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문인화 6

從心所欲 2018. 9. 27. 16:41

 

[심사정, <파교심매도> , 1766년, 견본담채, 115.0 x 50.5cm,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맹호연(689 ~ 740)이 눈으로 덮인 산에 매화를 찾아 나섰다는 옛이야기를 그린 것을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또는 ‘탐매도(探梅圖) ‘라고 부른다. 찾을 심(尋), 찾을 탐(探)으로 같은 뜻이다.

맹호연은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존경하여 깊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 유량과 은둔생활을 하며

술과 가야금을 벗 삼아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다. 그가 이른 봄 매화를 찾아 당나귀를 타고

장안에서 파교를 건너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났다는 고사(古事)로 인하여 탈속하고 고아한 선비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파교심매(灞橋尋梅), 설중탐매(雪中探梅)의 모습으로 그림에 등장한다. 이들 그림에는 눈이 가득

쌓인 적막한 산골에 핀 매화와,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 그리고 매화음(梅花飮)에 필요한 음식과 술

그리고 시를 짓기 위한 문방구 등을 담은 보따리를 들고 따르는 시동이 등장한다.

 

[이당 김은호(1892~1979) <파교심매도>]

 

[작자미상 <파교심매> 일본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

 

[김명국 <탐매도> 54.8 x 37cm, 국립중앙박물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탐매도로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것은 신잠(申潛, 1491~1554) 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다.

 

[전(傳) 신잠 <탐매도>, 견본담채, 43.9 × 210.5㎝, 국립중앙박물관]

 

그림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확대해 보면 왼쪽 부분에는 다리 건너에 매화나무가 있고 고사는 나귀를 타고

다리위에서 뒤를 돌아보고 있다. 오른쪽에는 고사의 시종인 듯한 인물이 손을 모은 채 멈춰 서있다. 다른

'파교심매도'들과는 달리 시종이 고사를 따라가는 모습이 아니라 왠지 고사와 시종이 이별하는 듯한 분위기다.

시종의 모습도 어딘가 슬퍼 보인다. 옛 그림에서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속세를 떠나 선계(仙界)로 들어간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일회성의 탐매(探梅)가 아니라 매화로 상징되는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고사

(高士)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파교심매'를 motive로 한 변주곡 같은 그림처럼 느껴진다.

 

 

 

위 그림은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기에는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객이 겨울에 두메산골에서 간신히 찾은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다음날 먼길을 재촉해서 떠나는 내용의

'설중귀려도'는 명대(明代)  절파(浙派)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위 그림은 고사가

시종(으로 보이는 인물)과 작별을 하며 오히려 매화가 피어있는 산으로 가고 있다. 귀려(歸驢)가 되려면 오히려

산에서 나와야 맞지 않을까?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시종과 동행해서. 아래 그림처럼 말이다.

 

[김명국, <설중귀려도>, 17세기, 모시에 수묵, 101.7cm x 54.9cm, 국립중앙박물관]

 

심매도이기는 한데 위 그림들의 황량한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겨울이 아닌 이른 봄에 매화를 찾아 나섰는지

여기저기 붉은 빛으로 포근한 느낌이 가득하다. 

 

[심사정 <기려심매도> 조선 18세기, 종이에 채색, 41.0 x 27.0㎝, 간송미술관]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린 인물이 있었다, 송대 은일(隱逸)시인 임포(967 ~ 1028)는 항주(杭州)의 서호

(西湖) 부근 고산(孤山)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20여 년 동안 세상에 나가지 않고 살았다. 그는 벼슬도 하지

않고, 아내도 얻지 않았다. 당연히 자식도 없었다. 오직 매화나무를 심고 학(鶴)을 기르는 것만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매화를 아내로 여기고, 학을 자식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렇게 매화를 좋아하는 성격 덕분에 그의 시에는 매화를 노래한 시가 많았으나 임포는 시를 쓰고 그 자리에서

버리고는 남겨 두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임포가 늙었을 때 어떤 사람이 왜 시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임포는 “내가 시로 이름을 떨치기 싫어 산 속에 은거하였는데, 하물며 후세에 전하고

싶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사람들에 의해 3수의 사(詞)1와 300여 수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시제의 시가 있는데 어느 봄날 저녁에 서호(西湖) 에서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하여 읊었다는 시이다. 송대(宋代)의 문인 구양수는 이 시를 최고의 매화시로 평하였다.

 연작 2수(首) 가운데 첫째 수(首)가 유명하다.

 

衆芳搖落獨占盡

風情向小園喧姸

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뭇 꽃들 시들어 모두 졌는데 홀로 선연히 피어

조그마한 정원의 풍정을 독차지하였구나.

