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唐)나라 때에 마도일(馬道一)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조계 혜능의 3세에 해당하는데, 새로운 남종선(南宗禪)의 선조가 되었기 때문에 마조(馬祖)로 불린다. 그의 제자들 중에 백장 회해, 남천 보원, 서당 지장 등이 뛰어났었다.
마조(馬祖)가 달구경하다가 곁에 있는 제자 세 사람에게 말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어떠하냐?"
지장(智藏)이 대답했다. “공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회해(懷海)가 대답했다. “수행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보원(普願)은 소매를 저으며 가버렸다.
이에 선사(禪師)가 말하되 “경(經)은 장(藏)으로 들어가고 선(禪)은 해(海)로 들어갔는데 보원만이 홀로 사물 밖으로 뛰어났구나.”
《단원 풍속도첩》에도 ‘활쏘기[射弓]’라는 이름으로 활 쏘는 법을 가르치는 그림이 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기에 활 쏘는 법이란 과녁을 맞히는 연습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무인(武人)으로서의 활쏘기는 전쟁 중에 갑옷과 방패를 뚫고 들어갈 만큼의 강한 활과 강한 활시위를 당길 힘을 갖추는 수련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求)가 쓴 박물학서인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에는 활쏘기에 대해 34개 항목에 걸친 설명이 있을 정도로, 활쏘기를 잘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과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처음에는 나무 활[木弓]이나 대나무 활[竹弓]과 같은 연습용 활로 활쏘기 자세와 활시위 당기기, 과녁 맞추기 등의 훈련을 시작해서 점차 활시위를 당기는데 힘이 필요한 강궁(强弓)으로 교체를 해가며 10년 넘게 훈련을 해야 제대로 된 궁수(弓手)가 될 수 있었다 한다.
우리나라에는 전시용(戰時用), 수렵용(狩獵用) 등 용도에 따른 여러 종류의 활이 있었으나 지금은 연습용으로 쓰던 각궁(角弓)만이 전해져 국궁(國弓)이라는 이름으로 운동용으로 쓰이고 있을 뿐 실제 전투에서 사용하던 활들은 신식무기의 출현과 함께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전통적 활터에 설치된 사대(射臺)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145m인데, 전투용 활에는 사정거리가 무려 500m 이상 되는 활도 있었다고 하니 그 정도로 화살을 날려 살상력을 갖으려면 지금 국가대표 선수들의 수련에 버금가는 정도의 노력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참고 및 인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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