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당사자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단원 김홍도의 스승으로 더 자주 거론되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 ~ 1791). 위 그림은 그의 70세 자화상이다. 강세황은 당대에 이미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絶)로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시, 서, 화는 북송(北宋)이래로 모든 지식인들이 겸비하기를 원하던 예술적 재능인데 그 세 가지에 모두 뛰어났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예술인임을 뜻한다. 그런 만큼 높은 식견과 안목으로 중국과 조선의 수많은 서화가들의 작품에 화평(畵評)을 남겼다. 지금 전해지는 김홍도를 비롯한 정선, 심사정, 강희언의 작품들에서도 그의 제찬(題贊)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자화상의 상단에 쓰여진 자찬(自讚)의 내용은 이렇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오사모를 쓰고 야복을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구나. 가슴에는 만 권의 서적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五嶽)을 흔드니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옹의 나이는 70이요, 호는 노죽(露竹)이라.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쓴다. 때는 현익(玄黓)이다.
彼何人斯, 鬚眉晧白, 頂烏帽, 披野服, 於以見心山林而名朝籍, 胸藏二酉, 筆搖五嶽, 人那得知, 我自爲樂, 翁年七十, 翁號露竹, 其眞自寫, 其贊自作. 歲在玄黓攝提格.】
▶야복(野服) : 평민의 의복. 평상복. ▶가슴에는 만 권의 서적 : 원문 흉장이유(胸藏二酉) 가운데 이유(二酉)는 중국의 대유산(大酉山)에 있는 대유동(大酉洞)과 소유동(小酉洞)으로, 이곳에 많은 책이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장서가 많은 것을 뜻함. ▶현익(玄黓) : 임인년인 1782년 ▶호는 노죽(露竹) : 강세황은 표암(豹菴) 외에도 첨재(忝齋), 산향재(山響齋), 박암(樸菴), 의산자(宜山子), 견암(蠒菴), 표옹(豹翁) 등의 호를 썼고 광지(光之)라는 자도 글과 그림에 자주 썼다. ▶其眞自寫, 其贊自作 : 분명 강세황 자신이 그리고 썼다는 글이 있는데도 이 초상화가 김홍도 작품으로 소개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연원을 살펴보니 중국 어딘가에서 감정학을 전공하고 왔다는 이가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작품들을 골라 위작, 위서라고 주장하는 글들을 남발하더니 수년전에 이 작품을 김홍도가 그린 것이라 주장하고 나섰다. 근거는 “그냥 보더라도, 혈기왕성한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초상화”라는 점과 “강세황이 노년에 오른쪽 팔이 고통스럽게 얽매여, 붓을 잡거나 옷을 입는 것이 줄곧 불편하였는데, <단원기(檀園記)>와 <단원기 우일본>에 ‘매번 그림 그릴 일이 있을 때마다 김홍도는 나의 노쇠함을 딱하게 여겨 나의 수고를 대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설혹 그런 논리를 100% 인정하더라도 최대한 주장할 수 있는 한도는 ‘강세황과 김홍도의 합작품’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정도였으면 강세황이 그림에 밝혔을 것이다. 강세황이 제자가 그린 그림을 자신이 그렸다 할 인물인가? 강세황도 모르고 그 옛날 초상화가 갖는 의미도 모르는 소리로 들린다. |
70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글에 기개와 자신감, 여유가 넘쳐나는 느낌이다. 강세황의 집안은 할아버지 강백년(姜栢年)이 예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아버지 강현((姜鋧)은 대제학을 지낸 명문가에다 대대로 문명(文名)까지 높았다. 그런 집안에서 강세황은 강현이 나이 60을 넘어 얻은 막내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큰 형 강세윤(姜世胤)이 소론과 노론의 정쟁 속에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관직이 삭탈되고 귀양까지 가게 되면서 가세는 기울어지고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던 할아버지의 가풍이 이어진 탓인지 집안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다. 15살에 결혼한 강세황은 33세 때인 1744년, 가난을 견디지 못해 한양을 떠나 세 아들을 데리고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내려간다.
