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풍속화가, 풍속화, 풍속 12

從心所欲 2018. 12. 20. 18:01

 

[신윤복 <미인도(美人圖)>, 견본채색, 114 X 45.5cm, 간송미술관]

 

 

「여속도첩(女俗圖帖)」에서 보았던 여러 그림들을 거쳐 혜원은 마침내 이 <미인도>를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머뭇거림과 소심함은 모두 털어내고 여인의 모습 하나로 화폭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적었다.

盤礴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 “가슴에 가득한 일만 가지 봄기운을 담아 붓끝으로 능히 인물의 참모습을

나타내었다”. 전신(傳神)은 인물을 그릴 때 외형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의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동양의 초상화론인데 자신의 그림이 그렇다고 했으니 보통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혜원 자신이 그만큼

그림에 만족했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지금 조선의 미인도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혜원이 인물의 속 모습까지 그려냈다고 했으니 이 그림 속의 여인은 그냥 상상의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 누구를 그린 것일까? 故 오주석은 혜원이 홀로 지극히 사모했던 기생이 있었는데 대단한 일류 기생이라,

아득하니 저 멀리 높이 있어서 도저히 제 품에 넣을 재간은 없고, 그렇다고 연정을 사그라뜨릴 수도 없으니까

이렇게 그림으로라도 옮겨 놓은 것 같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기생에도 등급이 있었다. 기예가 뛰어난 궁중 여악(女樂)으로 어전에서 가무를 하는 기생들은

1패,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기녀는 2패로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로도 불렸다. 3패는 일반인을

상대하는 하급 기녀로 술좌석에서 품위 있는 가무는 못하고 잡가나 부르면서 매음도 하는 창기 수준이었다.

이들 간에는 누가 정해놓은 것은 아니지만 지위체계가 엄격하여 2패나 3패는 1패 앞에서 쪽도 못썼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초까지도 1패 기생을 만나면 2패 기녀들은 폈던 양산까지 접고 물러서 있다가 1패 기생이 지나간

뒤에야 길을 갈 정도였다고 한다. 명월관이나 국일관에서 1패 기생의 공연을 보려면 무려 300시간에 해당하는

전표를 끊어야 했다는 글도 있다.

 

조선 초기에는 기생이라는 명칭보다는 기녀(妓女)라고 불렀다. 그러다 궁중의 의녀들을 약방기생(藥房妓生)

으로, 침선비(針線婢)들을 상방기생(尙房妓生)으로 부르면서 기생이란 말이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

학자를 유생(儒生)이라 부르고 성균관 학생들도 유생이라고 불렀으니 기생(妓生)은 천시하는 명칭이 아니라

기예를 배우는 학생이라는 의미로 불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궁중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궁중에서 연주하는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인 장악원(掌樂院)에서 가무를 배워야했다. 기생은

비록 노비, 백정, 광대, 무당, 승려, 상여꾼 등과 같은 팔천(八賤)에 속하는 천민계급이었지만, 궁중에서

공연하고 양반 사대부를 상대하는 특수한 계층이기도 했으므로 말씨와 교양도 갖춰야 했고, 가무 이외에 시,

서화도 배워야 했다. 옷차림과 장신구도 양반집 여자와 같이 비단옷에 비단신을 신을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결혼할 수는 없었지만 그 대신 첩으로 들어가거나 기부(기둥서방)을 두는 것은 법으로 인정해 주었다.

 

한동안 <미인도>를 볼 때마다, 왜 그림 제목이 <미인도>인지 수긍이 안 갔다. 그림 속 여인이 전혀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다. 자극에 익숙한 미적 감각과 화려한 화장술에 안목이 심하게 손상된 때문이었던 듯하다.

아니면 간결한 필치로 그려낸 얼굴에 특별한 구석이 없어 보여 찬찬히 뜯어볼 생각을 못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신윤복 <미인도(美人圖)> 부분]

 

피곤한 듯 눈꺼풀이 약간 내려앉아 보이는 여인의 꿈꾸는 듯한 눈매. 무념무상인 듯도 하다. 아니면 조금은

슬픈 느낌인가? 여전히 모나리자의 미소가 주는 특별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안목이지만 여인의 눈매에는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어 보인다. 귀밑과 목덜미의 솜털 같이 보이는 가는 머리카락들이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다문 입술은 오히려 야무져 보인다. 가르마를 따라 올라가다 우스꽝스러운 가체가 없는 모습을 상상하니

단아하기까지 하다. 차분하고 맑다. 혜원뿐 아니라 웬만해서는 남자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을 차가움과

도도함도 느껴진다. ‘미인도에는 눈에서 느껴지는 내태(內態)와 자태에서 나오는 풍운(風韻)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런 그림인가 보다. 그림 속 여인은 미인이 맞는 듯하다.

 

앞머리 중간에 자를 대고 가른 듯 반듯하게 가르마를 타고 머리칼의 흐트러짐 없이 좌우로 곱게 빗어 머리

뒤편에서 묶어 깔끔하게 정리한 뒤 비녀를 꽂는 쪽머리가 조선시대 여인들의 전형적인 헤어스타일로 알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옛 그림에 그런 모습은 없고 온통 부스스한 파마머리처럼 보이는 머리 모양 일색인 것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었다. <미인도>속의 여인도 작은 보따리만한 머리채를 머리에 올려놓고 있는데 이를 얹은머리라

한다. 가체(加髢)의 일종이다.

