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의 연강임술첩

從心所欲 2020. 5. 8. 12:31

도지사와 군수 2명이 모여 한밤에 뱃놀이를 했다. 지금이라면 온갖 구설에 휘말려 당사자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어쩌면 자진사퇴하는 지경까지 이를 수도 있는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80년 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당사자들은 그 일을 숨기기에 급급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림까지 남겨 오늘에까지 전하기에 이르렀다.

 

영조 18년인 1742년, 경기도관찰사 홍경보(洪景輔)는 경기 동부지역을 순시하다 연천에 이르러 우화정(羽化亭)을 찾았다. 우화정은 현재는 북한지역인 임진강변 상류의 낭떠러지에 있었다고 전하는 정자다. 홍경보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연천현감 신유한과 양천현령 정선을 불러 임진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이날은 임술년(壬戌年) 10월의 보름날로, 여기에 이들이 모여 뱃놀이를 한 의미가 있었다.

 

소동파(蘇東坡)는 본명이 소식(蘇軾)이다. 중국 북송(北宋)시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문인이다. 44세 때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를 가, 황주 동쪽 언덕에 초당(草堂)을 지어 동파설당(東坡雪堂)이라하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로 칭했다.

그의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우리 선조들에게도 널리 사랑받았던 시다. 소동파는 임술년인 1082년 7월에 적벽(赤壁)에서 뱃놀이를 하고 <적벽부>를 지었는데 그 앞부분은 이렇다.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임술(壬戌)년 가을 7월 기망(旣望, 16일)에, 나 소식은 손님과 함께 적벽(赤壁)아래

배를 띄워 노닐 새, 맑은 바람은 천천히 불어오고 물결은 일지 않더라.

 

擧舟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술을 들어 손께 권하며 시경 명월편을 읊고, 요조장(窈窕章)을 노래하니,

이윽고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북두성(北斗星)과 견우성(牽牛星)사이를 서성이더라.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흰 이슬은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는데,

한 잎 갈대 같은 배를 가는 대로 맡겨, 넓고 아득한 물결을 헤치는구나.

 

浩浩乎 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넓고도 넓도다!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니 머물 데를 알 수 없고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표표히 인간 세상 버리고 홀로 서니, 날개 돋아 신선(神仙)되어 오르는 것 같구나.

 

 

그리고 소동파는 석달 뒤인 시월에 다시 뱃놀이를 하며 또 <적벽부>를 짓는다. 그래서 7월에 지은 것을 <전(前)적벽부>, 10월에 지은 것을 <후(後)적벽부>라 부른다. <후적벽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於臨皋 二客從予

그 해(임술년) 시월 망(望, 15일)에 설당(雪堂)에서 걸어 나와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려 하니 두 손님 나를 따라오네.

 

過黃泥之阪 霜露既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황니(黃泥)언덕 지나는데 서리와 이슬 이미 내려 나뭇잎은 모두 지고 사람의 그림자 땅에 있어 고개 들어 밝은 달 쳐다보네.

 

顧而樂之 行歌相答

돌아보며 즐거워하고 걸어가며 노래 불러 서로 화답하노라.

 

 

그리고 그로부터 660년 후의 임술년인 1742년 , 조선의 경기도관찰사 홍경보는 소동파가 즐겼던 달밤의 뱃놀이 풍류를 따라 해보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후적벽부>에 나오는 내용대로 임술년 10월 15일 보름날을 골라 두 손님을 초대하여 연천의 우화정(羽化亭)을 찾았다. 정자의 이름 ‘우화(羽化)’ 역시 <전적벽부>의 ‘날개 돋아 신선되어 오른다(羽化而登仙)’는 구절에 나오는 말이니 소식을 따라 하기는 이보다 더 적당한 곳이 없다.

