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그 상징성을 이해하기 쉬운 물, 소나무, 사군자 말고도 문인화에는 또 다른 상징성을 갖는 많은
소재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나귀를 타거나 동자를 거느리고 산길을 가는 선비(高士)의 모습은 속세를 떠나
선경(仙境)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거나 낚시를 하는 모습은 때를 기다리는 은둔 고사의 모습을
비유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옛 선비들은 그들이 읽고 공부했던 책을 통하여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공유했기
때문에 이러한 은유와 비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성현의 말씀이나 고사(古事), 시구(詩句) 등을 소
재로 하는 그림들은 화제가 따로 없어도 무슨 사의(寫意)로 그렸는지는 한 눈에 알아보고 바로 그림의
격조를 논할 수 있었다.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보라”는 오주석 선생의 말도 결국
옛 사람이 가졌던 식견을 어느 정도 공유하느냐의 문제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는 현대인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볼품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필법 및 묵법의 종류와 화법의 수준을 다섯 단계로 나눈「논화격(論畵格)」이라는
글까지 남긴, 나름 그림에 대해서는 이론과 실기를 겸한 홍득구라는 분이 남긴 그림이다. 그림의 제목은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이다. 어디서 이런 ‘어부와 초부(나무꾼)가 묻고 대답한다’는 생뚱맞은 그림
제목이 나온 것일까?
어부는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어은(漁隱), 나무꾼은 선인(仙人)으로 비유되며 은일자로 상징되었다. 멀게는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屈原)의「어부사(漁夫辭)」부터 강태공(姜太公)과 엄자릉(嚴子陵)의 고사(故事)1,
도연명의『도화원기』에는 어부가 주제가 되다가 당나라 왕유(701-761)의『도원행桃源行』에서는
“해질녘에 어부와 초부가 물길타고 들어온다(薄暮漁樵乘水入)”는 구절에서 어부와 초부가 같이 등장한다.
이후 북송대의 성리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이 『어초문대(漁樵問對)』에서 어부와 나무꾼이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 우주와 세계의 질서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함으로써 후인들의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소동파(蘇軾 1036~1101)의 전(前)『적벽부(赤壁賦)』에도 “하물며 나와 그대는
강가에서 어부와 초부 노릇을 하며 (況吾與子魚樵於江渚之上) 물고기나 새우를 짝하고 사슴들과 벗함이라
(侶魚蝦而友麋鹿)”는 구절이 있다. 또한 중국의 현악기인 고금(古琴: 칠현금) 연주곡에 ‘어초문답’이란 곡이
있어 지금까지 전하는데, 중국 10대 고전곡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런 연유로 ‘어초문답(漁樵問答)’은
문인화의 오랜 화제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어초문답도’ 중에서는 숙종 때의 화원화가
이명욱의 그림이 널리 알려진 편이다.
아래는 조석진(趙錫晉)의 <소나무>라는 그림이다.
화제는 ‘문 닫아 걸고 책 쓰기를 오랜 세월 하노라니, 심어놓은 소나무 모두 늙어 용 비늘 껍질이 되었구나
(閉門著書數歲月 種松皆作老龍鱗)’라는 글귀다. 얼핏 한 개인의 독백 같은 얘기 같지만 이 또한 문인화의
오랜 화제 중 하나이다. 이 화제에 얽힌 얘기는 크게 두 가지다.
중국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자신의 방문을 굳게 닫고, 문과 창에 칼과 붓을 걸고는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로지 독서와 저술에 30여 년을 전념한 끝에『논형(論衡)』을 완성했다. 왕충의 이러한 저술 방법을 일러
‘폐문저서’(閉門著書·문을 닫고 책을 쓰다)라 부르면서 후세에 학식이 높은 선비들을 칭송하는 수사어로 자주
쓰이게 되었다. 또한 ‘폐문저서’ 혹은 ‘폐문독서’(閉門讀書·문을 닫고 책을 읽다)란 말은 출세할 수 없었던
선비들에 대한 위로의 표현인 동시에, 학자의 참된 모습의 정형으로도 여겨지게 되었다.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시(詩)에 ‘봄날 배적(裴迪)과 더불어 신창리를 지나다 숨어사는 여씨
(呂氏)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春日與裴迪過新昌里訪呂逸人不遇)’라는 시가 있는데 그 마지막에
‘문 닫아 걸고 책 쓰기를 오랜 세월 하노라니(閉戸著書多歳月), 심어놓은 소나무 모두 늙어 용 비늘 껍질이
되었구나(種松皆作老龍鱗)’라는 구절이 나온다. 남종문인화의 개조(開祖)로 추앙받는 왕유인지라 후세의
많은 문인들이 이 구절에서 사의(寫意)를 얻었다. ‘송하독서도’ 같은 제목이 붙은 그림들이 그런 그림들이다.
중국 명대(明代)의 진라(陳裸)라는 인물의 그림에 왕유의 시의(詩意)를 따라 그린 그림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 있다. 같은 사의(寫意)로 그린 그림이다.
이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미술대사전(한국사전연구사) 등의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중국 은나라 말엽, 강상(강태공, 생몰년 미상)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인재를 찾아 떠돌던 서백(주나라 문왕)을 만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평정했다. 엄자릉으로 널리 알려진 엄광(嚴光 기원전 39년 ~ 기원후 41년)은 후한(後漢)을 개국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유수가 황제가 되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훗날 유수가 엄자룡이 보고 싶어 백방으로 찾아 둘이 만났는데 엄자룡은 유수를 황제가 아닌 예전의 친구처럼 대하고 같이 자면서 황제인 유수의 배 위에 발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