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한국화(조선 전기/중기)

從心所欲 2018. 8. 21. 17:11

유학(儒學)을 기조로 한 조선시대는 불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의 문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조선시대를 시종일관 지배했던 억불숭유정책은 당시의 문화를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소박한 성격의 것으로 발전하게 했다. 이 점은 회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의 불교적이고 귀족적인

성격을 탈피하여 사찰 중심의 건축 미술은 궁궐 중심으로, 불교 중심의 회화는 중국의 북종화 취향을 거친 뒤

남종화의 담담한 화풍으로 변모되었다. 아울러 고려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승려 화가들의 활동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전기는 대체로 조선왕조의 성립으로부터 16세기 초엽인 중종(中宗) 연간까지를 의미한다. 이 시기의

회화는 송·원(宋·元)의 화풍이 그대로 잔존하여 이른바 북종화(北宗畵)가 성행하는 경향을 보이며 북종화

계통의 수묵산수(水墨山水)가 발달했다. 이성(李成)과 곽희(郭熙) 등으로 대표되는 북종화법을 주축으로

하면서 또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서 시작된 남송의 원체화법이 조선시대 초기 회화의 범본(範本)이

되었다. 화단의 주류는 도화서원(圖畵署員)1, 즉 화사(畵師)들이 쥐고 있었고 그들은 대체로 궁정의 요구에

따르는 장식적이고 현실적인 화풍으로 흘러 북종화의 경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세종(世宗)이나, 문종(文宗), 성종(成宗)같은 왕들도 그림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일반 사대부들의 의식은

대체적으로 그림을 천기(賤技)나 여기(餘技)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15세기 후반 성종 때에 왕이 회사(繪事)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며 사대부들은 그림을 말기(末技), 또는 말예(末藝)라고 하여 중국과 고려의 군주 중

그림에 탐닉하여 국운의 쇠함을 초래하였던 예를 들어가며 왕을 비난했다는 것으로 보아 사대부 자신들은 그

그리는 것을 묵희(墨戱)2 정도 이외에는 그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듯하다. 사대부 강희안(姜希顔)이

자신이 후대에 그림으로 명성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작품을 모두 없애 버렸다는 이야기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안평대군이 최대의 중국화 소장자이자 안견의 후원자였던 사실에서 보듯 사대부(士大夫)들은

중국 명적(名蹟)을 수장(收藏)하고 감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성현(成俔),

김일손(金馹孫), 김안로(金安老) 같은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은 그들의 문집에 많은 제화시(題畫詩)나 화찬을

남겼는데, 시·서·화 삼절(三絶)을 높이 평가한 경우가 많다. 그런 가운데 강희안의 동생인 강희맹이 사대부의

생활 속에서 그림이 여기(餘技) 이상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구실을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즉, 그는 “군자가……책상에 앉아 종이에 붓을 날려 만물을 정관(靜觀)할 때에 마음으로는 터럭만 한 것도 능히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손으로 그림을 그릴 때 내 마음도 극치에 도달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초목과 화훼는 눈으로

그 진수를 보아 마음으로 얻는 것이요, 마음에 얻은 진수를 손으로 그려 내는 것이니, 한 번 그림이 신통하게 되면

한 번 나의 정신(마음)도 신통하게 되며, 한 번 그림이 정신을 신통하게 되면 한번 마음도 신묘하게 된다.”고

하여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그림으로 표현하면, 역(逆)으로 그림이 정신을 신통하게 하고

마음을 신묘의 경지로 이끌어 준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수는 적지만 이때에도 사대부 출신의 여기화가(餘技畵家)들이 있었다. 절파와 남송 원체화풍의 고일한 작풍을

보인 강희안(姜希顔)과 종실 출신으로 영모화(翎毛畵)에 능했던 이암(李巖) 등이다. 화원화가로는 북송(北宋)

곽희(郭熙)계통의 산수화를 수용하고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로 회화의 경지를 끌어올린 안견(安堅)과

남송 원체화풍을 받아들여 뛰어난 회화적 경지를 발판으로 노비에서 도화원 화원으로 신분상승을 이룬 이상좌

(李上佐)가 지금까지 이름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고려시대의 회화와 그 시대에 전래되어 축적되었던 중국

역대의 화풍과, 명(明)으로부터 새롭게 수용한 화풍 등을 토대로 중국이나 일본의 회화와는 다른 양식을 형성하였다.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図)3> 세로 38.7 cm x 가로 106.5cm, 絹本淡彩, 일본 덴리(天理)大学附属 天理図書館 소장]

 

