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명승첩」상첩(上帖)에 있는 19점의 그림에서 ‘양천10경’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점의 그림 중 8점이
양천 밖의 한강변 그림으로, 지금 서울의 압구정동과 석촌호수 지역에서 멀리는 팔당호까지의 풍경들을 담고
있다. 이 그림들에는 이병연의 제시가 없다. 정선이 틈을 내어 유람삼아 양천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오며 수려한 풍광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들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보인다.
광주 남종면이나 퇴촌 쪽에서 양수리를 바라본 풍경이다. 양수리(兩水里)는 두물머리의 한자식 표기이다.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부터 흘러내려온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오른쪽 산이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으로 보인다. 그림 한가운데 길게
들어선 섬을 족자섬이라고들 하는데 솔직히 이것이 족자섬인지 두물머리인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양수리는 그 뛰어난 풍광으로 사랑받고 있지만 예전에도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경과 달리, 이 일대는 ‘여울’이 험하기로 유명했다. 여울은 물살이 빠른 퇴적지형을 가리키는
것으로, 족자섬 근처에 쪽잣여울이 있었다고 한다. 쪽잣여울을 한자로 차기할 때는 족백단(簇栢湍)이라고
했고 정선은 이것을 ‘독백탄(獨柏灘)’이라고 했다. 두 이름을 같이 썼던 듯하다.
정선의 스승 김창흡은 1688년에 뱃길을 이용해 양수리를 거쳐 단양을 여행하면서 ‘단구일기(丹丘日記)’를
남겼다. 여기에 “족백단에 이르니 여울이 심히 사나워 배 저어 나가기에 불리하다. 옆의 배가 와서 부딪쳐
서로 외치며 밀어낸다.”라고 ‘족백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녹운탄(綠雲灘)’은 현재는 전하지 않는 지명으로,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의 큰청탄(대청탄)으로 추정할 뿐이다.
큰청탄은 경의중앙선 신원역과 국수역 사이 양서초등학교 강 건너편에 있는데 족백단보다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다.
경기도 광주의 분윈리 일대에 있는 '소내' 부근 풍경이다. 산 가운데 있는 건물은 사옹원의 분원(分院)으로,
관영 사기제조장(官營沙器製造場)이다. 이곳의 지명이 지금 '분원리'가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섬이 소내섬이며 소내섬 너머에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다산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이
있다. 그 우측이 족자도이고, 원경 중에 제일 오른쪽에 조금 보이는 곳이 두물머리이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에 필요한 관어용(官御用) 도자기는 전국의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에서 토산
공물로서 세공(歲貢) 또는 별공(別貢)의 방법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다 15세기 후반 경부터 궁중에서의 사기
수요량이 증가됨에 따라 상품(上品)의 자기 생산지인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을 설치하고 나라가 직접
도자기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지금도 도자기를 전통 방식으로 만드는 곳에서는 가마에 나무를 때지만 옛날에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분원은 약 10년을 주기로 땔감을 대기 위하여 수목이 무성한 곳을 찾아 이동하여야만 했다. 분원의 이동은
광주의 퇴촌면, 실촌면, 초월면, 도척면, 경안면, 오포면 등 6개면 내에서 이루어졌다. 분원이 설치되어 수목을
한번 채취한 곳은 무성하여질 때까지 비워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그곳에 분원을 설치하여 수목을 채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한번 분원이 설치되어 수목을 채취한 곳은 곧 화전으로 개간되는 바람에 땔감의 공급이
끊겨 사기 제조를 계속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 경종 2년인 1721년에 장작을 나르는 배가 다니는
길목인 우천(牛川)변에 고정된 자리를 잡게 된 분원이 바로 그림 속의 기와 건물이다.
「경교명승첩」에는 ‘미호(渼湖)’라는 화제가 붙은 그림이 두 점이 있다. 그래서 구분하기 위하여 이 그림을
‘미호(渼湖)1’로 부르기도 하고, 화제와 관계없이 ‘석실서원(石室書院)’이라고도 부른다. 이 그림의 대상이
되는 지역은 현재의 남양주 수석동 한강변으로, 강동대교 북단의 토평IC에서 한강 상류 방향의 미호박물관이
위치한 지역이다.
