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양천팔경첩

從心所欲 2019. 7. 26. 17:47

 

옛 사람들은 경승(景勝)을 만나면 몇 가지를 선정하여 시 짓기를 좋아했다. 그러면서 경치를 꼽을 때는 통상

8경(八景)이니 십경(十景)을 골랐다. 관동8경, 단양8경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가 하면 한양10경(十景)도

있었다. 숙종과 정조가 모두 한양십경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숙종과 정조가 고른 한양십경은 겹치는 것도

있고 서로 다른 것도 있다. 정선도 「경교명승첩」에 ‘양천십경’을 그린 후에 다시 양천8경을 그렸는데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또 언제 누가 골랐는지는 모르지만 양천팔경(陽川八景)을 이렇게 꼽기도 했다.

 

악루청풍(岳樓淸風) ; 소악루의 맑은 바람

양강어화(楊江漁火) ; 양화진의 고기잡이 불

목멱조돈(木覓朝暾) ; 목멱산의 해돋이

계양낙조(桂陽落照) ; 계양산의 낙조

행주귀범(杏州歸帆) ; 행주로 돌아드는 돛단배

개화석봉(開花夕烽) ; 개화산의 저녁 봉화

한산모종(寒山暮鐘) ; 겨울저녁 산의 종소리

이수구면(二水鷗眠) ; 이수의 조는 갈매기

 

정선과 이병연이 꼽았던 ‘양천십경’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정선이 따로 그린「양천팔경첩」에는 8경으로

개화사(開化寺), 양화진(楊花津), 귀래정(歸來亭), 낙건정(樂健亭), 선유봉(屳遊峯), 소악루(小岳樓), 소요정

(逍遙亭), 이수정(二水亭)이 등장한다.

 

「양천팔경첩((陽川八景帖)」은 정선이 1742년 ~ 1743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천십경’이 더

넓은 지역의 경치를 담았다면 「양천팔경첩」은 특정 장소에 집중하여 그린 전형적인 명소도(名所圖)이다.

양화진, 선유봉, 개화사를 제외한 나머지 그림들은 모두 누정(樓亭)이 그림의 화재(畵材)로 선택되었다.

 

[정선, 「양천팔경첩」<개화사(開化寺)>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그림 속 풍경이「경교명승첩」의 <개화사>그림 보다는 조금 더 원경이나 기본적으로 구도는 거의 같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두 그림을 구별하기 힘든데, 이 그림에는 산의 나무가 조금 더 많아졌고 개화사의 3층석탑

오른쪽에 있는 요사체가 ‘ㄷ'자 모양으로,「경교명승첩」의 ’ㄴ'자 모양에서 변화가 생겼다. 그 사이 건물을

증축한 모양이다. 절까지 오르는 길이 분명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짐작으로만 가능할 정도로 처리되었고

강 위에 배치했던 돛단배가 사라졌다.

 

[정선, 「양천팔경첩」<귀래정(歸來亭)>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귀래정은 조선 중기에 형조판서를 지낸 문신이자 서예가였던 죽소(竹所) 김광욱(金光煜, 1580 ~ 1656)이 행주

행호강(현 창릉천)변의 덕양산 기슭에 세운 정자다. 「경교명승첩」<행호관어>에도 모습이 나온다. 김광욱은

광해군 5년(1613)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다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와 행주에서 10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벼슬을 하였는데 그러면서도 늘 행주로 돌아와 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예전에 살던 집을 고치고 그 정자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선이 그림을 그릴 때의 귀래정 주인은 그의 증손자인 김시민(金時敏)으로 정선과 같은 김창흡의

제자로 정선보다는 다섯 살 아래였다.

 

[정선, 「양천팔경첩」<낙건정(樂健亭)>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낙건정은 행주대교가 지나는 덕양산 끝자락 절벽 위에 있던 정자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한 낙건정(樂健亭) 

김동필(金東弼, 1678 ~ 1737)이 벼슬에서 물러나 즐기며 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김동필은 삼연 김창흡의

문인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릴 때 비록 소론이 됐지만 스승과 벗들과의 관계 때문에 노론 성향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경종1년의 신임사화 때 왕세제로 있던 영조가 환관들의 모함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과감히 나서 이들

환관들을 탄핵하여 영조를 위기에서 구해내기도 했다. 그래서 1725년 영조 즉위 후에 노론이 집권하자 좌천될

뻔했으나, 왕의 각별한 비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에 협조하였다

낙건정이란 이름은 송나라때의 서예가이자 당송팔대가(八大家)로도 꼽히는 구양수(歐陽修·1007∼1072)의

‘은거를 생각하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몸이 건강해야 비로소 즐겁게 되니, 늙고 병들어 부축하기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 그 본래의 싯구다. 즉 젊고

건강할 때 은거해 삶을 즐기라[樂健]는 뜻이다. 구양수가 이 시를 44세에 지었는데 마침 김동필이 낙건정을

지을 때도 44세였다고 한다. 김동필이 정선, 이병연과 동문이고 또한 이병연의 이종사촌 아우이기도 했으니

정선도 이병연과 더불어 이 낙건정에 출입을 했을 것이다.

화폭 왼쪽에 멀리 한강 하구에 돛단배들이 무수히 떠 있어 드넓은 바다로 이어지는 느낌을 준다.

 

[정선, 「양천팔경첩」<선유봉(屳遊峯)>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예전 양화나루 일대의 모습이다. 지금의 영등포구 양화동이다. 이곳에는 신선이 놀던 산이라는 선유봉이 있었다.

