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소옹 고사도(古事圖)

從心所欲 2019. 7. 23. 17:26

<어초문답(漁樵問答)>이 소옹의 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주제로 한 고사도(古事圖)라면,

<화외소거(花外小車)>는 소옹 본인에 대한 고사인물도이다. 이 화제(畵題)에 얽힌 고사(古事)는 이렇다.

 

소옹은 나이 54세 때에 부친이 죽자 그동안 살던 곳에서 낙양의 천진교(天津橋)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였다.

그 때에 사마광(司馬光)을 비롯한 그의 벗들이 돈을 모아 그에게 집과 농토를 마련하여 주었다 한다. 사마광

(司馬光:1019~1086)은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서로 꼽히는『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찬한 북송

(北宋)때의 정치가이자 학자다. 당시에도 명사였다. 그런 사마광이 어느 날 소옹과 자신의 별서(別墅)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래서 사마광은 술상을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소옹이 나타나질 않았다. 기다리다 끝내

소옹이 오지 않자 사마광은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빙그레 웃으며 시 한 수를 읊었다고 한다.

 

淡日濃雲合復開 碧嵩淸洛遠縈回
林間高閣望已久 花外小車猶未來
옅은 해 짙은 구름에 가렸다 다시 열리고
높고 푸른 산 맑은 낙수 저 멀리 둘러 있네
숲 속 높은 누각에서 바라보기 오래건만
꽃 밖의 작은 수레는 아직도 오질 않네.

 

그는 소옹이 낙양에서 꽃구경하느라 한눈을 팔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소옹은 은거하는 곳에서

봄가을에 낙양 성안으로 놀러나갈 때면 동자가 이끄는 작은 수레를 즐겨 탔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수레 소리만으로도 그가 성에 온 것을 알았다고 했다. 소옹은 ‘小車行(작은 수레로 다니다)’, ’小車吟(작은

수레를 읊다)‘ 같은 시를 지어 작은 수레를 타고 낙양을 돌아다니는 자신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마광

시 속의 ‘꽃 밖의 작은 수레’라는 화외소거(花外小車)는 소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고사로 말미암아

이후 중국과 조선에서는 화외소거(花外小車)라는 화제로 많은 고사인물도(古事人物圖)가 그려졌다.

 

[정선, 「겸재화첩」中<화외소거(花外小車)> 견본담채, 30.3×20.3cm, 우학문화재단]

 

[김홍도, <화외소거>, 지본담채, 111.9 × 52.6cm, 간송미술관]

 

[유숙, <화외소거도>,132.4 × 53.3cm,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이한철 <화외소거도> 205 × 67.2cm,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옹은 고금(古今)과 천지만물의 변화가 결국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뒤로는 입신양명에 대한

꿈을 접고 관직에 나갈 마음을 버렸다고 한다. 소옹은 덕과 기품이 순정하여 어질고 현명하였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대했다고 전해진다. 소옹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안락와(安樂窩)라 하고, 스스로를

안락선생이라 하였다. 소옹이 죽기 2년 전에 지었다는 <안락을 읊다>라는 시를 보면 그의 성격과 삶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안락음(安樂吟)>

安樂先生 不顯姓氏 안락선생은 성씨를 드러내지 않고

埀三十年 居洛之涘 30년 간 낙수(落水)가에 살았다네.

風月情懷 江湖性氣 바람, 달에 마음을 두고, 은거하는 것이 기질에 맞아

色斯其舉 翔而後至 안색을 살피며 날아오르다, 빙빙 돌아 내려앉았지.

無賤無貧 無富無貴 천함도 가난함도 없고, 부유함도 귀함도 없고,

無將無迎 無拘無忌 보냄도 맞이함도 없고, 얽매임도 거리낌도 없다네.

窘未嘗憂 飲不至醉 군색했지만 걱정한 적 없고,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며.

收天下春 歸之肝肺 세상의 봄을 거두어, 가슴에 간직했었지.

盆池資吟 瓮牖薦睡 연못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고, 누추한 집이 잠자리였으니.

