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장동팔경첩2

從心所欲 2019. 8. 1. 10:10

 

 

[고지도의 장동 일대]

 

 

[정선 <장동춘색(壯洞春色)> 지본담채, 18.5 x 27.5 cm, 개인소장]

 

 

인왕산 자락에 봄나들이를 나온 선비들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는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의 지역이 비교적

넓게 조망되었다. 화제는 따로 없는데 누군가 그림 제목을 장동춘색(壯洞春色)으로 붙였다. 그림에 선비들이

앉아있는 곳은 굳이 따지자면 장동 보다는 인왕산 줄기의 어느 작은 봉우리이다. 이곳을 필운대(弼雲臺)로

추정하여 이 그림을 <필운대상춘(弼雲臺賞春1)>이라고도 부른다.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간송미술관

소장본에 <필운대(弼雲臺)> 그림이 있는데 두 그림의 경관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

 

[정선, 「장동팔경첩」<필운대(弼雲臺)>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필운대(弼雲臺)는 인왕산 남쪽 사직단 오른편 뒤쪽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있는 바위 절벽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봄놀이 장소였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살구꽃[杏花]이 유명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사직동에서 인왕산을 향해 오르며 필운대를 바라본 시각이다. 반면 <장동춘색(壯洞春色)>은

그 반대편 시각이다. <필운대>그림의 바위 뒤편으로 작은 봉우리가 보인다. <장동춘색(壯洞春色)>은

선비들이 이 봉우리에 앉아있는 것을 반대편에서 본 것일 수 있다. 아니면 필운대 주변에 넓은 자락이 있는

육각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곳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운대>그림 아래쪽에 집이 보인다. 어쩌면 예전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 ~ 1618)이 살던 집일지도

모른다. ‘오성(鰲城)과 한음(漢陰)’ 이야기로 유명한 이항복은 행주대첩 때의 도원수 권율(權慄, 1537 ~ 1599)의

사위이기도 했다. 이항복은 젊은 시절 필운대 아래 있던 권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였다고 전하는데, 그런

까닭에 '필운(弼雲)'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 지금도 배화여고 뒤편에 가면 이항복의 글씨를 석각(石刻)했다는

弼雲臺 글씨를 볼 수 있다. 다만 선비들이 둘러 앉아 봄맞이를 했을 자리에는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어 그림

속의 운치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간송미술관 소장본 「장동팔경첩」은 <필운대>를 비롯하여 자하동, 청송당, 대은암, 독락정, 취미대, 청풍계,

수성동을 담았다. 국립박물관소장본에 있던 창의문, 청휘각, 백운동의 자리를 자하동, 필운대, 수성동이

대신했다.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국립박물관소장본보다 5년 늦은 175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정선의 나이 75세쯤 되는 때이니 노년작이다.

 

[정선, 「장동팔경첩」<자하동((紫霞洞)>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자하동은 백악산에서 내려와 인왕산 줄기로 이어지는 창의문의 아랫동네 이름이다. 한자로는 ‘붉은 노을 속에

잠긴 마을’이란 뜻이지만 사실은 순 우리말 ‘잣동’을 한자음 표기한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도읍을 정해 왔었기에 성곽은 자연히 산등성이를 따라 설치되었다. 그리고 산마루를 뜻하는

‘자’나 ‘재’가 성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산마루 위에 있는 성문은 ‘잣문’, 그 아래의 마을은 ‘잣동’,

‘잣골’로 불렸다 한다. 그래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의 북성문(北城門)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고, 한양의

서북문인 창의문 아래에도 자하동이 있었던 것이다.

그림 속 기와집은 정선과 동문수학했던 모주(茅洲) 김시보(金時保)가 말년에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속에서도 집이 꽤 커 보이지만 실제로 대저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충청도 홍성 일대에 많은 논밭과

토지를 지닌 거부(巨富)로, 풍류를 좋아하고 진경시(眞景詩)에도 뛰어났던 인물로 전한다.

 

[정선, 「장동팔경첩」<청송당(聽松堂)>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정선, 「장동팔경첩」<대은암(大隱岩)>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정선, 「장동팔경첩」<독락정(獨樂亭)>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정선, 「장동팔경첩」<취미대(翠微臺)>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정선, 「장동팔경첩」<청풍계(淸風溪)>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장동팔경첩」에 있는 <청풍계(淸風溪)> 그림들은 모두 사방 30cm 내외의 작은 그림들이다. 반면 정선이

앞서 그린 <청풍계(淸風溪)> 그림들은 세로가 긴 큰 화폭에 그렸다. 그때만 해도 정선은 청풍계를 화폭에

담으려면 계곡의 깊이만큼 화폭도 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고려대박물관 소장본은 정선이 55세

때인 1730년,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64세 때인 1739년에 그린 작품들이다.

 

[정선 <청풍계> 1730년, 지본담채, 96.2 x 36.0 cm, 고려대학교박물관]

 

 

[정선 <청풍계> 1739년, 견본담채, 133.0 x 58.8 cm, 간송미술관]

 

 

[정선, 「장동팔경첩」<수성동(水聲洞)> 견본담채 33.5 x 29.3cm, 간송미술관]

 

 

수성동은 지금의 옥인동 일대이다. 중인 계층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시사(詩社)인 송석원시사

(松石園詩社)가 자주 시회(詩會)를 열었던 지역이다 또한 백운동이 청계천의 가장 먼 발원지이지만 수성동

역시 청계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그동안 이 지역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는데 2011년 7월에 복원하여

일부나마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림에 보이는 다리는 ‘기린교(麒麟橋)’라 하는데 돌 하나로 만들어진 다리이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이 돌다리는 한양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대로 보존된 다리라고 한다.

 

[복원된 수성동, 최철호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소장 사진]

 

 

 

 

참조 : 미술백과(간송미술문화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상춘(賞春) : 봄의 경치를 구경하며 즐기는 봄나들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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