요즘도 홈쇼핑TV채널에는 여자의 머릿결을 풍성하게 해준다는 제품 광고들이 줄을 잇지만 풍성한 머릿결에

대한 욕망은 시대와 관계없이 늘 같았던 모양이다. 예전 여인네들은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거나 또는 머리

모양을 높고 넓게 보이기 위해 남의 머리칼을 덧 넣어 머리를 땋았다. 이것을 가체(加髢)라고 한다. 한자 ‘髢‘

다리 체‘이다. 다리란 덧 넣어 땋은 머리로 월자(月子)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가체는 다리를 더 했다는 뜻이다.

영화나 사극에서 왕비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큰 머리 모양을 한 모습을 흔히 보는데 이 또한 가체의 일종으로

예식의 종류에 따라 어여머리 또는 큰머리를 했다.

 

[어여머리, 사진 한국데이타진흥원]

 

 

놀랍게도 <미인도>의 여인이 하고 있는 얹은머리는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부녀의 기본 머리 모양이었다고

한나, 다만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얹은머리에 가체를 드려 머리가 예전보다 훨씬 크게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다른 그림에도 일반 아녀자들이 다리를 이용하여 머리를 따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김홍도 《단원풍속도첩》中 <빨래터> 부분]

 

 

김홍도의 <빨래터>에서는 머리 땋는 여인 앞쪽에 다리 몇 가닥이 보인다. 특이하게 머리를 앞쪽으로 땋고

있는데, 다리 값이 워낙 비싸 가난한 집안 여인들은 머리를 앞쪽으로 땋아 머리 위에 돌돌 말아 올린 뒤 그 위에

다리를 얹기도 했다고 한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단오풍정(端午風情)> 부분]

 

 

신윤복의 <단오풍정> 중에 나무 밑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 양쪽으로 땋은 머리의 굵기와 양이

엄청나다. 다리를 아주 많이 넣어 땋은 머리임에 틀림없다. 저렇게 긴 머리를 머리 위로 말아 올려 옆에 앉은

여인이나 그네 타는 여인의 머리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양반가 여인들은 좌우대칭이 되게 머리를 올린 반면

기생들은 비대칭구조를 이루도록 머리 모양을 했고 이를 얹은머리 가운데서도 트레머리라 했다. 

 

가체를 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단순히 가체만 하는 것이 아니고 돈 있는 집에서는 그 위에

각종 보석으로 장식까지 하느라 비용이 수만 냥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싸건 말건 감당할 능력 있는 사람만 하면

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남에게 뒤지고는 못 사는 부류가 있기 때문에 결국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영조 때 급기야 가체금지령을 내렸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정조도 1788년에 다시 금지령을 가동시키면서 8개

항목에 달하는 가체신금절목(加髰申禁節目)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여기에는 다리는 물론, 본인의 머리를 얹는

것조차 일절 금하고 대신에 쪽머리에 족두리를 쓰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또 어떤

민족인가! 족두리제가 완전히 실시된 것은 그 후로도 30여년이 지난 순조 중엽이었고, 쪽머리가 정착된 것은

그 후 100여년이 지난 순조 말엽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쪽머리도 기혼녀의 보편적인 머리모양새로 삼국시대

부터 존재했었던 것이기는 했다.

 

[채용신 <운낭자27세상(雲娘子二十七世像)>, 1914년, 120.5 x 62cm, 국립중앙박물관]

 

 

아마도 이 그림은 조선 최초의 ‘엄마와 아기’를 주제로 한 그림일 것이다. 그림 속 현대판 우량아 못지 않은

살이 투실투실한 아기를 안고 있는 쪽머리 진 여인은 전통적인 조선의 여인상이나 어머니상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여염집 여자가 아니다. 이 그림은 운낭자라는 기녀를 그린 그림이다.

운낭자의 본명은 최연홍(崔蓮紅, 1785 ~ 1846)으로 원래 평안남도 가산 고을의 군수 정시의 소실이었다.

그러다 1811년 12월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면서 남편과 시아버지가 맞아죽는 참화를 당하였는데, 그때 이

최연홍이 남편과 시부모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를 지내고 사경에 빠진 시동생을 자기 집에 감추어두고 주야로

간호해서 소생시켰다. 그래서 홍경래의 난이 평정되자 조정에서는 최연홍을 기적(妓籍)에서 지우고

표창하였으며 사후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기(義妓)인 계월향과  함께 열녀각인 평양 의열사(義烈祠)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 때의 초상화가 아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인물은 채용신(蔡龍臣, 1850 ~ 1941)으로, 대대로 무관을 지낸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6년 무과에 급제하여 20년 넘게 관직에 종사하였던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가 뛰어나

흥선대원군의 초상을 그리기도 하였고 나중에는 고종의 부름을 받아 고종의 어진까지 그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전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는 전라도 지역의 애국지사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

<운낭자27세상>은 그 때 여인애국지사상(女人愛國志士像)으로 함께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림 제목에 27세라는 나이를 특정한 것은 1811년 홍경래 난 때 최연홍의 나이가 27세였기 때문이다.

채용신은 조선시대 전통양식을 따른 마지막 인물화가로,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화풍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변방에서

홀로 떠돌았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잊혀진 화가였다.

반면 김은호(金殷鎬, 1892 ~ 1979) 같은 친일반민족행위 화가는 해방 후 문화훈장대통령장, 3·1문화상

예술부문 본상, 대한민국 예술원상까지 받고 거칠 것 없이 잘 살다가 별 일 없이 갔다.

 

 

 

참고 : 역사로 본 전통머리(2010, 광문각), 문화원형백과(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