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양화’ 하면 막연히 韓·中·日 세 나라의 그림 그 중에서도 산수화를 떠올리며 당연히 중국과 일본도 같은 개념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과연 중국이나 일본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동양화’라는 말은 1888년 일본 경도사립예술대학의 전신인 경도부(京都府) 화학교(畵學校) 2과인 ‘서양화’와
대칭하여 중국 그림을 뜻하는 ‘한화(漢畵)’의 남종, 북종과 일본그림을 가리키는 동종(東宗) 3과를 총칭하는
의미로 1과를 지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탄생한 동양화라는 명칭이 1922년에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선화와 일본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채택되어 지금까지 ‘동양의 그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양화’는 일본이 중국의 전통적인 그림과 그 영향을 받은 자신들의 전통적
그림을 통칭하는 말로 처음 쓴 것으로 여기에 우리나라 그림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일제강점기에 잠깐
우리나라 그림까지 포함시키기는 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선 땅에서만 국한된 경우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그림을 일본화라고 부른다. 우리는 은연중 전통 미술에 있어서도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정작 일본은 중국의 당과 송나라의 영향을 받고 그 후 다시 서양의 영향을 받는
과정을 거쳐 그것을 자기네 방식으로 소화하여 일본화를 발전시켜온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하다. 옛 그림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유산을 뺐어가고 훔쳐갔어도 자신들의 문화발전 논의에 우리나라의 영향력은 거의 없거나
아주 미미한 정도로 여겨 거의 안중에 없는 모양새다. 따지고 보면 우리도 동양화에 일본그림을 포함한다지만
일본그림에 별 관심도 없고 별반 아는 것도 없는 것을 보면 피차 우습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가쓰시카 호쿠사이 <冨嶽三十六景 神奈川沖浪裏>2, 잉크, 26cm x 38cm , 1829년–1832년 제작, 동경국립박물관]
그러면 중국은 어떨까? 중국은 예로부터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고 살아온 나라다. 자기들 밖의 세상은 다 변방의 오랑캐로 여겨 사방을 돌아가며 타민족과 국가를 북적(北狄), 서융(西戎), 남만(南蠻), 동이(東夷)라 하였고, 흉노(匈奴),선비(鮮卑), 갈(羯), 저(氐), 강(羌) 등은 다섯 오랑캐라는 의미의 오호(五胡)라 불렀다.
그러니 저들은 자신들이 동양(東洋)이라는 범주에 속해있다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 고대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양은 동쪽바다이고 서양은 서쪽바다라는 의미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대략 필리핀군도 방면을 동양, 그 서쪽과 인도양 방면을 서양이라고 부른 것 같다고 했으니 그들에게 동양이라는 개념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동양화라고 부를 리가 없다. 설혹 중국인들이 동양과 서양에 대한 보편적 개념을 받아 들인다 치더라도 한국과 일본에서 말하는 '동양화’란 모두 자신들의 영향을 받은 아류인데 굳이 오랑캐들의 그림과 섞어 자신들의 그림을 동양화라고 부를 이유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그림을 국화(國畵) 또는 중국화라고 부른다 한다.
우리도 1970년경에 이르러 동양화라는 용어가 우리 전통 회화의 독자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타율적으로 붙여진 명칭이라는 비난이 일면서 동양화 대신 ‘한국화’로 부르자는 주장이 대두되었고 그 결과 1982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한국화'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1983년 개정된 새 미술 교과서에도 동양화 대신 한국화로 표기하게 되었다. 다만 서양화단에서는 서양화도 한국적 그림으로 정착되어 있는 단계에서 전통 회화만을 통칭하여 한국화로 부르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 그림은 조선 말기까지 글씨와 함께 묶어 서화(書畵)로 불렸다. 워낙 험한 일을 많이 당했던 나라인지라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전해지는 말만 있지 실제 작품은 거의 없다.
통일신라시대는 자료가 없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다는 솔거(率居)와 같은 화가들의 이름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회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고, ‘고려 초기에는 송나라로 보낸 <저색산수도권>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듯이 청록산수풍의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짐작’ 해야 하는 형편이다.
고려시대에는 도화원의 직업적 전문화가인 화원에 의한 그림과 왕공사대부 및 승려들이 즐겨 그림을 그렸다고는 하나 자료가 없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현존하는 고려의 회화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의 잔편과 이제현의 <기마도강도(騎馬渡江圖)> 등 불과 수 점 뿐이다.
[이제현, <기마도강도>3, 비단에 채색, 38.8 x 43.9cm, 국립중앙박물관]
산수화가 독립회화로 그려진 것은 고려시대 부터로, 11세기 후반경 곽희 등의 화적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수묵풍의 이상산수화로 바뀌어갔고, 후기에 이르러 문사들이 친자연적, 탈속적 취향과 밀착되어 산수화가 송대와 원대(元代)의 화풍을 반영하며 전개되었다. 실경산수화는 12세기경을 전후하여 대두되었다고는 하나, 그 수준에 대한 평가는 역시 전하는 말에 의한 짐작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다.
