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문인화 4

從心所欲 2018. 9. 23. 16:33

 

 

사군자(四君子) 역시 문인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사군자는 산수화나 인물화에 비하여 비교적 간단하고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기(餘技) 화가들인 문인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또한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으로

북송(北宋) 때부터 사군자화는 화가들의 인품 또는 성격 전체를 반영한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문인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사군자는 매화(梅花), 난초(蘭草), 국화(菊花), 대나무(竹)의 네 가지 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매화는 겨울 추위를 이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린다.

국화는 서리 내리는 늦가을까지 꽃을 피운다. 대나무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란다.

이런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군자(君子), 즉 덕(德)과 학식을 갖춘 사람의 인품에 비유하여 사군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군자’라는 명칭은 명대(明代)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네 식물은 고사(故事)와 문학을 통하여 상징적 의미를 얻게 되면서 자연히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매화는 군자의 지조와 절개를, 난초는 군자의 고결함을, 국화는 군자의 은일자적함을,

대나무는 군자의 높은 품격과 강인한 기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사군자를 말할 때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의 순서는 이들을 춘하추동의 순서에 맞추어 놓은 것이다. 

 

대나무는 아름다움, 강인성 그리고 높은 실용성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인의 생활과 예술에 불가결의 존재가 되어 왔다.

≪시경≫의 <위풍(衛風)>에는 주(周)나라 무공(武公)의 높은 덕과 학문 그리고 인품을

대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다.

이것이 대나무가 군자로 지칭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정(1554 ~1626), <설죽(雪竹)>, 견본수묵, 94.4 x 54.5cm, 국립중앙박물관]

 

난초의 담백한 색과 은은한 향기로 인해 군자의 고결함을 나타내는 상징성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시 <이소(離騷)>에 그가 난초의 향기를 즐겨 넓은 지역에 이 꽃을 가득히 심었다는 구절이 있다.

 

 

[석파 이하응(1820 ~ 1898) <석란도대련(石蘭圖對聯)> 1887, 견본수묵, 151.5 x 40.8cm, 湖林박물관]

 

국화 역시 육조시대(六朝時代)의 전원(田園) 시인으로 유명한 도연명1에 의해서 지

조와 은일(隱逸)의 상징으로 그 위치가 굳어졌다.

그는 자기의 뜻을 굽혀야 하는 관직 생활을 참지 못하여 사직하고 돌아오며 지은<귀거래사 歸去來辭>에서,

집에 와 보니 폐허가 된 골목에 아직도 소나무와 국화가 그대로 있음을 반겼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편의 시에서 국화와 술을 즐기는 자신의 생활을 읊었다.

 

 

[이인상(李麟祥:1710-1760), <병국도(病菊圖)>2, 지본수묵, 28.5×14.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치(小癡) 허련(許鍊) <묵국도> 지본수묵 31 x 19.5cm 동아대학교 석당미술관]

 

 

매화도 일찍부터 아름다운 모습이나 지조의 상징으로 많은 시문에 나타났다.

일생을 독신으로 매화와 더불어 은거 생활을 한 송(宋)나라 시인 임포(林逋) 이후로 문인들 사이에 애호되었다.

더불어 아직 눈이 덮여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 처음 피는 꽃을 찾아 나서는 심매(尋梅) 또한 문인들의 연중행사로 알려졌다.

 

 

[어몽룡 <월매도>3, 17세기, 견본수묵, 119.2cm×50.3cm]

 

 

[조희룡(1789~1866) <홍매대련(紅梅對聯)> 19세기, 지본수묵담채, 각 127×30.2cm, 개인]

 

송(松)대의 문헌에 의하여 대나무가 제일 먼저 9, 10세기쯤에 묵화로 그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다음으로 묵매가 그려졌다.

난과 국도 11세기 중엽에는 묵화로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다.

원래 사군자는 화조화(花鳥畵)의 일부로서 취급되었으나,

그 상징성으로 인해

북송(北宋)때부터 문인들이 즐겨 그리게 되면서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정립되었다.

수묵화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기의 사군자는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4으로 그려졌었다.

그러나 북송 이후부터는 사대부 여기화가(餘技畫家)들에 의해서 몰골법(沒骨法)5 묵화로 그려졌다.

그 중에서 국화잎이나 매화의 큰 나무줄기는 몰골법으로 그리지만, 꽃잎 하나하나는 윤곽선만으로 그리기도 하고

난초는 백묘법(白描法)6을 쓰기도 했다.

북송 때 이미 네 가지 식물이 모두 묵화로 그려져, 후대 문인들의 묵화로서 사군자화의 기틀이 마련되면서,

원대(元代)에는 몽골족에게 나라를 잃은 한족 문인화가들 사이에서 지조와 저항의 표현으로 사군자가 자주 그려졌다.

대나무와 매화는 소나무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총칭 아래 역시 같은 이유로 원대에 많이 그려졌다.

그밖에도 죽석(竹石), 고목죽석(古木竹石), 석란(石蘭), 난죽(蘭竹) 등의 배합으로도 많이 그려졌다.

