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는 시(誇)와 서화(書畵)가 일치되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여기는 중국 사대부와 문인들의 전통이 그 기틀이 되었다. 특히 북송(北宋) 중기에 이르러 시화(詩畵)일치의 주장과 서화(書畵)일치의 생각, 그리고 인품이 높고 학식이 풍부한 사람의 작품을 숭상하는 풍조를 바탕으로 예술적으로 세련된 당시의 문인들이 전문화가의 지나칠 정도로 정교한 화기(畵技)를 경멸·배격하고 자기의 의사를 솔직 간명하게 표출하는 그림을 이상으로 하여 조방한 형식의 수묵화로서 그 이상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즉, 문인화는 정신 우위의 사고를 대변하는 그림이다. 따라서 그리는 사람의 의취(意趣)가 얼마나 품격이 있는지 또 그 의취가 얼마나 그림에 잘 반영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고상한 의취에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지가 핵심이다. 그래서 문인화에는 독특하거나 특이하기 보다는 (적어도 당시의 문인들에게는) 친숙한 소재가 많이 사용되었다. 그래야만 보는 사람의 이해와 공감이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문인화를 감상하는 두번째 핵심은 소재가 갖는 상징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래는 익숙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이다.
[강희안 <고사관수도> 지본 수묵담채화, 23.4 x 15.7cm, 국립중앙박물관]
남아있는 그림이 별로 없어 조선 초기의 그림을 말할 때면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함께 어김없이 거론되는 그림이라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라는 화제(畫題)가 전혀 낯설지 않지만 이 그림을 처음보고 “세속을 떠난 덕망 있는 선비가 물을 보고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현대인이 얼마나 될까? 선비가 기대 엎드린 바위 앞이 물이라고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강희안이 직접 화제(畫題)를 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어떻게 이 그림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현대사회에도 특정 상징물에 대한 패러다임이 공유되듯 옛 선비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 대뜸 ‘물을 보는 그림’ 인 줄 알았을 것이다. 강희안 전에도 많은 관수도(觀水圖)가 그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청초(淸初)에 왕개(王槪)가 편집한《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에는 산수화에서 점경(点景)인물 그리는 방법을 100여개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고운공편심(高雲共片心)> 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 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 나오는 인물의 포즈와 사뭇 닮은 모습이다. 강희안(1417-1464)은 《개자원화전》보다는 적어도 200년 이상 앞선 조선 초기의 인물이니 강희안이 <고운공편심>을 참조했을 리는 만무하다. 알려진 대로,《개자원화전》은 왕개가 명말(明末)의 화가 이유방(李流芳)이 옛 명화들을 모아 만들었던 <산수화보(山水畵譜)>를 증보 편집한 것이다. 그런 만큼 《개자원화전》에서 소개하는 점경인물 그리는 방법도 오랜 중국의 그림 역사 속에서 대표적이고 모범이 될 만한 것들을 골라놓은 것이고, 그림에 관심이 있고 중국에도 다녀왔던 강희안이 <고운공편심>의 모본이 되었을 중국의 그림들을 보았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18세기에 조영석(趙榮祏, 1686∼1761)도 <고사관수도>를 남겼다. 강희안의 그림에 비해 물가에 있다는 사실이 좀 더 분명하고 그림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차이가 있을 지라도 그 구성은 거의 유사하다. 그림 속의 인물 묘사 역시 《개자원화전》의 <전석부장류(展席俯長流)>와 판박이다. 윤두서의 <관수도> 역시 구성에는 별 차이가 없고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은 《개자원화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독좌식(獨坐式)>의 모습 그대로다.
《개자원화전》의 <전석부장류(展席俯長流)>나 <독좌식(獨坐式)>과 유사한 인물 묘사가 관수도임을 증명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랜 중국의 회화 역사에서《개자원화전》에 소개될 정도의 인물 묘사법이라면, 현대의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그 시대 선비들 사이에는 서로 공유되는 수많은 감정과 상징성이 그 안에 내포되어 있을 것이고 그런 익숙한 인물 형태를 통하여 작가는 자신의 뜻을 좀 더 쉽고 분명하게 나타내려 했을 것이다.
왜 옛 선비들은 물을 보고(觀水) 또 물을 보는 그림을 그렸을까? 관수도를 얘기할 때면 흔히 등장하는 ‘관수유술 필관기란(觀水有術 必觀其瀾,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보라)’는 구절이 있다.「맹자」7편 중 마지막 편인 진심장구(盡心章句) 上에 나오는 구절이다. 물론 이 구절로 인하여 옛 선비들이 ‘관수(觀水)’라는 단어를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물을 본다는 것이 꼭 맹자의 이 말을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사물을 보아도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과 느낌이 다르듯 물을 보는 옛 선비들의 마음도 시와 때에 따라 각양각색이었을 것이다. 지자요수(知者樂水)라는 말을 떠올리며 사리에 통달하여 정체(停滯)함이 없이 마치 물이 자유로이 흐르는 것과 같은 지혜로운 선비가 되기를 소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물을 보며 격물치지를 궁리하기도 하고, 속절없이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키며 유수광음(流水光陰)이나 행운유수(行雲流水) 같은 말에 공감하기도 하고,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왕희지가 「난정서」를 썼던 난정수계1나 도연명의「귀거래사」처럼 물가에서 시를 짓는 은일자의 정취를 흠모하고 칭송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흥취가 일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문인화를 감상하는 데는 옛 사람들이 가졌던 이러한 의취를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식견이 필요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그려져 전해지는 관수도(觀水圖)는 여럿 있다. 고사(高士)라는 수식어 대신에 바위에 기댄다는 의암(倚岩), 소나무를 쓰다듬는다는 무송(撫松), 소나무 아래라는 송하(松下) 같은 수식어가 다르듯 관수도를 그린 사의 역시 다름을 그림에서 느낄 수 있다.
김홍도의 그림에 <고사관수도>라 불리기도 하고
<고사관송도>라고도 불리는 그림이 있다.
그런데 우측 하단의 화제(畵題)를 보면 당나라의 사대부였다가 세속에 염증을 느끼고 불교에 심취하였던 왕유(王維)의 종남별업
(終南別業, 종남산 별장)2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적혀있다.
행도수궁처(行到水窮處) 좌간운기시(坐看雲起時)
걸어 물길이 좁은 곳에 다다라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것을 바라볼 때
화제로 보면 물이나 소나무보다는 오히려 구름을 보는 쪽이 더 연관성이 높아 보인다. 이어지는 시의 뒤 구절은 ‘우연히 산속 노인을 만나 얘기하며 웃느라 돌아가기를 잊는다’고 하였는데 그림은 이 구절에 더 어울리는 듯도 하다. 김홍도는 위의 화제에 쓴 구절을 꽤나 좋아했는지 다른 여러 그림에도 같은 구절을 화제로 썼다. 그런 그림들에는 ‘한담(閑談)도’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는데 사실 그림 제목을 붙이는 데 있어 '관수', '관송', '한담'이란 각각의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일상적으로 사용된 듯하다.
그림 제목이 의목이 됐든 의송이든 무송이든 현대인들에게는 그 그림이 다 그 그림같이 느껴지고 별 다른 감흥도 없다.
오히려 관심은 은연 중에 어떤 그림이 더 잘 그렸는가에 쏠리게 된다.
그런데 옛 사람들은 잘 그리고 못 그리고 보다는 그림에 어떤 의취를 나타내려 했는가,
어떤 의취가 고상한가를 더 중히 여겼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우리도 비로소 문인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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