불교가 건국이념이었던 고려에서는 왕실이나 귀족이 시주하여 불화가 많이 제작되어 그나마 남아있는 불화를 통하여 고려시대 회화의 미를 가늠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경전 내용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상징적인 그림으로 그려내어 회화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4, 보물 제1426호,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화론에 대한 자료는 매우 영세하여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고려시대 사대부들은 중국과의 문화 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화론서를 접하게 되었고, 중국 문인화 이론의 전개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 고려시대의 화론 전개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곽약허의 <도화견문지>5 고려
국조(國條)에는 고려와 북송과의 회화 교류에 관한 구체적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고, 장언원의 <역대명화기>
가 송나라의 ≪태평어람 太平御覽≫에 수록된 상태로 12세기 중 고려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宋의 문인화가들의 그림도 12세기 후반기 내지 13세기 초에는 사대부 화가들에게 잘 알려졌을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 사대부들의 문집 중 회화에 관계되는 글들이 수록된 대표적인 것들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안축의 <근재집(謹齋集)> 그리고 이색의 <목은집> 등이다.
문집에는 당시의 사대부 묵죽화가들의 그림에 화찬, 제시(題詩) 등이 있어, 당시의 사대부 화가들이 그림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나 중국 회화사, 또는 화론에 대한 이들의 지식을 단편적이나마 알아볼 수 있다.
소식과 문동의 묵죽화와 문인화론이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의 회화 평론에는 형사보다는 전신(傳神)6을
중요시하고 었으며, 문인화의 가치 기준(자연, 평담, 천진 등)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회화의 美(지순임 지음, 2012, 미술문화), 두산백과,
들어가서 보는 그림 동양화(김상엽 지음, 2012, 루비박스) 등을 참조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 794년~1185)는 794년 간무 천황이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것으로부터, 가마쿠라 막부의 설립까지의 약 390년간을 지칭하는 일본역사의 시대구분의 하나로 미술에서도 국풍화가 일어나 중국적인 기법으로 일본의 풍경을 그리는 '야마토에(大和絵)'가 등장했다. 일본의 4계절과 명소를 주제로 한 야마토에는 헤이안 시대의 궁정과 병풍 등에 은은한 곡선과 색채로 그리며 일본 특유의 미술양식으로 발전한다. ‘야마토에(大和繪 : 倭繪)’는 자연을 치밀하게 묘사한다기보다는 선과 제한된 안료로 간략하게 표현하기 위해 고도의 기교와 세련된 조형감각을 필요로 했다. 선(線)이 일본회화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의의는 ‘야마토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오랜 동양화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선의 아름다움에 광택(光澤)을 중시하여 화면에 살린 것이 ‘야마토에’라 할 수 있다.(두산백과 등) [본문으로]
-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부터 에도(江戶)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의 한 양식인 우키요에(浮世絵)의 대표작 중 하나 [본문으로]
- 기마도강도는 불화를 제외했을 때 현존하는 한국화 중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으로]
- 조성연대와 작가가 명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변·퇴색과 수리 및 덧그린 흔적이 엿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 소재의 1323년작 서구방 필 수월관음도를 위시한 고려시대 14세기 관세음보살도들과 비교해 보면 마치 한 본을 사용하기라도 한 듯 구도와 인물의 형태가 거의 같고, 고려불화의 특징적인 화사한 색채와 세련되고 우아한 선을 구사한 인물 묘사 등 세부묘사에 있어서도 서로 유사한 점이 엿보여 예술성 높은 동일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음백과) [본문으로]
- 곽약허 (郭若虛)의 본명은 곽사(郭思)이며 약허(若虛)는 자(字)이다. 곽희의 아들로 중국 송나라 때의 화가이자 ·회화평론가이다. 그의 생몰년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인종(仁宗:재위 1022∼1063)과 신종(神宗:재위 1067∼1085) 때 살았던 사람이다. 잡화(雜畵)에 능하였으나 화가보다는 평론가로서 더 알려졌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 전신(傳神) :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준말로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外形)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의 고매한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화론. ‘전신사조’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동진(東晋)의 인물화가 고개지(顧愷之)로 그는 전신과 유사한 의미로 ‘신사(神似)’, 즉 ‘정신이 닮음’이라는 말로 초상화에서 그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세계를 제대로 표출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고개지는 전신(傳神)이나 신사(神似)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에 관하여 ‘이형사신(以形寫神)’, 즉 형체를 제대로 묘사함으로써 정신을 표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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