 

묵죽화를 사대부 화가들의 가장 적절한 자기표현 수단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은 북송의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이다.

이들은 서로 절친한 사이로, 화가로서의 기질이 좀 더 탁월하였던 문동의 묵죽화는

깊은 통찰력을 가진 소식의 능숙한 시문에 의하여 그 가치가 더욱 상승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이들은 ‘흉중성죽(胸中成竹)7’이라는 문인화론을 형성하면서 그 이론적 토대도 뒷받침했다.

 

묵매는 북송 때 화광산(華光山)의 선승(禪僧) 중인(仲仁)과 그 뒤를 이은 남송의 화가 양무구(楊无咎)에 의해서 기법이 확립되었다.  

원대에 와서 문인화 이론이 한층 더 발달됨에 따라

특히 묵죽과 묵란은 서화일치(書畫一致), 회화의 사의성(寫意性)을 주장한 문인들에 의하여 한층 더 성행하였고,

청(淸)나라 초기 이후 총괄적인 화보가 발간됨으로써 더욱 널리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송(宋), 원(元) 회화의 영향으로 고려시대의 사대부들이 묵죽, 묵매를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대부들은 물론 화원(畵員)들도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조선 중기에는 독자적인 양식이 선보이기 시작했으며,

후기로 가면서는 남종화(南宗畵)의 유행으로 사군자가 더욱 많이 그려졌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세계미술용어사전』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1. 陶淵明(365 ~ 427) :중국 동진(東晋)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대(宋代)초기에 걸쳐 생존한 중국의 대표적 시인. 이름이 잠(潛)이고 ‘연명’이 자(字)라는 설도 있고 그 반대의 주장도 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으로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대 이후는 6조(六朝)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시풍은 왕유(王維)를 비롯한 당대(唐代)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줬다. (중국역대인명사전) [본문으로]
  2. ‘남계의 겨울날 우연히 병든 국화를 그렸다. 보산인(南溪冬日偶寫病菊 寶山人)이라는 화제로 인하여 ’병든 국화 그림‘으로 불리고 있으나 겨울이라는 시점 때문에 실제로는 ’얼어 죽은 국화‘를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본문으로]
  3. 어몽룡의 월매도는 조선 최고의 매화도라는 찬사에 힘입어 오만원권 지폐에 실렸는데, 그림의 핵심인 죽 뻗은 가지와 그 끝에 걸린 달의 극적인 조화가 없어지고 달의 위치 등을 바꾸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매화로 가장 유명한 화가는 16세기의 어몽룡과 19세기의 조희룡을 꼽는다.(스마트K) [본문으로]
  4. 동양화에서 형태의 윤곽을 먹선(墨線)으로 먼저 그리고 그 안쪽을 채색하는 기법으로, 줄여서 ‘구륵(鉤勒)’이라고도 한다. 당대(唐代) 이후 윤곽선을 나타내지 않는 몰골(沒骨)이 등장하자 이와 구분하기 위해 이전까지 사용했던 방법을 구륵이라 부르게 되었다. 단번에 써 내는 것을 ‘구’라 하고, 겹쳐서 그리는 것을 ‘륵’이라 한다. 보통 선으로 사물의 윤곽을 묘사한 후 칠하는 것을 가리키며 남송대(南宋代)까지 직업 화가들의 화조(花鳥)화를 그리는 기법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원, 명대(元明代)에 이르러서는 문인화의 유행으로 필묵 중심의 몰골법이나 옅은 채색만 가하는 담채가 주를 이루었다. 주로 화조화의 기법을 구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세계미술용어사전) [본문으로]
  5. 윤곽선 없이 색채나 수묵(水墨)을 사용하여 형태를 그리는 화법. 물상(物像)의 뼈(骨)인 윤곽필선이 ‘빠져 있다(沒)’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채색법의 일종으로 구륵법(鉤勒法)과 반대되는 수법이었으나, 수묵화가 보편화되면서 색채뿐 아니라 수묵으로도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농담(濃淡)만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경우 몰골법이라 부르게 되었다. 화조(花鳥)나 화훼(花卉),초충(草蟲) 분야의 기법에 주로 쓰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6. 고대 ‘백화(白畵)’에서 유래한 중국 회화의 기법. 묵선(墨線)만으로 대상을 묘사하면서 색채를 칠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넓게는 색채를 칠하기 전의 밑그림, 분본, 소묘 등도 포함되지만 본격적인 백묘화는 선만의 묘사로서 완결시킨 작품을 가리킨다. (세계미술용어사전) [본문으로]
  7. 가슴속에 대나무가 완성되어 있다는 말로서, 그림이나 시 등 예술 작품의 창작 시에 미리 마음속에 전체를 그려놓고서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북송 시인 조보지(晁補之)가 "문동이 대를 그리고자 할 때는, 흉중에 이미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與可畵竹時 胸中有成竹)"라고 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소식 또한 ‘운당곡언죽기(篔簹谷偃竹記)’라는 글에서 "대나무를 그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마음속에 대나무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흉유성죽(胸有成竹)', '성죽재흉(成竹在胸)'이라고도 한다. (문학비평용어사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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