미호(渼湖)의 ‘渼‘자는 수면에 잔물결이 이는 현상을 뜻하는 물놀이 미(渼)자로, 미호는 잔잔한 물결이 이는
호수를 뜻한다. 석실서원은 병자호란 때의 대표적 척화파였던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을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현종 때 석실사(石室祠)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안동 김씨
문중의 서원이라 할 만큼 문중 문인들이 배향되었는데 정선의 스승이었던 김창흡을 비롯하여 형제인 김창집,
김창협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석실‘은
김상헌의 호 석실산인(石室山人)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림에서 왼쪽 언덕 위 나무 사이에 있는 기와집이 석실서원이라 한다. 지금 서울 시내에서 이곳까지 간다고
하면 길이 복잡하다는 생각부터 드는데, 예전에는 오히려 한강에서 배를 타면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이라
생각을 했는지 석실서원은 노론 학자들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이 그림 역시 구별하기 위하여 <삼주삼산각(三州三山閣)>이라고도 한다.
석실서원이 있는 서원말에서 물길을 따라 한두 모퉁이를 돌아 내려오면 왕숙천이 합류하는 외미음이 나온다.
농암 김창협이 터를 잡아 살던 곳으로, 김창협이 앞에 모래밭이 세 군데 있다하여 삼주라 이름 짓고, 삼산각을
지어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림 중앙의 기와집이 김창협이 살았던 집이다. 담장 안 세 채의 건물 중
맨 앞에 있는 것이 바깥사랑채로 삼산각이란 현판을 걸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미음나루, ‘미호진(渼湖津)’이라고 불리던 나루가 있었다 한다.
광진구의 아차산과 그 아래에 있었던 광나루의 전경이다. 예전에 광나루는 한강을 건너는 큰 나루 중의
하나였다.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내려와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다고 한다. 그림 속에 보이는 산자락에는 지금 워커힐호텔이 들어서 있다. 강 건너 남쪽은
하남위례성으로 추정하는 풍납토성이 있는 곳이었다.
옛 송파진은 지금의 석촌호수가 있는 지역이었다. 원래는 부근에 큰 도선장인 삼전도가 있었으나 병자호란
때의 ‘삼전도 굴욕’ 이후 삼전도를 기피하는 경향이 늘면서 송파진이 점차 한양과 광주를 잇는 큰 나루터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그림 속 산 위에 보이는 성벽은 남한산성이다.
잠실 쪽에서 서북으로 흘러오던 한강 줄기가 꺾어져 서남으로 흘러가면서 그 모롱이를 이루는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것이 압구정(狎鷗亭)이다. 예전 이 압구정에 올라서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명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림은 압구정동 일대와 강 건너 옥수동, 금호동 일대를 조망하고 있지만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 생경할 뿐이다. 그림의 오른쪽 뒤편에 보이는 짙은 초록빛 산이 남산이다.
압구정이 있었던 곳은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역대 권문세가들이 항상 이곳을 탐내어 별장을 짓고자 했다.
압구정을 처음 지은 사람은 한명회였다. 세조와 성종대를 거치며 최고의 권신으로 세상을 농락하던 한명회가
만년에 이곳에 별장을 짓고 명나라의 예겸(倪謙, 1415 ~ 1479)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부탁하여 ‘압구정
(狎鷗亭)’이라는 정자 이름을 받았다. 이 그림이 그려지던 때의 압구정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조선말에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에게 저자섬1과 함께 압구정을 하사한 것으로 전한다. 정자가 아주
없어진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경교명승첩」상첩의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선비가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부채를
펼쳐들고 마당에 있는 화분의 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속 인물은 인왕곡의 인곡정사로 이사 가기 전, 북악산
아래에서 살던 때인 정선의 50대 초반 모습으로 추정한다. 사인풍속화로는 매우 드물게 채색을 하였다.
참조 : 미술백과(간송미술문화재단), 서울지명사전(2009.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 정선의 그림에서 보듯 압구정이 있는 언덕 아래에는 모래가 쌓여 있었다. 물길에 따라 때로는 모래섬이 되고 때로는 모래톱이었는데 압구정동에 현대아파트를 지으면서 그 모래를 파다 쓴데다 한강의 물길도 바뀌면서 완전히 흔적이 사라졌다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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