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선 경교명승첩 1

從心所欲 2019. 7. 12. 00:55

 

겸재 정선(鄭歚) 하면, 금강산이 떠오를 정도로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많이 그렸고 또 뛰어난 작품들도 남겼다.

그런데 금강산 말고도 정선이 많이 그린 그림 소재가 있다. 한양과 한양 근교의 풍경이다. 정선만큼 한양과

한양 주변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도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경교명승첩」이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한양 근교와 한강변의 이름난 경치와 명소를 진경산수화로 그린 그림첩이다.

여기에 몇 점의 인물화도 포함되어 있다. 1741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여 정선이 사망한 1759년경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교명승첩」은 원래는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다시 엮어졌다고 한다. 상첩(上帖)에는

친구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 아래 정선이 양천(陽川) 현령으로 있던 1741년에 그린 양천

지역의 경치를 비롯한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을 그린 그림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첩(下帖)은 상첩보다 10여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한양 주변의 풍경과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이전에

그로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畵題)로 한 그림들이 실려 있다. 상첩에 19폭, 하첩에 14폭으로 모두

33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데,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에 이르는 정선의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특색과

변모의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65세 때인 1740년(영조 16) 겨울, 정선은 종5품의 양천현령에 제수되어 1745년 1월까지 4년 간 양천현령을

지내게 된다. 양천(陽川)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과 등촌동 일대다. 부임지로 떠나기 전, 정선은 평생의

친구인 당대 최고의 시인 이병연과 서로 그림과 시를 바꿔 보기로 약조를 맺었고 그 결과 「경교명승첩」이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다.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정선은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부근인 순화방(順化坊)에 살면서

삼연(三淵) 김창흡을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한 사이다. 나이는 이병연이 정선보다 5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평생지기였다. 당시 세간에서 ‘그림은 겸재, 시는 사천’이라 할 정도로 두 사람은 각기 진경산수화와 진경시

(眞景詩)로 자기 분야에서 최고봉에 오른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의 스승이었던 김창흡은 조선 산천(山川)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한문시를 지으면서 중국 역대 시인의

시를 모방하거나 차운(次韻)하던 기존 관습에서 벗어나 우리 어감에 맞도록 어휘의 순서를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진경시(眞景詩)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이병연은 이러한 스승을 좇아 우리 산하와 풍물을 직접 여행하고 겪으며

조선화한 언어로 시를 읊어냈다. 그는 일생동안 무려 10,300여 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집안에서는 3만수를 지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다작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뛰어났다. ≪병세재언록

(幷世才彦錄)≫1에는 이병연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느 시인의 시와 달랐다. 이병연은 시에 관한한 천성을 타고났으며, 무게가 있고, 시구(詩句) 또한 기이하고 
웅장했다. 우리나라에 시의 거장이 여럿 있으나 삼연 김창흡 이후에는 사천(이병연) 한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이름이 넘쳐흘러 어린아이들이나 종들조차 ‘이삼척시’라 했다. 삼척은 이병연이 고을살이 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청장관 이덕무는 이병연에 대하여 “영조 임금이 즉위한 뒤 50년 이래 시인이라면 마땅히 이병연을

쳐야 한다”고 했다. 문인 김익겸(金益謙)이 이병연의 시초(詩抄) 한 권을 가지고 중국에 갔을 때 강남(江南)의

문사들이 “명나라 이후의 시는 이 시에 비교가 안 된다”라고 그의 시를 극찬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데 이병연은 시를 지을 때의 버릇이 독특했다. <서암집(恕菴集)>2에 기록된 그의 모습이다.