강세황의 삶에 대한 전체적 맥락은 그가 54세가 되던 1766년에 지은 <표옹자지(豹翁自誌)>에 잘 나타나 있다. 자서전 격인 이 글의 시작에서 강세황은 자신을 표옹(豹翁)으로 부른 이유부터 밝혔다. “옹(翁)이 스스로 붙인 호는 표옹(豹翁)이다. 어려서부터 등에 있는 흰 얼룩무늬가 표범과 비슷하여 호로 삼았으니 대개 스스로 장난삼아 해본 것이다.” 널리 알려진 그의 호 표암(豹菴)은 이 표옹의 변형인 것이다.
【옹은 숙묘(肅廟) 계사년 윤5월 21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서너 살에 행서를 쓸 수 있어서 글씨를 구해다가 병풍을 만든다는 사람도 있었다. 열다섯에 진주(晋州) 유씨(柳氏)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녀는 현숙하여 부덕(婦德)이 있었다.
큰형님 부사공이 참소를 입게 되어 귀향하게 되니 옹은 세상길이 험한 것을 알고 영예는 바랄 만하지 않다고 여겨 과거시험에 나아가려는 생각을 버렸다. 오직 옛글에 전념하여 당송(唐宋)의 작품을 암송한 것이 매우 많았다.
마음을 가라앉혀 생각한 지 수십 년에 식견과 이해가 점차 통달되어 깊은 조예와 홀로 얻은 견해가 있었다. 혹 작자의 이름을 가려도 시대가 언제인지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를 읊조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 간혹 지은 것이 있어도 번번이 버리고 거두지 않았다.
▶숙묘(肅廟) 계사년 : 숙종 때인 1713년 ▶진주(晋州) 유씨(柳氏) : 유뢰(柳耒, 미상 ~ 1729),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남인계 가문으로 1728년 이인좌(李麟佐)가 일으킨 무신란에 연루되어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유배지에서 죽었다. ▶큰형님 부사공 : 강세윤(姜世胤, 1684 ~ 1741). 영조 4년인 1728년에 이천부사에 임명되었는데 그 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반란세력 서호(瑞虎)를 포박하여 공을 세웠으나 체포된 난도(亂徒)들을 국문하는 중에 그들과 내통하였다는 자백이 나와 오히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10년간 유배되었다가 1738년에 풀려났고 죽은 다음인 1750년에 직첩을 돌려받았다. 당시 적괴 정세윤(鄭世胤)이 그와 이름이 같았던 까닭으로 억울하게 벌을 받았던 사실이 뒤에 밝혀져 1763년, 영조에 의하여 신원되었다. |
아버지 문안공께서 64세에 옹을 낳아 매우 사랑하셔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었고, 가르침을 지극하게 하셨다.
계축년(癸丑年) 작은 형수가 죽었을 때에 문안공께서는 이 때 팔순을 넘으셨는데도 장차 진천에 장사지내는 것을 친히 보려 하셨다. 옹이 울며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으셨고 모시려 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몰래 시종과 말을 빌려서 알리지 않고 뒤를 따라갔다. 도중에야 문안공께서 비로소 아셨으나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셔서 나무라지 않았다.
진천에 이르러 끝내 아버지를 잃는 아픔을 겪게 되었으니 아아! 슬프다. 경신년 (庚申年)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계축년 : 1733년, 강세황 나이 21세 때 ▶경신년 : 1740년 |
복(服)이 끝나자 안산군에 터를 잡아 낡은 집을 지으니 쓸쓸하였다. 생계에 관한 일은 전혀 묻지를 않고 오직 문사와 붓과 벼루를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또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하여 때로 혹 붓을 놀리면 질펀하고 우아하여 속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산수도는 대체로 왕몽과 황공망의 법이 있었고, 묵란(墨蘭)이나 묵죽(墨竹) 그림은 더욱 맑고도 굳세어 세속의 기운을 끊은 듯하였으나 세상에 깊이 아는 자가 없고 스스로도 잘하는 일이라 여기지 않아 다만 흥을 품고 마음에 맞는 것을 펼쳐낼 뿐이었다. 혹 남이 농담 삼아 구하면 속으로는 몹시 싫고 괴롭지만 또한 일찍이 매정하게 물리치지는 않고 건성으로 응하여 남의 뜻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서법에서는 이왕(二王), 즉 왕희지와 왕헌지를 본받고 미불과 조맹부의 서법을 섞어 자못 깊은 묘미를 이루었다. 전서와 예서에도 예스러운 뜻을 터득하였다. 매번 흥이 일면 옛날 법서 여러 줄을 임서함으로써 조용하고 한가하면서도 맑고 원대한 뜻을 거기에 담았다.
