 번 끼닛거리를

해결한다면 사람의 손해 또한 큽니다. 또 큰 강이나 큰 바다에서 낚시질을 한다면 입장이 바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됨을 어찌 알겠습니까? 물고기는 물에서 유리하고 사람은 뭍에서 유리합니다. 물과 뭍은 다르지만

그 이로움은 똑같습니다. 물고기는 미끼 때문에 해를 입고 사람은 재물 때문에 해를 입습니다. 미끼와 재물은

다르지만 그 해로움은 똑같습니다. 다시 어떻게 저것과 이것을 꼭 나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체(體)를 말할

수 있지만 용(用)을 알지 못합니다.  [시작 부분]

 

[마지막 부분]

樵 : 착한 사람은 늘 적고 나쁜 사람은 늘 많으며, 태평한 세상은 적고 어지러운 세상은 많은데 어째서 그러한지

알고 싶습니다.

漁 : 사물을 살펴보건대 어떤 사물이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비유하자면 모든 오곡(五穀)에도 김을 매 주어도

싹이 나지 않는 것이 있고 김을 매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쑥이나 강아지풀은 김을 안 매 주어도

오히려 생겨납니다. 김을 맴에 지극하게 하여도 그 끝이 어찌 되는지 모르는 것이니, 이로써 군자와 소인의

도(道)가 유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군자는 착한 일을 보면 좋아하고 나쁜 일을 보면 멀리합니다. 소인은

착한 일을 보면 시새움하고 나쁜 일을 보면 좋아합니다. 선악이 각각 그 부류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군자는

착한 일을 보면 나아가고 나쁜 일을 보면 따르지 않습니다. 소인은 착한 일을 보면 따르지 않고 나쁜 일을 보면

나아갑니다. 군자는 의(義)를 보면 변화하고 이익[利]을 보면 멈춥니다. 소인은 의(義)를 보면 멈추고 이익을

보면 변합니다. 의를 보고 변화하면 사람에게 이롭고 이익을 보고 변하면 사람에게 해롭습니다. 사람에게

이로운 것과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 어찌 이다지도 멀단 말입니까!

집과 나라는 똑같습니다. 잘될 때에는 군자가 많고 소인이 적으며, 망할 때에는 소인은 많고 군자는 적습니다.

군자가 많으면 떠나는 것은 소인이고 소인이 많으면 떠나는 것은 군자입니다. 군자는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소인은 죽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살리는 것을 좋아하면 세상이 다스려지고 죽이는 것을 좋아하면 세상이

어지러워집니다. 군자는 의를 좋아하고 소인은 이익을 좋아합니다. 태평한 세상에는 의를 좋아하고 어지러운

세상에는 이익을 좋아하는데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고기잡이가 말을 끝맺자 나무꾼이 말하였다. "저는 옛적에 복희(伏羲)가 있는 것을 알았는데 오늘에야

그 참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절을 하고 사례를 한 다음 아침 일찍 떠나갔다.2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어초문답(漁樵問答)>. 견본담채 23.5 x 33.0cm, 간송미술관]

 

어부와 나무꾼이 잠시 쉬는 틈에 잡담을 하거나 노인들이 한담이나 하고 있을 듯한 이 그림의 담론 주제가 우주와 세상 의리에 대한 철학이라니 갑자기 그림이 달라 보일 듯도 하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고산상매(孤山賞梅)>. 견본담채 23.3 x 33.0cm, 간송미술관]

 

이른 봄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때에 매롸를 감상하고 있는 그림 속 인물은 중국 북송 때의 임포(林逋, 967 ~ 1028)이다. 그가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20년 동안 은거하였기에 임포를 고산이라 하였다. 임포가 매화를 감상한다는 것 역시 고사인물도의 단골 소재다.

 

그는 불구자로 부귀공명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고산의 은거지에 매화(梅花)를 심고 학(鶴), 사슴과 더불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사슴의 목에 술병을 걸어 술심부름을 보냈고, 손님이 오면 학이 공중에서 이를 알렸다고 전한다. 또한 매화를 노래한 작품에 걸작이 많아 매화시인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梅妻鶴子)”는 말이 나왔다. 또 고산에서 일생 청빈하게 살았다 하여 '고산처사'라고도 불렸다 한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사문탈사(寺門脫蓑)>. 견본담채 21.2 x 33.1cm, 간송미술관]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

이 그림 뒤에는 이병연이 1741년 겨울에 보낸 편지가 붙어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게 전한다.