 

이 일이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터이고 미리 서로 약조를 했을 것이다. 홍경보도 이 일정에 맞추어 연천지역 순찰에 나서고 정선은 양천에서 배를 타고 한강 하구로 나아가 조강을 거쳐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 연천에 도착했을 것이다. 관찰사인 홍경보는 당시 51살로 일행 중 가장 어린 나이고, 연천현감 신유한은 62세, 겸재 정선은 67세였다. 신유한은 당시 시를 잘 짓는다는 이름을 얻은 인물이고 정선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으니 함께 할 풍류객으로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 일행은 그날 임진강 중에서도 경치가 좋다는 우화정(羽化亭)에서 출발하여 웅연(熊淵) 나루까지 40리에 걸쳐 뱃놀이를 했다.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은 이 뱃놀이에 대한 기록화이다. 웅연(熊淵)은 지금 군사분계선 내에 있는 임진강 변의 옛 이름이고 연강(漣江)은 임진강의 옛 이름이다.

정선은「연강임술첩」발문에 이렇게 썼다.

“임술년 10월 보름, 연천 현감 신주백과 함께 관찰사 홍상공을 모시고 우화정 아래에서 유람하니, 소동파의 적벽 고사를 따른 것이다. 신주백이 관찰사의 명으로 글을 짓고, 내가 또 그림으로 그려 각자 한 본씩 집에 소장했다. 이것이 연강임술첩이다.”

▶주백(周伯)은 신유한의 자. 홍상공 = 홍경보

 

「연강임술첩」에는 그림이 둘 있다. ‘우화정에서 배를 타다’라는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나루에 정박하다’라는 <웅연계람(熊淵繫纜)>이다, 뱃놀이의 출발지와 도착지를 그린 것이다.

 

[겸재 정선 <우화등선(羽化登船)> 1742년, 견본수묵, 35.5 x 96.6 cm, 개인소장]

 

[겸재 정선 <웅연계람(熊淵繫纜)> 1742년, 견본수묵, 33.1 × 93.8 cm, 개인소장]

 

[또 다른 연강임술첩의 <우화등선>]

 

[다른 연강임술첩의 <웅연계람>]

 

고운 비단에 비교적 강한 먹을 쓰고 옅은 담채와 먹의 농담으로 늦가을의 정취가 살짝 감도는 이 그림들은 좌우로 긴 풍경에 행사장면과 그 주변 등장인물이나 경물들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적절히 살려놓았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 그림에 나타난 경치는 실경이 아니다. 당대에도 ‘의취(意趣)를 살리느라 외형 닮기에 소홀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한다. 통상 현장사생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겸재라, 이 그림들 역시 정선이 자신의 관아에 돌아와 기억으로 화면을 재구성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문에 밝힌 대로 이「연강임술첩」은 세 첩을 제작하여 한 첩씩 나누어 가진 것이라 첩마다 그림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뱃놀이가 꽤나 호사스러운 행사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선비의 문아한 품격을 보여주는 풍류의 한 모습이었을 뿐이다.

일찍이 퇴계 이황도 1561년 60세 때에 조카, 손자 등과 더불어 달밤에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래 낙동강 탁영담(濯纓潭)에 배를 띄워 뱃놀이를 한 기록이 있다. 이때 이황은 세 순배 술을 마신 다음 옷깃을 바르게 하고는 단정히 앉아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으며 한참 동안을 가만히 있다가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읊었다. 그리고는  <적벽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소공(蘇公)이 비록 병통은 없진 않지만 그 마음에 욕심이 없었음은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털끝만 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 이하의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또 귀양 갈 때에 관(棺)을 싣고 갔으니, 세상일에 초연하여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기야 이방운 <적벽부도 (赤壁賦圖) >, 지본수묵, 64.5 x 47 cm]

 

기야(箕埜) 이방운(李肪運, 1761 ~ ?)의 작품으로 알려진 <적벽부도>는 경매가가 5천만원을 상회했던 작품인데 실제로 얼마에 낙찰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소동파가 뱃놀이를 즐긴 적벽은, 양자강이 지금 코로나의 진원지로 자주 입에 오르는 우한[武漢]을 지나 바로 남쪽으로 굽어져 내려오는 지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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