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이춘제와 삼승정

從心所欲 2019. 8. 4. 20:07

 

[정선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中〈옥동척강(玉洞陟崗)〉1739, 견본담채, 34.5 x 34.0 cm, 개인소장]

 

옥동척강(玉洞陟崗); 옥동은 옥류동을 가리키고 척강은 산등성이를 오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옛 그림으로는

드물게 선비들의 등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서원아회첩》에 들어있는 4점의 그림 중 하나다.

《서원아회첩(西園雅會帖)》은 경화세족 이춘제(李春躋, 1692 ~ 1761)가 자신의 집 후원인 서원(西園)에서

 아회(雅會)1와 새로 지은 정자에 관련한 시와 기문을 하나의 화첩으로 장황한 것이다. 이춘제는 여기에

이 그림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때 소나기가 내려 물이 넘쳐흘러, 개인 후에 서원(西園)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립문을 나와 옥류(玉流) 물가와 바위에서 배회하는데 귀록(歸鹿)이 홀연히 지팡이를 날리며 짚신을

신고 비탈을 타며 산마루를 올랐다. 걸음이 빠른 것이 젊은 사람 못지않아 모두가 뒤따라 오르는데 땀이 나고

숨이 찼다. 잠깐 사이에 산등성이를 넘고 골짜기를 지나니 홀연 눈 아래 청풍계의 심암(心庵)과 태고정이

있었다. 이는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마침내 절험(絶險)을 넘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뜻한 바가 아니다."라

한 것과 같다.”

 

그러니까 시를 짓는 모임을 갖기로 하여 옥류동에 있는 이춘제의 집에 이춘제을 포함한 7인이 모였다. 그런데

비가 쏟아져 집안에 있다가 비가 그쳐 후원인 서원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비가 그친 다음의 상쾌한 풍경에 흥이

일어나 옥류동에서 청풍계까지 즉흥적으로 산등성이를 오르게 되었다. 그림은 이춘제의 후원을 빠져 나와

옥류동을 오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적었다.

 

"정자에서 소요하는 것으로 마침내 저녁이 되어도 돌아갈 줄 모르다가 파하기에 임해서 귀록이 입으로 시 한 수를
읊고 제공에게 잇대어 화답하라 하며, 겸재 화필을 청하여 장소와 모임을 그려 달라 하였으니 그대로
시화첩을
만들어 자손이 수장하게 하려 함이다."

 

이 때가 영조 15년인, 1739년 여름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740년 6월에 이춘제는 또 다시 정선에게 자기 집

후원에 있는 정자를 그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 때 이춘제는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벗으로 지내던 귀록(歸鹿)

조현명에게 편지로 정자에 대한 이름과 기문(記文)을 청하였다. 이에 관하여 조현명의 문집 「귀록집」의

〈서원소정기(西園小亭記)〉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정자가 이루어진 것이 이춘제의 나이 49세가 되는 해다. 그런 까닭으로 이춘제는 정자의 이름을 
사구정(四九亭)이라고 이름을 지을까, 또 세심대(洗心臺)와 옥류동 사이에 있으니 세옥정(洗玉亭) 이라고 
지을까 생각하면서 나에게 정자 이름을 청하였다. 이에 나는 정자에 올라 시를 지을 때 ‘사천 이병연의 시와 
겸재 정선의 그림을 좌우에서 맞아들여 주인노릇을 한다‘라는 것에서 이름을 취해 ’삼승정(三勝亭)‘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삼승정이란 ‘정자의 빼어난 것이 이씨(二氏)를 만나서 삼승(三勝)을 갖추게 되었다’는
뜻을 담았고 이에 입각하여 기(記)를 지었다." 2

 

[정선 《서원아회첩》中 <(삼승정(三勝亭)> 1740년, 견본담채, 40.0 x 66.7cm, 개인소장]

 

이 그림의 제목은 따로 화제를 쓰지 않아 <삼승정(三勝亭)>이라 부르기도 하고 <서원소정(西園小亭)>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현명은 위의 같은 글에서 이춘제의 후원과 정자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적었다.

 

"이춘제의 서원정자가 북산 아름다운 곳을 차지하니 계속은 그윽하고 깊으며 앞은 툭 터져있고 좌우에는 늙은

소나무가 빽빽하다. 곧 그 가운데에 층급을 지어 계단을 삼고 꽃과 대나무를 벌려 심었으며 구덩이를 파서

연못을 만들고 마름과 가시연을 덮어 놓았다. 위치가 매우 정돈되어 신묘하게 운치를 얻으니 북산 일대를

따라서 대개 명원승림이 많으나 홀로 중희(仲熙, 이춘제)의 정자가 그 빼어남을 독차지하게 되었다."3

 

첩(帖)에는 이 정자가 들어간 또 다른 그림이 있는데 역시 <삼승조망도(三勝眺望圖)> 또는 <서원조망도(西園眺望圖)>라는 두 이름으로 부르고 <한양전경(漢陽全景)>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정선 《서원아회첩》中 <삼승조망도(三勝眺望圖)> 1740년, 견본담채, 39.7 x 66.7cm, 모암문고 (국립중앙박물관 관리)]

 

이 그림은 앞의 <삼승정>을 그릴 때의 시선과는 정반대되는 시각이다. <삼승정>이 이춘재의 집에서 인왕산

쪽을 바라본 것에 비하여, <삼승조망도>는 인왕산에서 정자를 내려다 본 것이다. 그래서 정자 너머와 좌우로

한양의 전경이 보인다. <삼승정>에도 오른쪽에 세심대, 왼쪽에 옥류동이라고 지명을 적어 넣었지만 이 그림에는

좀 더 많은 지명이 등장한다. 맨 왼쪽에 회맹단이 있고 가운데 그림이 접혀진 자국 옆에 ‘景福’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이후 그때까지도 복원이 안 된 상태라 건물 지붕조차 그려 넣지 않았다.

