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宋)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후에 황실에서 오대의 화원제도를 계승하여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을 설립하였다. 이 시대에 중국의 산수화가 많은 발전을 보였다. '육조의 서(書), 당의 시(詩), 송의 화(畵)'라는 말이 있듯이 송대는 중국회화가 만개한 시기이다.
송대(宋代)에는 화론(畵論)에도 빼어난 것이 많이 나왔다. 특히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삼원(三遠)을 이론적으로 확립시킨 곽희(郭熙)1와 그의 아들 곽사(郭思)의 공저(共著)인 「임천고치(林泉高致)」는 북송(北宋)의 대표적인 산수화론서로서, 후대의 작화(作畵)나 화론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청(淸)의 「사고전서四庫全書」2에는 여섯 편으로 나뉘어 실려 있는데, <산수훈(山水訓)> <화의(畵意)> <화결(畵訣)> <화제(畵題)> <화격습유(畵格拾遺)> <화기(畵記)>로 구성되었다.
앞의 네 편은 곽희가 지었고 뒤의 두 편은 곽사가 편찬하여 1117년경 그 첫 벌이 완성되었다고 한다3.
이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이 <산수훈>이다. 곽희는 <산수훈>에서 산수화의 본의(本意)가 "임천(산림과 샘, 또는 은거지)'의 뜻은 세속을 초월한 고답(高踏)의 경지를 펼침으로써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남북조시대 문인들은 산속에 은둔한 선비들을 가리켜 '산수를 좋아한 처사', '속세를 초월한 유유자적함 속에 국화와 난초의 향기가 스미는 삶'이라고 추앙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 당말 후오대(後五代) 때의 화가 형호(荊浩)에게까지도 이어졌다. 형호(荊浩)는 은일자(隱逸者)의 정신해방(精神解放)의 실천 수단으로 임목(林木) 산수(山水)를 중시(重視)하였다. 이는 현실을 아예 초월하여 자연에 머물며 유유자적하는 도가(道家)적인 자연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곽희(郭熙)는 자연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는 유가(儒家)적 자연관을 바탕으로 산수화(山水畵)의 가치를 은일자(隱逸者)의 각도에서 벗어나 일반 사대부(士大夫)의 입장에서 이를 정의하려 하였다. 곽희는 <산수훈(山水訓)> 첫머리에 산수화의 가치를 이렇게 피력했다.
【군자(君子)가 무릇 산수(山水)를 사랑하는 까닭은 언제나 세상을 피하여 은거할 수 있는 곳에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며 물과 돌로 이루어진 자연의 경치를 언제나 즐기는 바이기 때문이며 어부나 나무꾼과 같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지내면서 언제나 아무런 속박을 받지 않고 마음껏 즐기려고 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들이 계속 세속(世俗)을 등지고 아득히 물러나 높은 곳을 거닐며 일신(一身)만을 깨끗하게 하고 꽃다운 이름만 남기려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서 세속(世俗)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연하와 구름 속의 선인이나 성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면서 마음으로는 늘 임천(林泉)의 뜻이나,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벗 삼기를 원하나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묘수(妙手)를 얻어, 생생하게 이를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동양에서 산수는 이상향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군자(君子)는 ‘나아가고 물러남(出處)’이 오직
절개와 의리가 어떠한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節義斯係] 직접 산수에 몸담을 수 없었다. 이에 곽희는 산수화로
그 욕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즉, 그림이 방을 나서지 않고도 앉은 채로 샘과 골짜기를 접할 수
있고[不下堂筵坐窮泉壑], 원숭이 소리와 새의 지저귐이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 하고 [聲鳥啼 依約在耳],
산과 물빛이 황홀하게 눈길을 사로잡게 하니[山光水色滉瀁奪目], 이것이 어찌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무릇 산수(山水)를 그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본뜻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산수를 그리는 까닭은 산수를 마주했을 때 일어난 '정신(神觀)'과
'풍취(淸風)'를 펴내고, 산수를 집안으로 옮겨와 “앉아서 언제든지 두루 즐기기 위해서(坐窮)”라는 것이다.
곽희는 또한 “이것을 주(主)로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이에 임(臨)한다면, 어찌 정신으로
관조하는 것을 거칠고 뒤섞이게 하지 않으며, 청풍(淸風)을 혼탁하게 하지 않겠는가? 산수를 그리는 데는
체(體)가 있다. 펼쳐서 흩어져 넓은 그림이 되더라도 남는 것(餘)이 없어야 하고 고르고 줄여서 소폭(小幅)
으로 그리더라도 모자라지 않아야 한다. 산수를 보는 데도 역시 체(體)가 있으니, 임천지심(林泉之心)으로
임(臨)하면 가치가 높고, 교만하고 사치한 눈으로 임하면 가치가 낮아진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곽희는 모든 산수가 화재(畵材)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밝혔다.
