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그림

정수영 해산첩(海山帖) 2

從心所欲 2021. 6. 27. 07:48

 

첩의 9면부터 11면까지는 한 개의 그림이다. 그림의 제목은 <천일대망금강산(千一臺望金剛山)>이다.

 

[정수영 「해산첩」 9면 <천일대망금강산(千一臺望金剛山)>, 지본담채, 37.2 x 61.9cm, 국립중앙박물관]

 

[정수영 「해산첩」 10면 <천일대망금강산(千一臺望金剛山)>, 지본담채, 37.2 x 61.9cm, 국립중앙박물관]

 

[정수영 「해산첩」 11면 <천일대망금강산(千一臺望金剛山)>, 지본담채, 37.2 x 61.9cm, 국립중앙박물관]

 

천일대(千一臺)는 내금강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표훈동(表訓洞)의 한 봉우리 아래쪽에 흙으로 이루어진 대(臺)를 가리킨다. 정양사(正陽寺) 동쪽에 있으며, 정양사 안의 헐성루(歇惺樓)와 더불어 금강산의 대표적인 전망대로 꼽히는 곳이다. 역시나 이 그림에서도 정수영은 천일대에서 보이는 금강산의 모습을 모두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9면에 정수영이 쓴 글의 내용은 이렇다. 정수영의 풍경 설명은 그림의 왼쪽부터, 즉 11면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오른쪽으로 옮겨와 10면에서는 왼쪽 구석의 오선봉(五仙峰)을 거쳐 위쪽의 봉우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11면의 오른쪽 부분으로 되돌아간다.

 

【표훈사에서 곧장 정양사(正陽寺)로 갔다. 절 앞에 벼랑이 있어서 가마로도 가기가 어려웠다. 가까스로 벼랑을 올라가니 누각이 있는데 헐성루(歇惺樓)라고 현판이 붙어 있었다. 누(樓)에 올라가서 미처 조망도 못했는데 눈이 아찔하여 정신이 어지러웠다. 잠깐 동안 난간에 기대어 진정해서 바라보니 가섭봉(迦葉峰)에서 남쪽으로 내수참(內水站)까지를 중향성(衆香城)이라고 하는데, 보기에 백옥을 깎아 세운 듯한 하늘에 솟아오른 봉우리는 별로 없고, 잔잔히 뾰족한 듯도 하고 그렇지 않은 듯도 한 것이 성(城)처럼 둘러 있는데, 그 속에 뾰족뾰족한 봉우리가 수없이 많다. 이것이 일만 이천 봉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흰 색깔인데 움푹 들어간 곳은 모두 검푸르다. 내수참은 약간 낮고, 그 남쪽이 오선봉(五仙峰)인데 깎아 세운 것처럼 뾰족뾰족하면서 빛깔이 희다.

 

또 우뚝 솟은 것은 혈망봉(穴望峰)이다. 봉우리가 크고 높이 솟았으며, 그 남쪽으로 있는 약간 낮은 것은 승상봉(丞相峰)인데 빛이 좀 검고 북(北)을 굽어보고 있다. 또 조금씩 높아지면서 꼭대기는 약간 흰빛을 띠었고 그 남쪽으로 나열하여 달려가는데, 이것은 모두 장안사 동북쪽에 있는 여러 봉우리들이다. 간혹 희기도 하나 대체로 검푸른 빛이었다. 중향성 서쪽으로 뻗은 산맥이 떨어져서 대향로봉이 되고 또 소향로봉이 되었는데, 모두 검푸르며 꼭대기의 뾰족한 부분은 흰빛이다. 그 아래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청학대(靑鶴臺)이다. 돌이 쌓여서 대가 이루어졌고 대 위에는 이상한 돌들이 널려 있었다. 가섭봉에서 장경암(長慶庵)까지는 하늘에 솟은 모든 봉우리가 서릿발처럼 쭈뼛쭈뼛하여 사람이 정신을 잃고 소리를 지르게 한다.

