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 ~ 1759)이 그림을 그리고 당대의 명필이었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 ∼ 1777)가 글을 써서 만들어진 서화첩(書畵帖)이다. 중국 당(唐)나라 말기의 시인인 사공도(司空圖)가 쓴 시론(詩論)인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의 내용을 주제로 하여 먼저 정선이 그림으로 그리고 이후에 이광사가 시론의 내용을 쓴 묵적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시화첩(詩畵帖)은 시와 그림이 주인공이지만 서화첩은 서예 글씨와 그림이 주인공이다. 물론 시화첩에서도 시를 붓으로 적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이때는 글씨의 품격보다는 시의 품격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서화첩에서는 시 보다는 시를 쓴 글씨의 품격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림과 글씨가 작품의 중심이 되어 서로 대등하게 배치된 서화첩이나 두루마리, 족자를 서화합벽(書畵合璧)이라고 한다. 서예 글씨와 그림이 짝을 이루어 예술작품으로 제작되고 감상된 것은 중국에서 오랜 전통이었지만, ‘합벽(合璧)’이란 말이 서화에 관련된 용어로 사용된 것은 의외로 늦은 시기인 청대(淸代)부터이다.
한자와 서예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부족한 현대인에게는 서예작품보다는 그림이 훨씬 친숙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은연중에 그림이 서예보다 더 중요한 예술분야였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랜 그림의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그림은 오랫동안 그 예술적 창작가치가 시서(詩書)에 비하여 낮게 평가되었다. 시서(詩書)는 사대부의 영역이었지만 그림은 전문 기능인의 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당(唐代)나라 때의 서화론가인 장언원(張彦遠)이 “고대(古代)에는 글씨와 회화가 동체(同體)였다”는 서화일체론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는 “서예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림은 형(形)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당대의 사대부들에게서 커다란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중국은 ‘시서화 삼절(三絶)’이라는 표현으로 문인의 뛰어난 재능을 극찬하는 전통 속에서도 그림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왔었다. 문인들이 그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형사(形似)가 중시되던 시대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그림 실력은 문인이라고 하여 모두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문인들은 자신들이 잘 하는 분야가 아닌 그림을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태도를 보인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림에 사의(寫意)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도 전문적인 화가들의 솜씨를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자신들의 그림 실력을 포장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문인과 사대부들에 의해 저평가 받던 그림이 북송(北宋) 때에 이르면 소식(蘇軾)의 “마힐(摩詰)의 시를 음미해 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관찰해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는 글에서 나타나듯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시서와 그림이 상호 보완의 관계 속에서 시흥(詩興)과 화취(畵趣)를 돋우는 효과에 주목함으로써 그림이 문인 문화의 한 축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힐(摩詰) :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왕유(王維)의 자. 서정시에 뛰어나 ‘시불(詩佛)’이라고 불렸으며, 수묵(水墨) 산수화에도 뛰어나 뒤에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개조(開祖)로 인식되었다. |
북송(北宋) 때에 태동된 ‘서화는 작자의 인품반영’이라는 인식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이르러서는 “그림과 서예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原論)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어 명나라 동기창의 남북종화론에 의하여 비록 문인화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그림이 시서와 동등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그림이 문인화라는 이름으로 문인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동기창과 남종화 중흥의 중심인물이었던 문징명을 비롯한 명대(明代) 오파(吳派)의 여러 화가들은 고전적 명시문(名詩文)을 그림의 주제로 적극 다루었으며, 이 때 원문을 필사한 서폭(書幅)을 그림과 함께 배치하여 서(書)와 화(畵)가 짝을 이루도록 한 제작 형식이 크게 유행하였다. 즉, 서화합벽의 작화 형식은 명대 오파에서 비롯되어 청대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선의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 역시 이러한 중국의 문물이 조선에 전해진 결과물이다.
사공도의 시는 특히 기품이 있어 당나라 말기에 으뜸으로 꼽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사공도가 시의 의경(意境)을 24품(品)으로 나누어, 각각 4언(言) 12구(句)로 시의 품격을 상징적, 은유적으로 해설한 것이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이다. 각 시품의 높고 낮음을 논한 것이 아니라 시의 대표적인 스물네 개의 의경(意境)을 골라 각각을 일종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의경(意境)은 작자의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이 객관적인 사물이나 대상을 만나 융합하면서 생성되는 의미나 형상을 가리킨다.
지금 전하는 정선의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은 두 점의 그림이 유실되어 22점 뿐이고 이광사의 글씨는 6편이 없어져 16면만 남아있다. 서화첩의 맨 마지막 장인 ‘유동(流動)’의 그림에 ‘기사 자월하완 칠십사세옹 겸재(己巳 子月下浣 七十四世翁 謙齋)’ 라는 관지가 있어 정선이 74세 되던 1749년의 음력 11월 하순에 마지막 그림을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광사의 글씨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751년 윤 5월에 번천의 견일정에서 썼다고 했다. 그림은 비단에 그렸고 글씨는 종이에 썼다.
이러한 시간 차이로 인하여 이 서화첩이 어떻게 꾸며지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연구자들은 당대의 누군가가 먼저 정선에게 의뢰하여 그림을 그려 받은 뒤, 다시 적당한 때에 이광사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받아 한 권의 첩으로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의뢰한 당사자에 대해서는 여러 추론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또한 현재 전해지는 첩은 표지의 문양 양식을 근거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공도시품첩(司空圖詩品帖)》의 장황된 그림의 순서는 지금 전하는 사공도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의 순서와 다를 뿐만 아니라 정선이 그린 그림의 순서와도 일치하지 않는 정황이 보인다. 사공도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의 순서를 따르면 시품의 첫 번째는 ‘웅혼(雄渾)’이다.
웅(雄)은 크고 위세가 당당하며 강해서 힘이 있는 것을 가리키며, 혼(渾)은 뒤섞여 실마리가 없고 그 끝을 볼 수 없는 것으로, 두 글자는 합하여 ‘웅장(雄壯)하여 막힘이 없음’을 뜻한다.
이에 대한 사공도의 시는 이렇다.
大用外腓 : 큰 작용이 바깥을 감싸지만
眞體內充 : 참된 모습은 안에 충만하도다.
返虛入渾 : 빈 곳으로 돌아와 혼연한 데로 들어가
積健爲雄 : 굳건함을 쌓아 웅장함을 이룬다.
具備萬物 : 만물을 구비하고
橫絶太空 : 넓은 하늘을 가로질러
荒荒油雲 : 거친 기운이 구름을 일으킨다.
寥寥長風 : 고요하고 미세한 긴 바람
超以象外 : 드러난 물상을 뛰어넘어
得其寰中 : 온 세상의 중심을 얻는다.
持之匪强 : 보존함에 억지가 없고
來之無窮 : 그 미래는 무궁하다.
정선은 이 시를 어떻게 형상화 했을까?
이광사는 사공도의 시를 초서(草書)로 썼다.
정선의 그림 상단에 있는 것은 제시나 제발이 아닌 화평(畵評)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의외다.
“산세의 빼어남과 활달함이 부족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질펀함은 물리쳤다.”
이 그림은 천하의 정선이 만년인 74세 때에 그린 그림이다. 그런 그림에 그저 그런 그림이라고 평을 달 수 있는 인물이 누구였는지 궁금해진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추측이 있지만 역시나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첩을 의뢰한 주인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 마저도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정선이라는 이름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웅혼한 기상과 그림에 대해 나름의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정도만 짐작이 가능하다.
참고 및 인용 : 이십사시품과 18·19세기 조선의 사대부 문예(안대회), 국립중앙박물관, 문학비평용어사전(2006,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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