【천(千)리에 뻗친 산이라도 그 기이함을 다 갖출 수는 없다. 만(萬)리를 흐르는 물인들 어찌 그 빼어남을 다 갖출
수 있겠는가? 태항산(太行山)이 화하(華夏)지방을 베고 있지만 그 진면목은 임려(林慮)산이요. 태산(泰山)이
제(齊)와 노(魯) 일대를 점하고 있지만 가장 뛰어난 것은 용암(龍巖)산이니, 만약 그것을 한결 같이 모두
그려낸다면 지도(地圖)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산수화가 지도와 다른 이유는 산수의 정수(精粹)를 취해 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순수하지만, 여기에도 품격과 위계가 존재한다. 당대 사람들은 산수를 논하며 ‘가볼 만한 곳(有可行者)’, ‘구경할 만한 곳(有可望者)’, ‘노닐 만한 곳(有可遊者)’, ‘머물며 살 만한 곳(有可居者)’이 있다고 하였다.
곽희는 이에 대하여 '그림은 무릇 이러한 여러 경계의 표현이 가능함에 이르러야 모두 묘품(妙品)의 경지에 든다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만 가볼 만하고 구경할 만한 곳을 그리는 것이 노닐 만하고 살 만한 곳을 그려 얻는 것보다 못하다[但可行可望 不如可遊可居之爲得]’고 하였다. 즉 머물며 노닐고 싶고, 살고 싶은 산수를 더 우위에 둔 것이다. 곽희의 이런 주장은 실제 자연을 관찰하고 경험한 바에 따른 결과다.
“지금의 산천을 보면 몇백 리에 걸쳐 있는 땅이라 할지라도 노닐고 살 만한 곳은 열에 서넛도 되지 않기[觀今山川地占數百里可遊可居之處十無三四]"때문이라고 했다.
곽희는 산수화를 그리는 과정을 ‘수양한 것을 확충하고, 본 것을 충분히 익히며, 여러 곳을 많이 경험하고 마지막으로 정수를 취하는 것(所取之精粹)’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엄중하게 선별하여 고른 산수는 어떻게 그려내야 할까?
【산은 큰 물체[大物]이다. 그 형상이 솟아 빼어난 듯, 거만한 듯, 조망이 널찍하여 툭 터져 있는 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듯, 다리를 펴고 앉아 있는 듯, 둥그스름하게 큰 듯, 웅장하고 호방한 듯, 정신을 전일하게
한 듯, 엄중한 듯, 눈이 예쁘게 뒤돌아보는 듯, 조회에서 읍하고 있는 듯, 위에 덮개가 있는 듯, 아래에 무엇을
타고 있는 듯, 앞에 의거할 것이 있는 듯, 뒤에 기댈 것이 있는 듯 하게 해야 한다. 또 아래로 조감하면서 마치
무엇에 임해서 보는 듯 하게 해야 하고, (上流人으로서) 아래에서 노닐면서 마치 무엇을 지휘하는 듯 하게
해야 이것이 곧 산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물은 활동하는 사물[活物]이다. 그 형상이 깊고 고요한 듯, 부드럽고 매끄러운 듯, 넓고 넓은 듯, 빙빙 돌아
흐르는 듯, 살찌고 기름진 듯, 용솟음치며 다가오는 듯, 격렬하게 쏘는 듯, 샘이 많은 듯, 끝없이 멀리 흘러가는
듯하게 해야 하고, 또 폭포는 하늘에서 꽂히는 듯 하고, 급히 흘러 부딪히며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이 평화로운 듯, 초목이 무성해서 이들이들한 듯, 안개와 구름이 끼어 빼어나게 고운
듯, 계곡에 햇빛이 비치어 찬란한 듯하면, 이것이 곧 물이 활동하는 모습이다.
산은 물로써 혈맥을 삼고, 덮여 있는 초목으로 모발을 삼으며, 안개와 구름으로써 신채(神彩)를 삼는다. 따라서
산은 물을 얻어야 활기가 있고, 초목을 얻어야 화려하게 되며, 안개와 구름을 얻어야 빼어나게 곱게 된다. 물은
산을 얼굴로 삼고, 정자(亭子)를 (얼굴에서 제일 비중이 큰) 눈썹과 눈으로 삼고,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그 정신(意趣)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물은 산을 얻어야 아름답게 되고, 정자를 얻어야 명쾌하게 되며, 고기 잡고
낚시하는 광경을 얻어야 정신이 넓게 퍼져 환하게 된다. 이것이 산과 물을 (그림에서) 배치하는 양상이다.】
【산에는 높은 산도 있고 낮은 산도 있다. 높은 산은 혈맥인 물줄기가 아래에 있고, 그 모양이 마치 어깨와 다리를
한껏 벌리고 있는 듯하며, 산 밑 언저리는 장대하고 두텁게 퍼졌으며, (그 주위는) 봉우리들과 산굴, 둥그스름한
형세의 작은 언덕들이 감싸 안는 듯이 서로 굽히면서 연결되어 있고, 빛깔이나 경치가 서로 비치고 어울림이
끊임이 없다. 이것이 높은 산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된 높은 산을 일컬어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엎드러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낮은 산은 혈맥인 물줄기가 위에 있고, 그 정상은 반쯤 떨어져 나갔고, 목줄기에 해당하는
부분이 서로 연이어 있고, 산의 하부가 높고 방대하게 크며, 흙산이 울퉁불퉁하고 곧장 아래로 깊게 박혀 있어,
그 깊고 얕음을 측량하기 어렵다. 이것이 얕은 산이다. 고로 이와 같이 된 낮은 산을 일컬어 '지형이 수척하지
않다'고 하고, '새어버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높은 산이면서 외로운 것은 그 몸통이 엎드러질 이치가 있고, 낮은
산이면서 지형이 수척한 것은 산의 신기(神氣)가 새어버리는 이치가 있다.