오른쪽 산자락 밑에는 仁慶 두 글자가 있다. 인경궁은 광해군 때 사직단(社稷壇) 옆에 터를 잡고 새로 건립했던

궁궐이름이다. 완공을 거의 앞둔 무렵에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을 찾아내어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인경궁 건립을 끼어 넣고 인경궁을 폐허화시켰다. 인조는 1648년, 인경궁(仁慶宮)의

재목과 기와를 철거하여 중국을 오가는 공무 여행자들을 위한 국영(國營) 여관격인 홍제원(弘濟院)을 짓게

하였다. 효종 때에 폐허가 된 궁궐터에 효종의 딸들아 줄지어 사치스러운 저택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영조

때에 이르면 영조가 그 터를 알아보라고 했더니 “인왕산(仁王山) 아래 사직단(社稷壇)의 왼쪽에 있었던 듯한데,

상세히 알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을 정도로 그 흔적이 지워져 버렸다. 다만 인경궁(仁慶宮)의 편전이었던 광정전

(光政殿)만은 창덕궁에 옮겨져 선정전(宣政殿)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위에는 왼쪽부터 ‘南漢’,  ‘終南(남산)’ , ‘冠岳’이라고 써놓았다.

 

이 그림들 외에 정선이 그린 그림 중에 이춘제와 관련된 그림이 하나 더 있다.

 

[정선 <서교전의(西郊餞儀)> 1731년, 지본수묵 26.7 x 47.0cm, 국립중앙박물관]

 

왼편에 화제를 적었는데 4글자 중 마지막 글자가 거의 지워진 상태다. 앞 글자로 미루어 ‘儀’ 또는 ‘筵’자로

추측하고 있다. ‘서교에서 길 떠나는 이를 전별한다’는 의미의 西郊餞儀(筵)라는 화제에 이어 辛亥季冬作을

적었다. 신해년(1731년, 영조 7년) 겨울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림에 정선은 자신의 호를 쓰지 않고 낙관만

찍었다.

서교(西郊)는 ‘도성 밖의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그림 상의 위치는 지금으로 치면 영천, 독립문지역이다.

그림에는 희미하지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자락의 건물과 높다란 문루를 지나 산 방향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 건물은 모화관(慕華館)이고 문루는 영은문(迎恩門)이다.

 

[<서교전의(西郊餞儀)> 부분]

 

한양천도를 단행한 태종이 돈의문 밖에 중국 사신을 위한 숙소를 짓고 모화루(慕華樓)라 이름했다. 원나라

사신들이 묵던 송도 영빈관을 모방한 것인데, 세종 12년에 이곳에 묵은 중국 사신의 '우리가 상인도 아닌데

루(樓)가 뭐냐?'는 핀잔에 그 후 모화관(慕華館)으로 문패를 갈아 달았다. 또한 영은문은 원래 1537년, 김안로

(金安老) 등 3정승의 제안에 따라 모화관 앞에 있던 홍살문을 없애고 문을 만들어 청기와를 얹고 영조문(迎詔門)

이라고 편액을 걸었었다. 그러다 1539년 명나라 사신의 의견을 따라 영은문(迎恩門)으로 이름을 고쳤다.

 

[영은문, 1890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청일전쟁 후인 1896년 모화관은 독립관(獨立館)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서재필(徐載弼)의 독립협회가 독립문

건립을 발의한 뒤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얻어 영은문을 헐고 1897년 11월 20일에 독립문을 세웠다.

지금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자리를 옮긴 독립문 남쪽에 있는 두 개의 돌기둥이 영은문의 기둥이다.

 

[독립문과 영은문 기둥]

조선의 사신단이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떠나면 공식적 전별연은 지금의 독립문 근처 소나무 숲속에 있던

반송정(盤松亭)이라는 정자 또는 경기감영(京畿監營)이나 모화관(慕華館) 등에서 행해졌다. 그러니까 그림은

이 전별연을 마친 사신 일행이 중국을 향해 떠나는 장면이다. 이 일행은 청나라로 가는 진위사행(陳慰使行)단4

으로 사신단 부사(副使)가 이춘제(李春躋)였다고 한다.

 

[<서교전의> 부분]

 

일행의 앞에 보이는 산은 왼쪽아 모악(母岳) 또는 안산(鞍山)으로 불리던 산이고 오른쪽이 인왕산이다. 두 산

사이로 길이 두 개가 나있다. 예전에는 지금의 무악재를 넘는 길이 둘이었다고 한다. 왼쪽은 사현(砂峴)이란

고개를 넘는 길로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오른쪽 낮은 고개는

소현(小峴)으로 불렸는데, 이 소현을 일제강점기 때부터 깎아내리기 시작하여 지금의 무악재가 된 것이다.

여기에 소위 신작로가 나고부터 사현을 넘어가는 길은 자연히 사람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길이 없어져버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금도 무악재에 가면 옛 사현을 넘던 길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기는 하다.

 

[조선말 무악재 고개, 1907년 헤르만 잔더 촬영, 국립민속박물관]

 

 

참조 : 겸재의 한양진경(2004, 최완수), 한국미술 산책(송희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 글을 지으려고 모이는 모임 [본문으로]
  2. 겸재의 한양진경, 2004, 최완수 [본문으로]
  3. 한국미술 산책, 송희경 [본문으로]
  4. 조선시대 중국으로 파견되던 비정규 사절단으로, 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임시로 파견하던 조문(弔問)사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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