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화풍이 더욱 뚜렷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후기의 회화는 영조와 정조의 재위 연간을 전후한 시대를 의미한다. 영·정조 시대에 민족 자아의식의 발현을 토대로 새로운 학풍을 진작시키던 실학의 발흥은 정선에 의해 발전된 진경산수(眞景山水),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유행된 풍속화에 영향을 미쳐 특히 한국적인 특색이 두드러졌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절파화풍이 쇠퇴하고 남종문인화풍이 크게 유행하는 한편 청나라를 통해 서양화법이 전래되는 등, 전과는 다른 경향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힝 이 시대에는 서민들 사이에서 민화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정선의 진경산수는 <금강전도>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등에서 보듯이 실제로 우리나라에 있는 산천을 새로운 화풍을 구사하여 그림으로써 후대의 화원과 민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심사정은 대담한 필선과 고아한 담채를 혼합한 우수한 기법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러한 정선파의 산수화들은 우리의 국토에 실재하는 산천을 묘사함으로써 종전의 산수화와는 현저하게 다른 면모를 보였다.
서양화법은 중국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어 김두량, 박제가(朴齊家) 등의 18세기 화가들에 의해 수용되어, 이후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거리 그림에도 반영되었다.
서민들의 생활의 전경을 주로 해학적으로 묘사한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와 더불어 한량과 기녀를 등장시킨 신윤복의 풍속화와 <미인도>등은 풍속화에 더욱 조선적인 특색을 갖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를 풍미했던 동기창의 남북종화론(南北宗畫論)의 영향으로 조선 초기에 비하여 좀 더 많은 문인화가들이 나왔으며 이와 병행하여 이름 그대로 화론서 다운 화론서가 집필되기 시작하였다. 17, 18세기의 문인화가들은 그림에서 사의성(寫意性)이나 전신뿐만 아니라 사생을 통한 외형의 사실적이고 정확한 묘사를 중요시하였다. 이와 같은 이론은 윤두서의 <자화상>이나 <소과도(蔬果圖)>등에서 보여 준 관찰에 의한 철저한 사실적 묘사나 조영석의 사생화첩인 <사제첩(麝臍帖)>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를 뒷받침해주어 더욱 의의가 크다.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과는 대조적으로, 조영석은 그림의 효용론을 옹호하며 군자가 마땅히 유념하여야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당시의 문인화가들이 가졌던 그림에 대한 변화된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17세기 초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고씨화보(顧氏畫譜)> <당시화보(唐詩畫譜)> <개자원화전> 등 중국 화보를 통하여,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윤두서, 조영석, 강세황, 신위, 조희,·전기(田琦) 등 많은 문인화가들이 이들 중국 화보에 수록된 역대 중국 명화가들의 구도와 필법을 기초로 하면서 조금씩 개성적 표현을 가한 그림들을 다수 남겼다.
17세기 말기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윤두서(尹斗緖)의 유고 ≪기졸(記拙)≫ 중의 <화평>, 남태응의 ≪청죽만록( 靑竹漫錄)≫ 중의 <청죽화사(靑竹畫史)>를 비롯하여 조영석, 이하곤, 이긍익, 강세황, 이인상, 남공철, 서유구, 신위, 조희룡 등이 화론을 남겼으며 김정희(金正喜)도 <서화론>을 남겼다. 내용면에서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화가들에 관한 촌평, 또는 전기로부터 그들이 보았던 중국 서화들에 관한 의견, 중국 화론서에서 발췌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하지만 독창적이거나 걸출한 화론은 따로 없었다.
윤두서의 <화평>에는 조선 초기 안견(安堅)으로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의 20명의 화가에 대한 평과 소식·조맹부 등 중국 화가에 관한 평이 있다. 그는 조선시대 화가들을 대개 안견을 기준으로 하여 평하고 있다. <화평>보다 좀 더 체계적인 화론과 화사에 관한 저술인 <청죽화사>는 안견으로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화가들을 촌평하였다. <청죽화사>는 화사(畵史), 삼화가유평(三畵家喩評), 화사보록(畵史補錄) 상하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삼화가유평>에서 김명국, 윤두서, 이징(李澄) 등 세 화가를 각각 신품, 묘품, 법품(法品)으로 품등하여 이들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비교하고 논하였다. 안목도 높지만 문장도 훌륭하다는 평을 받는다.