이것이 산수의 이루어진 본새나 됨됨이이다.
바위란 천지의 뼈에 해당한다. 뼈는 단단하고 깊이 묻히어 얕게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귀히 여긴다. 물이란
천지의 피에 해당한다. 피는 두루 흐르되 엉기거나 막히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산에 안개와 구름이 없다면
마치 봄에 화초가 없는 것과 같다. 산에 구름이 없다면 빼어나지 못하고, 물이 없다면 아름답지 않으며, 길이
없다면 활기가 없고, 나무와 숲이 없다면 생기가 없다. 또 심원(深遠)이 없으면 얕게 보이며, 평원(平遠)이
없으면 가깝게 보이며, 고원(高遠)이 없으면 낮게 보인다.】
곽희는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를 우러러봄[仰視]을 ‘고원(高遠)’이라 하고 산 앞에서 산의 뒤를 엿봄[俯瞰視]을 ‘심원(深遠)’, 가까운 산에서 먼 산에 평행하게 이름[平視]을 ‘평원(平遠)’이라고 했다. 이를 삼원법(三遠法)이라 하여 산수를 관찰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으로 삼았다.
곽희는 시점의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점에서 관조[散點透視]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정된 한 시점에서 포착 가능한 풍경을 객관적으로 완벽하게 모사하는 서양의 투시원근법과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투시원근법에서는 오직 한 가지 시점과 각도만을 취할 수 있으며, 특히 올려다보는 시점과 내려다보는 시점을 동시에 한 화면에 그리는 것은 서양 회화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현대 회화에서는 넓은 시야를 묘사하는 것도 가능해졌지만, 전통적인 서양 회화에서는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시점을 포함하는 삼점투시법도 찾아보기 힘들다. 삼원법으로 치면 평원법만이 쓰이는 셈인데, 서양회화의 시점이 이렇듯 제한되는 이유는 다양한 시점을 평면에 옮겨놓게 되면 반드시 수학적인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엄밀한 수학을 전제하지 않고 체험의 전달을 목적으로 한 곽희의 삼원법은 화가의 단련된 경험과 감각을 바탕으로 다시점 구도를 구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현대의 감상자가 옛 산수화를 처음 대할 때 시선의 덜컥거림에 당황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서양의 일점투시법에 익숙해져 있는 까닭이다.
삼원법은 산수의 관찰법인 동시에 산수화의 감상법이기도 한 것이다. 곽희가 <산수훈> 첫 부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산수는 큰 물체이다. 이미 산골짜기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눈을 굴리며 한참 돌아다니지 않고는 산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가 없다. 반면 서양식 풍경화는 고정된 위치와 각도로 단 한번 찍은 사진과 같아서, 한 시점에서 제한된 화각에 들어온 상(象)만을 전달할 뿐이다.
이 글은 AustE's InterMeDiatE WorlD님의 <임천고지의 공간관> (auste.egloos.com), 박혜영님의 <임천
(林泉)을 ‘그리다’> (경희대학교 대학원보), 雪松 김순구님의 <林泉高致>, 두산백과, 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등의 내용을 참조, 인용, 발췌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곽희(郭熙)의 생몰연도는 1000-1080, 1023 ~ 1085 등으로 소개되나 확실하지 않다. 중국 북송(北宋)의 산수화가로 1068년 궁정에 '화원(畵院)'으로 초빙되어 공부하여 궁정 화가가 되었다. 훗날 한림도화원(翰林圖畫院, 북송시대의 화원) 최고 직위인 “대조(待詔)”에 올랐고 이성(李成)의 평원산수를 바탕으로 범관(范寬)의 산수양식을 취용하여 큰 폭의 대형 산수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본문으로]
- 사고전서(四庫全書) : 건륭제(乾隆帝)가 1741년에 천하의 서(書)를 수집한다는 소(詔)를 내려 1781년에 사고전서 첫 한 벌이 완성된 대형 총서다. 분량은 총 3503종, 7만9337권, 약 230만 페이지로 글자 수는 약 8억 자라고 하며,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의 4부로 분류 편집되었다. (부길만著 출판기획물의 세계사2, 커뮤니케이션북스) [본문으로]
- 현존하는 원본(原本)은 ‘화기(畵記)’를 제외한 5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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