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문인화 1

從心所欲 2018. 8. 29. 17:20

 

 

작품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아래 두 그림을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이인문 (李寅文, 1745년 ~ 미상) <총석정>. 지본담채 28.0 x 34.0cm]

 

[김정희 <세한도> 그림 부분]

 

아마도 십중팔구는 보기 드문 풍경을 멋지게 그려낸 첫 번째 그림에 더 많은 눈길을 줄 것이다. 잘 그린 그림을

고르라면, 질문에 무슨 함정이 있나 의심을 하지 않는 한 대부분 주저 없이 <총석정> 그림을 고를 것이다. 어쩌면

집 거실에 걸어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지 모른다. 반면 <세한도>에 대해서는 그림의 분위기부터 시작해서

<총석정> 과 비교까지 해가며 여러 가지 트집도 잡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김정희의 <세한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되고 조선왕조 500년의 걸작으로 꼽힐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겸재 정선과 현재 심사정의 화풍에

서양화풍까지 가미된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이인문의 <총석정> 그림은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아래 그림은 각각 중국 원말(元末) 예찬의 <6군자도>와 남송 유송년의 <사경산수도(四景山水圖)> 중 여름

풍경에 해당하는 제2폭 납양(納涼)이다.

 

[예찬(倪瓚) <육군자도(六君子圖)>]

 

[유송년 <사경산수도(四景山水圖)>卷 중 제2폭,납양(納涼) ,비단위에 먹,40 x 69cm]

 

유송년의 <사경산수도(四景山水圖)>는 얼마 전 중국에서 특별우표를 발행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남종

문인화에 한하여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중국 산수화 최고의 명작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쪽은 예찬의

<6군자도>다.

정보가 없는 경우에는 네 그림이 모두 동양산수화로 보이겠지만 정작 그 내용은 다르다. 아는 바와 같이 추사와

예찬은 문인 또는 사대부이고 이인문과 유송년은 화원화가이다. 문인과 직업화가는 서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다르다. 직업화가들은 기교를 바탕으로 외면적 형사(形似)에 치중하여 그리고, 문인(사대부)들은 사의(寫意)를

그렸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 형사를 중시한 그림은 형사를 보아야 하고 사의를 중시한

그림은 사의를 보아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형사를 좇은 그림이든 사의를 좇은 그림이든 조금이라도 더 깊이 있는 감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식견이 필요하다. 그러나 필요한 식견의 분야는 다르다. 얼핏 생각하면 부족한

듯한 그림을 보고 감탄해야 하는 문인화에 더 고도의 식견과 능력이 필요할 것 같지만, 형사를 감상하는 일도

붓을 잡아보지 않으면 선이 힘 있게 그었는지 아니면 붓이 질질 끌려가면서 붓자국을 낸 것인지 조차 구분하기

쉽지 않다.

문인화는 그림의 실전적 소양이 없어도 그 특징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의 감상이 가능하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는

문인화(文人畵)의 연원과 변천과정이 명료하게 잘 요약되어있다.

 

“중국 북송시대 소식(蘇軾)과 그의 친구들, 즉 서예가 황정견, 서화가 겸 감식가인 미불, 묵죽화가 문동(文同),

인물 및 말 그림으로 유명한 이공린(李公麟) 등은 사인(士人)과 화공(畵工)의 그림은 각자의 신분적·교양적

차이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차이가 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는 ‘사인지화(士人之畵)’

또는 ‘사대부화(士大夫畵)’라는 용어와 사대부 화론(畵論)을 만들었다.

이때 사대부화란, 그림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 화가들이 여기(餘技) 또는 여흥으로 자신들의 의중(意中)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북송대(北宋代)만해도 사회적으로 문인(文人)이 곧 사대부

라는 등식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원대(元代)부터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여 결국은 ‘사대부화’

대신에 ‘문인지화(文人之畵)’ 또는 ‘문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명말(明末)

동기창의 남북종화(南北宗畵) 이론이 성립되었고, 이후 남종화(南宗畵)와 문인화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첨언하자면 동기창이 말하는 ‘문인의 그림’ 계보에 속하는 화가들이 남종화 화가들과 큰 차이가 없어 문인화와

남종화의 혼동이 생겨나고, 문인화가 남종화와 같은 의미의 용어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남종

문인화라는 식으로 구분 없이 사용되는 추세가 생겼지만, 구분하자면 남종화는 주로 산수화에 국한하여 사용

하는데 비하여 문인화는 산수화는 물론이고 사군자, 화조화 등 모든 그림 종류(畫目)에 사용된다.

 

“문인화에서는 기법에 얽매이거나 사물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 단지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진수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학문과 교양, 그리고 서도(書道)로 연마한 필력(筆力)을 갖춘 상태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준비하여 ‘흉중성죽(胸中成竹)’의 영감을 받아 즉시 그린다는 것이다. 문인화가들은

필력이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그림에 기교가 나타나지 않도록 치졸(稚拙)한 맛을 살려 그림으로써

천진(天眞)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물의 내적인 면을 표현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고, 이와 반대되는

형사(形似)를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같은 그림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감상되었으며,

또한 문인화에서는 옛 대가들의 필의(筆意)를 방(倣)하는 전통이 확립되어 후대에는 옛 대가의 회화 양식

자체가 주제가 되는 현상을 낳기도 하였다.사의를 중시한 그림은 대개 소략하다. 그러므로 원대 이후의

문인화에는 시(詩) 형식의 화제(畵題)를 곁들여 그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이 때 詩·書·

畫가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인들이 표현 수단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소재는 수묵산수화이다. 그 다음은 매(梅)·난(蘭)·국(菊)·

(竹)의 총칭인 사군자(四君子)이다. 그 이유는 산수화가 예로부터 도(道)를 체현(體現)하는 가장 이상적인

소재로 여겨졌고, 사군자 역시 그 상징성으로 인하여 문인들이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군자를 그리는

구사하는 필획이 서예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였다. 사군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묵포도

(墨葡萄)와 소채(蔬菜)의 스케치 등도 문인화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문인들 중에도 청록산수화나 인물화를

잘 그린 사람도 있어서 그들이 그린 소재나 구사한 기법이 제한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故 오주석은 옛 그림 감상의 두 원칙이라며 첫째로는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그 다음으로는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했다. 어떤 눈으로 보고 어떤 마음으로 느껴야 할까?