“문장가에 삼품이 있는데,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 그것이다. 이것을 화가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김명국은 신품에 가깝고, 이징은 법품에 가깝고, 윤두서는 묘품에 가깝다. 이를 학문에 비유하자면 김명국은
태어나면서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이고,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學而知之), 이징은 노력해서 아는
곤이지지(困而知之)이다. 그러나 이루어지면 매한가지이다. 또 이것을 서예가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김명국은
봉래 양사언 류(類)이고, 이징은 석봉 한호 류, 윤두서는 안평대군 이용 류에 속한다. 김명국의 폐단은 거친 데
있고, 이징의 폐단은 속된 데 있으며, 윤두서의 폐단은 작음에 있다. 작은 것은 크게 할 수 있고, 거친 것은
정밀하게 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치기 힘들다. 김명국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윤두서는 배울 수 있으나
이루기 힘들고, 이징은 배울 수 있고 또한 가능하다.....
김명국은 그 재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그 기술을 끝까지 구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비록 신품이라도 거친
자취를 가리지 못했다. 윤두서는 그 재주를 극진히 다했고, 그 기술을 끝까지 다하였다. 따라서 묘(妙)하기는
하나 난숙함이 조금 모자랐다. 이징은 이미 재주를 극진히 다했고, 그 기술도 극진히 했으며 또 난숙했다.
그러나 법도의 밖에서 논할 그 무엇이 없었다....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라간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 아님이 없었다..”
한국적인 화풍이 크게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면, 추사 김정희와 그의 제자 화가들에 의해 남종문인화가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고 앞 시대의 토속적인 진경산수나 풍속화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남종화법의 토착화는 한국 근대 및 현대의 수묵화가 남종화 일변도의 조류를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시기에 김정희의 제자로서 호남화단의 기초를 다진 소치 허련과 함께 오원 장승업이 배출되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보다 산수, 인물, 영모, 화조, 화훼 등 감상을 위한 다양한 주제의 그림과 각종 기록화(記錄畵) 등을 포함하는 일반 정통회화는 물론, 서민 대중을 위한 민화, 그리고 판화와 불교회화 등 더욱 다양해졌고 또한 한국화 현상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러한 한국화 현상은 조선 초기부터 구조, 공간처리, 준법, 필묵법, 수지법 등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더불어 송(宋), 원, 명, 청(淸)의 중국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으며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회화 500년은 중국풍의 선호와 중국화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 결과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에 의하여 구축된 한국적인 민족양식이 폭넓게 발전하지 못한 것은 크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안목(유홍준, 눌와, 2017), 아트앤팁닷컴(artntip.com), 미술대사전(한국사전연구사),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의 미술가(유휘준, 사회평론) 등을 참조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 한 손에 지팡이를 비스듬히 들고 건을 쓴 채 수의를 입고 허적허적 걸어가고 있다. 차림으로 보아 죽음을 향해 가는 뒷모습 같다. 유홍준은 은사도를 연담(김명국)이 죽음을 암시해 그린 그림이라며 '죽음의 자화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연세대 철학과 이광호 교수가 화제를 분석함으로써 그런 주장을 뒷받침했다. 자신의 유언을 그림으로 그려서 남겼다는 얘기가 된다. 화가라면 저마다 자화상을 그렸지만 동서고금 죽음의 자화상은 연담이 유일할 것이다. 화제 :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니(將無能作有), 그림으로 모습을 그렸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을 덧붙이랴(畵貌豈傳言), 세상에 시인이 많고도 많다지만(世上多騷客), 그 누가 흩어진 나의 영혼을 불러주리오(誰招己散魂).' (변상섭의 그림보기, 대전일보) [본문으로]
- 이금산수화(泥金山水畵)는 그림바탕을 자주색이나 감색(紺色, 어두운 남색) 등의 어두운 색으로 염색한 뒤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보색관계인 이금(泥金)으로 그린 산수화를 의미한다. 이금은 금(金)을 바른다(泥)는 뜻으로 금니(金泥)라고도 부르는데 매우 고운 금박가루인 금분(金粉)을 아교풀에 개어 만든 물감이다. 이금산수화를 그린 화가로는 이경윤(1545-1611)과 이영윤(1561-?) 형제, 윤두서(1668-1715), 강세황(1713-1791) 등이다. 이징(李澄, 1581-?)은 이경윤의 아들이었고 집안이 성종의 후손으로 종실 가문이었음에도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도화서 화원이 되는 이례적인 경력을 가졌다. (안휘준, 한국의 미술가, 사회평론, 200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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