[이암(李巖), <모견도(母犬圖)> 4 . 종이에 수묵담채, 73.2 × 42.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기의 회화 역시 임진왜란, 병자호란등의 대란과 격렬한 당쟁이 계속되던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였다. 안견파 화풍을 비롯한 초기의 화풍들이 계승 지속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절파계의 화풍이

가장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 중기의 가장 개성적인 화가를 들자면 김명국(金明國)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그림은 중국에서 광태사학(狂態邪學)5적이라 비판을 받는 절파 후기의 호방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달마도(達磨圖)>에서 볼 수 있듯이 선화(禪畵)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이 시대에 김시(金禔)와 그의 손자 김식

(金埴)은 소 그림을 잘 그렸으며, 김식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절파화풍의 정착에 영향을 미친 이경윤(李慶胤)

은 산수 인물화에, 그리고 조속(趙涑)과 조지운(趙之耘) 부자는 수묵화조에 뛰어났다.

묵죽(墨竹), 묵매(墨梅), 묵포도(墨葡萄) 등에서 이정(李霆), 어몽룡(魚夢龍), 황집중(黃執中), 허목(許穆)

등의 문인화가들이 배출되면서 종래에 보기 드물었던 새로운 한국적 특징을 발전시켰다.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부들이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많이 그려진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산수화보다 비교적

그리기 간단했기 때문에 선비들이 많이 그리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가

전래되어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연담(蓮潭) 김명국, <달마도(達磨圖)> 종이에 수묵, 83 x 58.2 cm, 국립중앙박물관]

 

[傳 이경윤,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16세기 후반, 絹本淡彩, 91.1 × 59.5cm, 국립중앙박물관]

 

[김시(金禔),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가로 111cm x 세로 46cm, 보물 제783호, 삼성미술관 리움]

 

[김식(金埴), <고목우도(枯木牛圖)>, 17세기중엽 경, 51.8 x 90,3cm, 수묵채색화 지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조속, <고매서작>, 종이에 먹, 100 × 55.5cm, 간송미술관 ]

 

[어몽룡, <월매도>, 비단에 먹, 119.2 × 53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글은 미술대사전(한국사전연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아트앤팁닷컴 (artntip.com),

두산백과 등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1. 도화서(圖畵署) : 초기에는 도화원(圖畵院)으로 불려진 조선시대의 화원(畵院)이다. 건국 당초에 조선왕조의 관제가 대체로 고려의 전통을 계승한 점으로 보아 고려 말의 도화원제도가 그대로 조선에 이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성종(成宗) 때에 화원의 취재(取才)에 대(竹) 그림을 1등, 산수를 2등, 인물영모(人物翎毛)를 3등, 화초(花草)를 4등으로 친 것은 국초(國初) 이래의 규정으로 보이며 따라서 사인 취향(士人趣向)이 명백하다. 그리고 시대가 내려갈수록 도화서는 몇 개의 화원 집안이 대를 이어 독점하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위키문헌) [본문으로]
  2. 묵희(墨戱) : ‘묵에 의한 놀이’라는 뜻으로 문인이 전문이 아닌 취미로 수묵화를 그리는 것을 말한다. 희묵(戱墨), 희필, 희작이라고도 한다. 기법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제작태도를 말하는데 북송시대 문동(文同)의 묵죽(墨竹)에서 시작하여, 소식의 고목죽석, 미불(米芾)과 미우인(米友仁)의 운산도(雲山圖) 등이 대표적이다. 본래 특정의 화제나 수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지만, 화제로서는 서예술(書藝術)에 가까운 묵죽이 주이며, 기술에 구애되지 않는 수묵의 수법을 통해 형체의 닮음보다 사물의 내용이나 정신을 중시하였다. 또한 재질(材質)에는 손쉬운 묵, 필, 지(紙)가 주가 된다. 묵희의 전통은 결과적으로 후에 우리나라 문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술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본문으로]
  3. '몽유도원도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9년 5월 27일에 우리나라 중요문화재 제1152호로 지정되었다. 그랬는데 어떤 연유인지 지금 일본의 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1447년 4월 20일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의 꿈을 꾸었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3일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구유도(狗乳圖)’라고도 한다. 이암(李巖, 1499 ~ ?)은 조선왕조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증손이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5. 광태사학(狂態邪學) : 절파 화풍은 일종의 원체화(院體畵)풍이어서 문인화가들로부터 비하되었다. 그러다 명말(明末)에 이르러서는 절파 후기양식을 광태사학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절파 화가의 극단적인 필묵의 조방함에 대한 비난이다. 이러한 비판은 송대(宋代) 이후 전개되어 온 문인화론(文人畵論)과 명말 이후 성립된 남북종론(南北宗論)의 영향이 깊다.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