성긴 가지 그림자는 호수에 어리비치는데

그윽한 향기가 움직일 때 달은 몽롱하구나2.

 

이 칠율(七律)의 시는 매화의 아름다움을 읊은 명시(名詩)의 전형으로 이후 문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중심은 '疎影橫斜 暗香浮動‘이라는 대구(對句)로 문인들의 묵매 그림에 가장 널리 쓰이는

화제(畵題)가 되었다.

임포의 삶은 은거를 꿈꾸는 많은 선비들의 이상이 되었고, 이를 형상화한 그림이 ‘매화서옥도’이다.

 

[조희룡(1789~1866) <매화서옥도>,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106.1 × 45.1cm, 간송미술관]

 

[소치 허련(1809 ~ 1892) <매화서옥도>, 19세기, 종이에 엷은 색, 21.0 × 28.0cm, 개인소장]

 

[전기,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19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32.4 × 36.1cm, 국립중앙박물관]

 

고람(古藍) 전기(田琦, 1825 ~ 1854)의 위 그림 오른쪽에는  '역매(오경석)이 초안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

(亦梅仁兄草屋笛中)는 글이 적혀 있다. 오경석은 위창(葦滄) 오세창의 아버지이다. 전기가 그린 같은 풍경의

또 다른 그림으로 < 매화서옥도>가 있다. 앞의 그림에는 초옥에 사람이 찾아오는 모습이고 아래 그림에는

사람이 초옥을 떠나는 모습이라 마치 한 날의 앞 뒤 상황을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전기,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조선 후기 19세기, 종이에 채색, 60.5 x 124.0㎝, 간송미술관]

 

전기(田琦)는 중인 출신으로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으며 조희룡(趙熙龍)은 자신 보다 나이

어린 전기를 매우 아끼며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추사파(秋史派) 가운데에서도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의

경지를 가장 잘 이해하고 구사하였던 인물로 크게 촉망받았으나 29세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하였다. 조희룡이 엮은 인물전기집 『호산외사(壺山外史)』의 ‘전기전(田傳)’에 의하면

“체구가 크고 빼어나며 인품이 그윽하여 진·당(晉唐)의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의 모습과 같다”고 하였으며,

“그가 그린 산수화는 쓸쓸하면서도 조용하고 간결하면서 담백하여 원대(元代)의 회화를 배우지 않고도 원인

(元人)의 신묘한 경지에 도달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그의 시화는 당세에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상하 100년을

두고 논할 만하다”고까지 하였다.

위의 그림들 보다는 앞서 그린 듯한 또 다른 <매화서옥도>가 있는데 1849년으로 간기가 밝혀진 그림이다.

 

[전기 <매화서옥도>, 1849년, 삼베에 엷은 색, 97.0 × 33.3cm, 국립중앙박물관]

 

7언으로 되어있는 제시는 원(元)나라 예찬이 지은「증원도의 그림에 적음(題畵贈原道)」이다.

 

雪後園林梅已花

눈 내린 숲에는 매화가 피었고

西風吹起雁行斜

서풍이 불어오니 기러기 날아가네

溪山寂寂無人跡

계산은 고요하여 사람의 자취 없으니

好問林逋處士家

즐거이 임포처사의 집을 묻네

 

매화음(梅花飮)은 매화를 보며 즐기는 술이다. 매화음에 관해서는『호산외사(壺山外史)』에 이런 글이 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아주 기이한 매화나무를 팔려고 하는데 김홍도는 그 매화가 썩 마음에 들었으나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이때 마침 어떤 사람이 그림을 청하고 그 사례로 3천냥을 보내자 김홍도는 2천냥으로

매화를 사고 8백냥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셨는데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했다. 남은 2백 냥으로 쌀과 나무를 집에 들였으나 하루 지낼 것밖에 안 되었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매화 그림들이 있으나 절개나 지조를 상징하는 문인화풍이라기 보다는 풍류에 가깝다는

평을 받고 있다.

 

[ 단원 김홍도 <매죽도>]

 

[김홍도 <백매> 지본담채, 80.2 x 51.3cm, 간송미술관]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3((주)넥서스), 스마트K,

미술대사전(한국사전연구사), 중국인물사전(한국인문고전연구소), 한국 미의 재발견 6 - 회화(솔출판사) 등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1. 사(詞) : 한문문체의 하나. 사는 넓은 의미에서 시(詩)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가 음악과 완전히 분리된 뒤에 노래가사로서 새로 생겨난 것이 사(詞)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2.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주)넥서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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