성품이 조용하고 담박한 탓에 세속을 초월하여 삼베옷과 거친 밥에도 편안히 여기며 싫어하지 않으면서 일찍이 가난함과 군색함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음이 어질고 관대하여 대체로 남의 관심을 근심하고 남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서로 깊이 아는 자들은 또한 이 때문에 옹을 허락하였다.
참의(參議) 임정(任珽)은 옹의 매형이었는데 옹의 글씨가 왕희지나 왕헌지의 묘한 경지에 나아갔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우연히 잔치에서 함께 두보의 ‘검무가(劍舞歌)’를 화운했는데 책상을 치며 옹의 글을 읊어보고는 말하기를 ‘우리나라 백년 이래로 이런 시는 없었다’고 하기도 했다.
승지 최성대가 일찍이 어느 집에서 옹이 옛 그림에 쓴 작은 해서 글씨를 보고 놀라 말하기를 ‘중국 사람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하더니 옹이 썼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또 칭찬하기를 ‘중국 사람도 미칠 수 없는 경지다’라 하였다.
또 옹의 ‘연강첩장도가(煙江疊嶂圖歌)’를 보고는 탄식하기를 ‘시는 또 글씨보다 훨씬 더 낫다’라 하였다. 두 공은 모두 문단의 원로인데 옹을 넘치도록 추켜세움이 이와 같았다.
▶참의(參議) 임정(任珽) : 강세황의 셋째 누이와 혼인하였으며 대사간, 승지, 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연강첩장도가(煙江疊嶂圖歌) : 소동파의 ‘연강첩장도시(煙江疊嶂圖詩)’를 차운하여 지은 시. |
옹은 체구가 작고 모습도 보잘 것 없어 갑자기 만나는 자는 옹의 마음속에 또한 스스로 독특한 식견과 오묘한 견해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가볍게 여겨서 모욕하는 자가 있어도 옹은 으레 그러려니 하며 웃어 넘겼다.
계미년(癸未年) 작은 아들 흔(俒)이 급제하였다. 임금께서 옛 신하의 도타운 충정을 생각하시고 선왕의 융성한 대우를 돌아보셔서 은혜로운 말씀이 정중하셨다. 경연의 신하들이 옹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한다며 아뢰니 임금께서는 특별히 교서를 내리시기를 ‘말세에는 시기하는 마음이 많아 천한 기술 때문에 얕보는 자가 있을까 싶으니 다시는 그림을 잘 그린다 하지 말라’ 하셨다.
대개 임금께서 미천한 신하를 사랑하고 아껴주시며 곡직하게 보살펴 주시기를 이렇게 보통이 넘게 하시었다. 옹이 이런 말씀을 받고는 땅에 엎드려 놀라 울기를 사흘 동안 하니 눈이 퉁퉁 부었다.
오직 이나 서캐 같은 이 천한 것이 어찌 일찍이 한 번이라도 임금님 곁에 가기를 바랐을 것이리오. 다만 선신(先臣)의 옛 은혜로 천고에 드문 은혜를 내린 것이니 정건(鄭虔)에게 임금께서 글을 써 준 것과 비교할지라도 훨씬 더 분에 넘치는 일이다.
▶계미년 : 영조 39년, 1763년 ▶정건(鄭虔) : 당나라 사람으로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과 사귀었다. 직접 지은 시에 그림을 곁들인 「창주도(滄州圖)」를 당 현종에게 바치자 현종이 감탄해서 직접 ‘정건삼절(鄭虔三絶)’이라고 써주었다. |
이로부터 마침내 그림과 붓을 태워버리고 다시 하지 않기로 맹세하였고 사람들도 강권하여 구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의 의론이 또한 혹 벼슬을 시키려 하였지만 스스로 서둘러 나아갈 뜻이 없었다.
옹은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한 가문이나 운명과 시기가 어그러져 낙척하였고 늘그막에는 시골에 물러나 살면서 시골 노인들과 자리나 다투었다. 만년에는 한양에 발길을 끊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 때때로 대지팡이와 짚신으로 들판을 거닐었다.
