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傳沈師正崔北筆小品畵集)

從心所欲 2021. 4. 29. 08:18

조선 후기,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사이의 걸출한 화가로는 현재(玄齋) 심사정을 꼽을 수 있다. 그런 심사정과 거의 동시대 인물로 그림에서 서로 쌍벽을 이루었다는 말을 듣는 화가가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이다. 떠돌이 환쟁이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일생을 떠돌이 생활을 한 탓에 그에 대한 기록이 미진하여 그의 출생년도 조차 1712년과 1720년의 두 가지 설이 있다.

 

최북은 지금 ‘개성적인 화가’라는 말로 소개될 만큼, 괴팍한 성격에다 폭음(暴飮)과 주벽, 기행(奇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 또는 ‘주광(酒狂)’이라 불렀다 한다. 그의 호 호생관(毫生館)은 ‘붓으로 먹고 산다’는 의미이다. 그는 30대부터 전국을 여행하면서 그림을 그려주며 먹고 지냈지만 화가로서의 자존심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북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그의 기괴한 행동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그림을 빨리 그려주지 않는다고 겁박하는 어느 벼슬아치에 분노하여 스스로 눈을 찔러 한 눈이 멀게 된 일은 그의 기질을 보여주는 대표적 일화로 소개되고 있다. 그가 금강산(金剛山) 구룡연(九龍淵)에 갔다가 그 경치가 너무 좋아 술을 잔뜩 마시고 울다 웃다 하더니 이윽고 소리를 지르면서 “천하 명인 최북이는 마땅히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는 몸을 던져 못으로 뛰어내린 일화도 있다. 마침 누군가가 구해줘서 물에 빠져 죽는 것은 면하였는데, 떠메다가 산 아래 평평한 바위 위에 내려놓았더니 최북이 헐떡거리며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긴 휘파람을 불자, 그 소리가 숲을 진동하여 까마귀들이 놀라 까악 거리며 멀리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화들은 최북 사후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미루어, 최북의 괴팍한 성격과 기인적 행동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확대 재생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북은 여러 화목 중에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려서 ‘최산수(崔山水)’라고도 불렸다 한다. 주로 남종화 계통의 산수화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끝내 북종화의 습속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또한 특별히 어느

화풍에 매달리지 않고 그야말로 ‘붓 가는대로 그렸다‘는 평도 있어 최북의 화풍이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40 ~ 50대에 단양, 금강산 등의 국내 명승지를 여행하면서는 진경산수화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傳沈師正崔北筆小品畵集)」은 모두 7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있다. 심사정의 그림이 3점이고 최북의 그림이 4점이다. 어느 수집가가 당대에 쌍벽을 이루었다는 두 화가의 그림을 모아 만든 화집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림의 크기도 각기 다르다.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中 심사정 그림 1, 국립중앙박물관]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中 심사정 그림 2, 국립중앙박물관]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中 심사정 그림 3, 국립중앙박물관]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中 최북 그림 1, 국립중앙박물관]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中 최북 그림 2, 국립중앙박물관]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中 최북 그림 3, 국립중앙박물관]

 

[「전 심사정․최북 필 소품화집」中 최북 그림 4, 국립중앙박물관]

 

최북이 그림에 적은 ‘七七’은 최북의 자이다. 이름의 ‘北’자를 파자한 것이라 한다.

조희룡(趙熙龍)이 특이한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칠칠이는 49세에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칠칠 49라는 숫자의 예언이라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런가 하면 조선을 유람하며 많은 시를 남긴 정조 때의 문신 신광하(申光河)는 최북의 죽음을 애도하여 쓴 <최북가>에 “칠칠이가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 잠들었는데 마침 폭설이 내려 그만 얼어 죽고 말았다.”고 적었다. 이 두 가지 기록이 합쳐진 내용이 최북의 죽음에 대한 정설처럼 전해지지만, 이와는 다른 기록들도 있다. 최북과 가까이 지냈던 정조와 순조 때의 문신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최칠칠전>에는 “칠칠이는 서울 여관에서 죽었는데, 그해가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으니….”라고 되어있다. 그런가 하면 “늙어서 남의 집에서 기식하다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북한에 최북의 1784년도 작품이 남아있기도 하여, 적어도 최북이 49세에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참고 및 인용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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