 

궁하고 병든 몸이라 문안을 못 드립니다. 다시 화제를 써서 보내드리는데 사문탈사(寺門脫蓑)는 형이 익숙한 바입니다. 소를 타고 가신 율곡 고사(古事)의 본시(本試)에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해 저물고 눈이 산을 덮는데 들길은 큰나무 숲속으로 나뉘어 간다. 또 사립문 찾아가 늦게 두드리고

읍하여 뵈니......” 

 

갖춰 쓰지 못하고 보내드리니 살펴보십시오.

 

편지 내용에 따르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다. 글에서 말하는 사문탈사(寺門脫蓑)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정선과 이병연 사이에는 이에 대한 사전 교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것이 혹시 율곡이 19세 때인 1554년에 서모(庶母)와의 갈등으로 스님이 되고자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 갔던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절 앞에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에는 눈꽃이 피어있다. 그러니 때는 겨울이다. 삿갓 쓰고 도롱이를 걸친 율곡이 검은 소를 타고 절문 앞에 이르자 고깔 쓴 승려들이 달려 나와 도롱이를 벗겨 받는 장면이다. 행랑채가 달린 절문[寺門] 모습도 기이하고 절의 벽 색깔이 분홍빛인 것도 특이하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척재제시(惕齋題詩)>. 견본담채 28.5 x 33.0cm, 간송미술관]

 

‘척재(惕齋)가 시를 짓다’

척재(惕齋)는 김보택(金普澤, 1672 ~ 1717)이라는 인물로 사천 이병연과 함께 문장의 쌍벽을 이뤘었고,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다, 김만중의 증손자이자 숙종의 장인이기도 했다.

마당에서 웬 사람이 버들가지에 꿴 생선 꿰미를 들어 보이고, 방안의 선비는 문장을 짓느라 열심이다. 정선에게 생선을 선물로 받고 감사함을 시를 지어 답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생선 꿰미를 들고 온 심부름꾼에게 감사의 글을 들려 보내려고 붓을 든 척재의 마음이 다급해 보이는 듯도 하다.

선물 받은 생선은 <행호관어>에 등장했던 웅어라고 한다. 웅어는 왕이 사는 도읍지는 꼭 따라다닌다는 전설을 가진 한강의 명물이기도 했지만 압록강에서 예성강, 금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서해로 흐르는 대부분의 강에서도 잡혔다고 한다.

웅어를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하여 사옹원(司饔院)에서 행주에 ‘위어소(葦魚所)’를 두기까지 했으니 그 맛이 뛰어났을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나 지금 한강에서는 웅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웅어철이 돌아오면 가장 좋은 것은 임금에게 진상하고, 남는 것은 한양의 세도가들에게도 돌아갔던 모양이다.

 

그림 속의 척재는 노인처럼 그려져 있는데 그는 46세가 되던 1717년에 사망했다. 아마도 훗날에 정선이 예전 일이 떠올라 척재를 그리며 그린 그림일 것이다. 척재의 집은 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다 한다.

 

[정선「경교명승첩」하첩 <개화사(開化寺)>. 지본담채 31.0 x 24.8cm, 간송미술관]

 

현재의 개화산 약사사(藥師寺)를 조선 시대에는 주룡산(駐龍山) 개화사(開化寺)로 불렀다 한다. 신라 때 이 산에 주룡(駐龍)선생이라는 도인이 숨어 살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림에는 산이 꽤 높게 그려져 있지만 실제 높이는 128m에 불과하다.

개화사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행주산성과 마주보는 자리인데, 멀리 한강과 임진강이 마주쳐 바다같이 넓은 호수를 이룬 곳을 볼 수 있고 인왕산, 북악산, 남산, 관악산과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한강 상류의 물길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명소로 이름이 높았었다고 한다.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병연의 시 중에 개화사를 읊은 것이 있다.

 

春來莫上杏洲舟 봄이 오면 행주 배에 오르지 마오.

客到何須小嶽樓 손님 오면 어찌 소악루만 오르려 하나

書冊三餘完課處 책을 서너 번 다 읽을 곳이라면

開花寺裏費燈油 개화사에서 등유를 소비해야지.

 

 

참조 : 중국역대인명사전(임종욱, 김해명. 2010), 미술백과(간송미술문화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일한 결과로 생기는 이익 [본문으로]
  2. 인용 출처 : 증산도와 한민족의 사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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