 

사대부는 벼슬에 오른 관료나 관료 출신으로 옛 중국과 우리나라의 상류계층이자 지배계급이지만 문인은

당시의 일반적 지식층 전반을 가리킨다. 이들은 오늘날과 같이 시, 소설, 비평 등의 창작 작업에 종사하는

전문적인 문인이 아니라, 文과 史와 哲을 통하여 쌓은 지성을 바탕으로 굴원과 백이숙제의 기개를 칭송하며

군자(君子)를 지향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가운데 왕도정치 실현에 직접 몸담고 싶어 하는 지식인인 동시에 종종

자신을 알아주지도 않고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세상에 좌절하여 “현명한 사람은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을

피하고 어지러운 지역을 피하고 무례한 사람을 피하고 그릇된 말을 하는 사람을 피한다, 세상을 떠나 숨어산

사람이 일곱 사람 있었다“는 공자의 말씀을 좇아 세속을 떠나 산수에 은일(隱逸)하며 자적(自適)하는 삶을

꿈꾸는 고사(高士) 지망생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때때로 시나 글씨, 그림을 통해 마음속 생각과 뜻을 나타냈다.

누구에게 보이고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 때 그런 흥이 나서 한 것이다. 문인화는 그런 그림이다.

 

문인화는 첫째로, 회화적 관점에서 그림이 잘 되고 못 되고를 따지는 그림이 아니다. 형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초에 사물을 형상 그대로 정밀하게 그릴 의도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형사에 필요한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의 세부 묘사에 치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교가 있어도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그림이다. 따라서 문인화에서 회화적 기교를 논하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일이다. <세한도>에 갈필이 거론되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의를 전달하는 방법의 하나로 효과적이었다는 얘기지 갈필 사용의 능숙함이나 서투름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예찬의 경우 뒤로 갈수록 그의 화법이 간일해진 것을 두고 예찬이 다작(多作)을 해서

나중에는 성의 없는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도 있는데 문인화의 특징을 모르고 하는 소리로 들린다. 붓질을 덜

하고 대충 그린 듯 하여도 뜻하는 바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더 높은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은 노장사상의 중요한 심미론의 하나인 동시에 전통적으로

중국예술 전반에서 인위적 기교미(技巧美)를 최대한 배제하고 무위자연의 졸박미(拙樸美)를 중시하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문인화는 그런 철학이 구현된 것이다. 추사는 만년에 ‘불계공졸(不計工拙)’과 ‘수졸산방(守拙

山房)’ 같은 문구를 전각하여 낙관에 사용했다. ‘공교함과 졸함(잘 되고 못 됨)을 따지지 않는다’ ‘졸(拙)한 것을

지키는 산방’이라는 뜻이다. 추사의 마지막 글씨였던 <板殿>은 공교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추사가 평생동안

글씨에 쌓은 공력을 졸(拙)함에 감추어낸 것이란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형사를 추구하지 않는 것, 졸하다는 것이 서투른 붓을 놀려 사물을 대충 그려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국의 회화는 선을 기초로 한다는 점에서 중국 서예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중국화에 있어 선은 사물의 윤곽을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그 감정, 생각, 관념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다양한 주제와 목적을 위해 다양한 선이

이용되는데, 문인들은 기본적으로 서예의 필법에 숙련된 사람들이고 그림은 서예의 연장선상에서 그리는

것이므로 필획 하나하나에 그리는 사람의 뜻과 인격이 표출된다는 생각으로 붓을 들었다.

 

문인화가 처음부터 형사를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형사(形似), 즉 그리는 대상과 닮게

그리면서 화가의 뜻을 표출하여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인물의 고매한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

해낸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방법에 대하여 동진(東晉)의 고개지는 ‘이형사신(以形寫神)’, 즉 형체를

제대로 묘사함으로써 정신을 표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전신(傳神)은 형사(形似)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600년 후의 소식(蘇軾)과 문동의 때까지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소식의 절친한 친구이자 북송 제일의 묵죽화가 문동(文同)은 대나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잘 포착하면서도 고아(古雅)한 화가의 인품을 그대로 나타내어 사의(寫意)에 성공한 대표적 그림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다 원대(元代)로 내려가면서 형사(形似)를 이루지 않아도 사의(寫意)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즉 예찬(倪瓚)은 자신의 묵죽에 제(題)하기를 이 묵죽화가 대나무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은

변명하지 않을 것이며 이 그림은 자신의 흉중(胸中)의 일기(逸氣: 세속에서 벗어난 기상)를 표출한 것뿐이라고

하였다.

문인화는 이때부터 형사와 사의가 분리되기 시작된 것으로 보고있다.

 

[문동(文同) <묵죽도(墨竹圖)>]

 

[예찬(倪瓚) <묵죽도(墨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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