안양천이 산자락을 휘감으며 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강 쪽으로 붓끝처럼 나온 자리에 솟아있던 봉우리로 높이는

40여m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채석장으로 운용하여 훼손되기 시작해서 양화대교 건설 때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재 양화대교 중간에 선유도공원이 들어선 곳이 선유봉의 옛 자리라고 한다.

 

[정선, 「양천팔경첩」<소악루(小岳樓)>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가양동 성산 동쪽에 있던 누정(樓亭)이다. 지금 가양동에 있는 소악루는 원래 있었던 장소와 건물이 아니다.

세숫대바위 근처에 있던 원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구청에서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1994년

현 위치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정선, 「양천팔경첩」<소요정(逍遙亭)>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소요정은 가양동 탑산 남쪽 기슭에 있던 정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종 때 편찬된 양천현읍지에는 터만

남아있는 것으로 되어있고, 정선의 그림에도 정자는 없다. 따라서 소요정은 정선 이전에 이미 없어진 정자로

보인다.

 

중종 때 좌의정을 지낸 심정(沈貞·1471∼1531)이라는 인물이 소요정(逍遙亭)을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집안은 태종 때부터 4대가 공신으로 봉해진 대표적 훈구공신 가문이었던 덕분에 공암 일대와 개화산 일대가

모두 심씨 집안의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녹훈된 뒤 이조판서까지 올랐다. 그러나 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1518년에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등의 사림(士林) 세력으로부터 소인(小人)으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고 등용되지 못하자 이에 한강변에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이어 자신의 아들마저 탄핵되자 조광조를 포함한 사림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다가 1519년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과 더불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와 신진 사류(新進士類)를

숙청하였다.

 

이렇게 사림에 큰 해를 끼친 인물이니 사림이 정권을 주도한 조선시대에 그가 지은 정자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선 때에도 소요정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지고 그 터만 사람들 입을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서 화제는 소요정인데 그림 어디에도 소요정은 보이지 않고 「경교명승첩」<공암층탑(孔岩層塔)>에서

보았던 공암과 탑산만 보인다. 소요정이 있었던 터도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옛 지도를 보면 공암 서쪽에

소요산이라는 지명이 보여 소요정은 아마도 이 소요산 어딘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옛지도 양천현 부분]

 

 

소요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장자(莊子)」내편(內篇)의 제일 첫 편 제목인 <소요유(逍遙遊)>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장자는 '소요유'의 경지를 도와 일체가 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의존할 필요가 없을 때 이룩되는

것으로 보았다.

 

“천지의 바른 기운을 타고 육기(六氣)의 변화를 몰아서 무궁(無窮)에서 노니는 자는 다시 무엇을

의지할 필요가 있겠는가? 드높은 자는 자아의 흔적이 없고, 신비한 자는 공적을 찾을 수 없으며, 성스러운 자는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심정이 <소요유(逍遙遊)>를 읽어 그 뜻을 알고, 그 뜻이 또한 마음에 흡족하여 정자를 짓고 소요정(逍遙亭)으로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 소요정이라는 호까지도 사용하였지만 실제 생활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종의 후궁이었던 경빈 박씨가 왕세자(뒷날의 仁宗)를 저주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심정이 조작에 관련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심정은 탄핵을 받아 평안도 강서(江西)로 귀양 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는 죽은

뒤에도 많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지며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조선시대 내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선, 「양천팔경첩」<양화진(楊花津)>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일대의 옛 모습이다. 예전에는 잠두봉(蠶頭峯) 또는 용두봉(龍頭峯)이라 불렀던 절두산

아래에 양화나루가 있었다. 강 건너편의 양천에도 같은 이름의 나루가 있었다.

 

[정선, 「양천팔경첩」<이수정(二水亭)> 견본담채 33.3 x 24.7cm 개인소장]

 

 

옛날 강서구 염창동의 도당산(都當山) 꼭대기에 있던 정자이다. 원래는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孝寧大君)의 정자가 있던 곳인데, 후에 이덕연(李德演, 1555 ~ 1636)과 그 아우 이덕형이 늙어서 정자를 고쳐

짓고 이수정(二水亭)이라 했다고 한다. 이덕연은 스스로 호를 이수옹(二水翁)이라고도 했다.

 

이수정이란 이름은 당나라 시인인 이태백(701∼762)의 ‘금릉 봉황대에 올라서(登金陵鳳凰臺)’라는 시의

‘(호국산의) 세 봉우리는 반쯤 떨어져 푸른 하늘 밖으로 나갔고 두 물은 백로주 모래벌 가운데를 갈랐네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안양천이 양화진에서 한강으로

흘러드는 것을 보고 중국 난징의 진회하(秦淮河)가 금릉을 돌아 양자강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견한 듯하다.

 

정선이 ‘이수정’을 그릴 당시에는 그림에서처럼 이수정이 남아있었겠지만 조선말이 되면 이수정은 이미 터만

남아있는 상태로 변하고 만다.  그림 속 이수정은 강가에 도당산 줄기로 보이는 작은 봉우리들이 만나는 곳의

평지에 들어서 있다. 급한 경사를 이루며 솟구쳐 오른 봉우리 사이의 좁고도 급해 보이는 오르막길 덕분에

이수정의 분위기가 더욱 고즈넉하다. 도당산은 성수대교 남단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일대에 아파트들이

들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참조 : 한국미술산책(송희경, 2012)], 미술백과(간송미술문화재단), 중국의 문화코드(2004.강진석),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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