 

“시를 지을 때 심사숙고하고 끈질기게 훑어보았다. 시 한 구절을 만들 때마다 반드시 수염 서너 터럭을 
만지작거려 잘라내고서야 그만 두었다. 이병연의 시는 빼어났지만 수난을 당한 수염은 길지 않았다.
일찍이 문을 닫은 채 수십일 동안 시를 짓느라 끙끙 댔는데, 드디어 문밖으로 나온 얼굴을 보니 수염이
짧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의당 그러려니 하고는 ‘웬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상자에 그가 지은 시가
가득 쌓였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겸재 정선 「경교명승첩」中 <시화상간(詩畵相看)> 견본담채 29.0 x 26.4cm 간송미술관]

 

위 <시화상간>은 「경교명승첩」하첩(下帖)에 들어있는 그림이다. 화제시는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는데 가볍고 무거움을 어찌 값으로 따지리오) 이다. 정선이 양천현령으로

부임한 다음 해인 1741년 봄에 이병인이 이런 시찰(詩札)을 보냈다

 

[이병연 시찰, 1741년, 지본묵서, 24.4 x 35.3cm, 간송미술관]

 

【與 鄭謙齋 

정겸재에게

有詩去畵來之約

시가 가면 그림이 온다는 약속을 했었소.

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詩出肝腸畵揮手 不知雖易更雖難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는데 가볍고 무거움을 어찌 값으로 따지리오.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 나오니 어느 것이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려.

辛酉春仲 槎弟

신유 봄에 사제(이병연)】

 

<시화상간>의 화제는 이 편지 속 7언절구 시의 첫째, 둘째 구절이다. 글귀는 이병연 것이지만 글은 정선이

직접 썼다. 그림 속, 붓과 종이를 놓고 마주앉은 두 노인은 이병연과 정선을 그린 것이겠지만 이 그림은 첩에

있는 산수화들이 진경인 것과는 달리 관념화이다. 이병연이 졸(卒)한 것이 1751년이고 이 그림은 1754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선이 생전의 이병연과 시와 그림에 대하여 서로 담소하며 지냈던 추억을

그리워하며 그렸을 것이다. 정선이 양천으로 부임할 당시, 정선을 떠나보내는 섭섭함을 이병연은 전별시에

이렇게 담았다.

 

【爾我合爲王輞川 畵飛詩墜兩翩翩

歸驢己遠猶堪望 초愴江西落照川

자네와 내가 합쳐야 왕망천(王輞川)이 될 터인데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누나.

강서(江西)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네.】

 

시에 등장하는 왕망천은 중국 당(唐)나라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연을 소재로 하면서도 불교적 색채가 짙은

서정시에 뛰어나 ‘시불(詩佛)’로 불리는 왕유(王維)3를 가리킨다. 수묵(水墨) 산수화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송(宋)의 소식(蘇軾, 소동파)은 왕유를 가리켜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평하였다.

 

이병연은 정선과 함께 하면 왕유 못지않은 시화(詩畵)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정선이 떠나니 두 사람 다 한쪽

날개를 잃은 꼴이 되었다고 아쉬워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선의 부임지가 지금은 같은 서울이고 당시에도

한양에서 배타고 한강만 건너면 닿는 곳이다. 양천은 가까울 뿐만 아니라 경치도 좋은 고을이었다. 그런데도

이병연은 정선의 부임을 축하하기 보다는 이렇게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렇게 지척간의 이별도 서운해 하던 60년 지기(知己) 이병연을 아주 만날 수 없는 곳에 보낸 정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래서인지 그림 속 두 노인은 선계(仙界)에라도 있는 듯이 보인다. 화폭 중앙에 떡 버티고 선

아름드리 굵은 소나무는 두 사람의 우정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선의 마음을 대신하는 상징이리라.

정선은 그것으로도 미진하다고 생각했는지 옆에다 땅 속에 깊이 박힌 바위까지 그려 넣었다.

제시 앞에 찍은 두인(頭印)은 ‘천금물전(千金勿傳)’이다. 천금을 준다 해도 남의 손에 넘기지 말라는 의미다.

이 도장은 「경교명승첩」의 모든 그림에 찍혀있는데 그만큼 정선이 이 그림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숙종, 영조 때의 문인으로 이병연의 친척이기도 했던 신돈복(辛敦複)이 자신이 견문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야담집「학산한언(鶴山閑言)」에 이런 글을 남겼다.

 

겸제 정선은 자가 원백(元伯)이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300년래 
으뜸가는 그림이라고 한다. 그림을 구하는 이들이 삼대 들어서듯 빽빽하게 밀려와도 모두 응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니, 나 역시 같은 북쪽 동네에 살면서 공(公)의 산수 그림 삼십여 장을 얻어서 항상 보배로 아끼고 있다.