겉으로는 성품이 졸렬한 듯하였으나 속은 자못 영특하고 지혜로워 뛰어난 식견과 공교로운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심오한 음률과 기교한 기완(器玩)이라도 한번 귀와 눈에 접하면 환히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손으로는 바둑의 흑백돌을 잡지 않았고 절대로 여러 잡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점쟁이와 더불어 운명을 말하거나 관상법에 대해 이야기한 일도 없었다. 풍수쟁이의 말은 더욱 믿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아내가 죽었으나 이때도 풍수가를 불러 땅을 살피지 않고 스스로 과천 사동의 한적한 땅에 자리를 잡아 무덤을 썼다.
▶기완(器玩) : 완상(玩賞)하려고 수집하여 비치(備置)하는 기구(器具)나 골동품 따위 ▶병자년 : 1756년 |
인(亻寅), 흔(俒), 관(亻寬), 빈(儐) 네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대략 문자만 이해시켰을 뿐 다른 가르침을 준 적은 없고 오직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듯 효도하고 우애하여 선대의 가르침을 욕보이지 말라고만 권면하였다.
옹이 일찍이 자화상을 그렸는데 다만 그 정신에 치중하여 그린 것이라 세속의 재주 있는 무리가 그린 초상화와는 아주 다르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죽어, 남에게 묘지와 행장을 구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평소의 대략을 적어놓으면 거의 사실과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마침내 붓 가는 대로 이와 같이 써서 자식들에게 남긴다. 훗날 이 글을 보는 사람 중에 반드시 그 세상을 논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불우하였음을 슬퍼하고 옹을 위해 한숨 쉬며 탄식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어찌 옹을 알기에 충분하랴? 옹은 이미 스스로 기꺼이 여겨 가슴속을 넓고도 평탄하게 하여 터럭만큼도 슬퍼하며 자득(自得)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지금 임금 42년 병술년 가을 표옹이 스스로 쓰노라. 이때 나이 쉰 넷이다.】
(『표암유고』 <표옹자지>)
▶지금 임금 42년 : 영조 42년, 1766년 |
위 자화상을 그리기 한 해 전인 1781년에 한종유(韓宗裕, 1737 ~ ?)가 부채에 그린 강세황의 69세 때 초상이다.
그 해에 정조는 강세황에게 자신의 어진(御眞)을 그릴 것을 분부하였다. 그러나 강세황은 늙고 눈이 어두워 어진을 그리기 어렵다고 정중히 사양하면서, 다만 어진을 제작할 때 옆에서 부족한 부분을 돕겠다고 하였다. 당시 어진을 그린 화원은 한종유, 신한평, 김홍도 세 사람이었다. 이때 강세황이 한종유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라 한다.
【신축년 9월 11일 내가 어용도사 감동관으로 규장각에 가서 화사 한종유에게 부탁하여 부채 위에 나의 작은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제법 비슷하였는데, 이를 서손(庶孫) 이대(彝大)에게 준다"
(辛丑九月十一日 余以御容圖寫監董官 赴奎章閣 使畫師韓宗裕 圖余小眞於便面上 頗得髣髴 與庶孫彝大)】
이 초상화는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강세황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2달 후, 정조의 어명으로 제작이 시작되어 10일 동안에 그려졌다. 초상화를 제작한 화원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는 1756년생으로 당시 나이 28세였다.
오른편 위 여백에 “豹菴 姜公七十一歲眞”이라 제목이 있고, 그 왼쪽에 어제제문(御製祭文)이 씌어 있다. 어제제문은 강세황이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793년 1월 29일에 정조가 직접 내린 사제문(賜祭文)으로, 강세황의 기일(忌日)인 1월 23일 무렵에 맞추어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명기가 그림을 완성하고 10년이 지난 뒤에 조윤형이 옮겨 적은 것이 된다.
【툭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소탈한 자취는 자연을 벗하네.
붓을 휘둘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경대부의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나라 정건(鄭虔)의 삼절을 본받았네.
중국에 사신으로 가니 서루에서 앞 다투어 찾아오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 삼가 쓰다.
(疎襟雅韻 粗跡雲烟 揮毫萬紙 內屛宮牋 卿官不冷 三絶則虔 北槎華國 西樓踵先 才難之思 薄酹是宣. 曹允亨 謹書)】
참고 및 인용 : ‘자화상과 자전적 기록 동시에 남긴 조선의 유일한 문사(文士)’(2018, 역사평론가 한정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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