小車賞心 大筆快志 작은 수레에 완상하는 마음 담아, 큰 붓으로 마음껏 써 내렸네.

或戴接籬 或著半臂 두건을 쓰기도 하고, 반팔 옷을 입기도 하고,

或坐林間 或行水際 숲 사이에 앉기도 하고, 물가를 거닐기도 했다네.

樂見善人 樂聞善事 선한 사람 보기를 좋아하고, 선한 일 듣기를 좋아하고,

樂道善言 樂行善意 선한 말 하기를 좋아하고, 선한 뜻 행하기를 좋아했네.

聞人之惡 若負芒刺 남의 악행을 들으면, 가시처럼 여겼고,

聞人之善 如佩蘭蕙 남의 선행을 들으면, 귀한 난초, 혜초처럼 여겼네.

不佞禪伯 不諛方士 선사에게 아첨하지 않고, 방사1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네2.

不出户庭 直際天地 집과 뜰을 나서지 않아도, 하늘과 땅을 바로 만날 수 있어

三軍莫凌 萬鍾莫致 삼군3의 위세가 업신여기지 못하고, 후한 봉록도 흔들지 못했네.

為快活人 六十五嵗 이렇듯 쾌활한 사람으로 65년을 살아왔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고백하듯 담담하게 읊었다. 옛 선비들이 이 시는 한번쯤 다 읽었을 터이니

어찌 소옹에 대한 흠모하는 마음이 없었을까! 소옹과 관련된 고사인물도가 많은 까닭이다.

『송사(宋史)』에 의하면 소옹은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아는[前知]’ 능력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주역을

공부하여 크게 깨우친 뒤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사상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선천학(先天學)의 창시자로도 불렸다.

이런 그의 능력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그의 사후에 중국에서 발생할 중대한 역사적 변화들을 예언했다는 시(詩)이다. 북송과 남송의 운명부터

시작하여 원, 명, 청, 중화민국, 일본의 중국 침략과 공산화, 국민당정부 수립은 물론 앞으로의 미래까지 담고

있다는 해석인데 물론 해석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이 시가 소옹의 시인지, 아니면 후대의 위작인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7언율시 10절로 구성된 이 시는 《매화시(梅花詩)》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마지막 10절의 첫 구가 ‘수점매화천지춘(數點梅花天地春)’이라 한데서 ‘매화시’라 불리게 되었다.

 

또 다른 일화는 소옹이 틈만 나면 태극을 상징하는 구슬을 가지고 놀면서 점을 쳤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옹이 천진교(天津橋) 위에서 두견새의 소리를 듣고는 "2년이 지나지 않아서 남방의 선비가 들어와 재상이

되고, 천하에 이로부터 일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천하가 다스려지면

지기(地氣)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고 혼란스러워지려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간다. 이제 남방의 지기가 이르러

새가 그 지기를 먼저 알고 운 것이다." 하였다. 소옹의 이 예언은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출현을

예견하였다는 것이다. 왕안석은 신법당(新法黨)이고 소옹의 친구인 사마광은 구법당(舊法黨)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후세에 이에 대한 특별한 반박은 없다.

‘천진두견(天津杜鵑)’이라고 불리는 이 일화는 소옹의 신통력을 알려주는 이야기로 유명하여,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졌던 모양이다. 정선이 ’천진교에서 두견새 소리를 듣다‘라는 고사인물도를 남겼다.

 

[정선,<천진문견(天津聞鵑)>, 지본담채, 31.3 × 41cm, 개인 소장]

 

 

 

참조 및 인용 :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송희경, 태학사), 중국인물사전(한국인문고전연구소)

 

  1. 망사(方士) :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본문으로]
  2. 이 구절은 불교나 도교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의미 [본문으로]
  3. 삼군(三軍) : 고대 중국 주(周)나라 때의 군사제도에 의하면 전쟁 때에 천자는 6군(軍), 봉건 대영주(大領主)는 3군, 중영주는 2군, 소영주는 1군을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왕(王)을 가리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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