하루는 내가 사천 이공(公)을 찾아뵈었다가 그 책상 위에 귀중한 중국 서적이 쌓여 벽을 메운 것을 보았다. 

 여쭙기를 “친척 어른께서는 중국 서적을 어찌 이리 많이 갖고 계십니까?” 하니, 이공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게 천오백권이나 되는데 모두 내가 마련한 것일세!”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모든 것이 정원백에게서 나온 것인 줄 누가 알겠는가? 북경의 그림 시장에서 원백의

작품을 매우 중히 여기는지라 비록 손바닥만한 조각 그림이라도 반드시 비싼 값으로 사들인다네. 내가 원백과

가장 친하게 지내는 까닭에 그림도 가장 많이 얻었는데, 매번 북경 가는 사신 행차 때마다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보내서 볼만한 책들을 사오게 하였더니 이렇게 많이 모아졌다네.” 하셨다. 나는 비로소 중국

사람들이 진실로 그림을 알아보며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이름만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선도 이런 내막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니 이병연에게 혹시라도 「경교명승첩」그림을 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미리 못을 박아두려는 뜻에서 ‘천금물전(千金勿傳)’ 도장을 찍지는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병연과 정선이 시화첩을 만든 것은 「경교명승첩」이 처음은 아니다. 1712년, 이병연이 금강산 인근의 금화

현감으로 있던 시절, 정선을 초대했고, 이때 정선은 금강산 그림 21폭을 그려 이병연에게 선물하였다. 이병연은

스승 김창흡에게 이 그림들에 제화시를 받고 또 자신과 다른 사람의 시를 붙여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화첩은 지금 전하지 않고 다만 화첩에 붙였던 시들만 여러 문집에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금은 전하지 않는 또 다른 시화첩(詩畵帖)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병연의 제자로 정선 풍(風)의 그림을 

그렸던 창암 박사해(朴師海, 1711~78)가 ‘두 노인의 시와 그림에 제한다(題二老詩畵)’는 발문을 쓴 것이 따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그림이라 말하자니 곧 시가 있고, 
시라고 말하자니 곧 그림이 있는지라 
시 혹은 그림이라고 이름 지어 
한쪽으로 치우치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로시화(二老詩畵)’라 하였다. 
그러나 이 제목 또한 시를 그림보다 앞세운 것이니 
이것도 편중된 것이 아닐까?

소리울림은 적요한데 글의 꾸밈과 생각이

그윽하고 묘한 것은 겸재노인의 ‘그림시’요,

쇠와 돌이 쨍그랑거리듯이 그대로 베껴내서

핍진한 것은 사천선생의 ‘시그림’이다.

그림이 시가 아니라면 진짜 그림이 아니고,

시가 그림이 아니라면 좋은 시가 아니다.

또 그림만 그림인 줄 알고 시는 그림인 줄 모르면

그림을 잘 보는 것이 아니고,

시만 시인 줄 알고 그림이 시인 줄 모르면

참으로 시를 아는 것이 아니다.

사천선생께서 바라보면 겸재노인의 그림이 바로 시이고,

겸재노인께서 살펴보면 사천선생의 시가 바로 그림이다.

나는 두 노인 가운데 어느 분이 시인이고

어느 분이 화가인지 정말 알지를 못하겠다.

그러므로 마땅히 고르게 하여

‘시화주인(詩畵主人)’이라 불러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리라.

 

 

참고 및 인용 :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 2002, 솔), 한국미술 산책(오세현)

 

 

  1. 이규상(李圭象, 1727 ~ 1799)이 지은 영조, 정조 시대의 문화부흥기를 이끈 인물들에 대한 기록으로 병세(幷世)는 ‘동시대’를, 재언록(才彦錄)은 ‘재주 있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2. 조선 후기의 문신 신정하(申靖夏)의 시문집 [본문으로]
  3. 왕유는 만년에 섬서성 망천(輞川)에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 701~762),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杜甫, 712~770)와 함께 중국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3대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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