 

그 다음날 다시 누에 올랐다. 산의 기세는 어제 보던 것과 다름이 없으나 형형색색이 시간을 따라 형태가 변하는 것이 이것을 그려낼 수가 없다. 그런데 현재(玄齋)와 석치(石癡) 가 그린 것도 어떤 것은 상세히, 어떤 것은 대충 그려서 다 잘했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종이를 펴놓고 한 장의 초안을 만들어 보았다.】

 

정수영이 글에서 말한 현재(玄齋)는 심사정이고 석치(石癡)는 서화에 능했던 문신(文臣) 정철조(鄭喆祚, 1730 ~ 1781)를 가리킨다. 두 사람이 “어떤 것은 대충 그려서 다 잘했다고는 할 수 없다”는 대목에서, 정수영이 이 풍경을 꼼꼼하게 그리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유탄과 먹, 그리고 약간의 담채를 섞은 것만으로 금강산을 이만큼이라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은 정수영의 대단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아래 금강산의 만물상 암봉(巖峯)들을 담은 사진을 보면 정수영으로서는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사진, 현대아산]

 

[정수영 「해산첩」 12면 <금강대(金剛臺)>, 지본담채, 37.2 x 61.9cm, 국립중앙박물관]

 

금강대(金剛臺)는 만폭동에 있는 봉우리이다. 이 금강대 아래의 개울가에는 약 200m 구간에 수백 명이 앉을만한 큰 너럭바위가 있고, 그 너럭바위에는 16세기 이름난 서예가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 ~ 1579)이 썼다는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堸岳元化洞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수영은 이 바위에 새겨진 글자까지도 그림에 옮겨 놓았다. 봉래와 풍악은 모두 금강산을 가리키는 이름이고 원화동천(元化洞天)은 만폭동의 다른 이름이다. 금강산의 기묘함과 아름다움을 다 갖춘 으뜸가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너럭바위 뒤로 보이는 금강대의 모습은 정선의 정양사 주변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금강대와는 사뭇 다르다. 

 

[정선 「풍악도첩」中 <보덕굴> 속의 금강대, 견본담채, 36.3 × 35.9㎝, 국립중앙박물관]

 

애초에 두 사람의 사의(寫意)가 다른 만큼 어느 것이 더 실제 모습에 가까운가는 따질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해산첩」의 13면에는 오른쪽에 분설담(噴雪潭)과 왼쪽에 청룡담(靑龍潭)을 나누어 그렸다. 

 

[정수영 「해산첩」 13면 오른쪽 <분설담(噴雪潭)>, 지본담채, 33.8 x 30.8cm, 국립중앙박물관]

 

[정수영 「해산첩」 13면 왼쪽 <청룡담(靑龍潭)>, 지본담채, 33.8 x 30.8cm, 국립중앙박물관]

 

분설담(噴雪潭)과 청룡담(靑龍潭)은 모두 만폭동에 있는 소(沼)로, 분설담은 분설폭포 아래에, 청룡담은 금강대 아래개울에 있다. 두 그림 모두 대각으로 암반을 타고 흐르는 빠른 물줄기를 구심점으로 삼았다.

 

[정수영 「해산첩」 14면 <백천동(百川洞)>, 지본담채, 37.2 x 61.9cm, 국립중앙박물관]

 

[정수영 「해산첩」 <백천동(百川洞)> 부분]

 

백천동(百川洞)은 내금강지역 명경대구역에 석가봉과 십왕봉의 두 산줄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사이로 외금강골짜기의 여러 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개울인 백천(百川)이 흘러 백천동(百川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백천동을 끝으로 정수영의 그림은 외금강으로 넘어간다.

 

 

 

참고 및 인용 : 해산첩(이수경, 국립중앙박물관), 북한지리정보(2004, CNC 북한학술정보),

'우리 옛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수영 해산첩(海山帖) 4  (0) 2021.07.04
정수영 해산첩(海山帖) 3  (0) 2021.06.30
정수영 해산첩(海山帖) 1  (0) 2021.06.23
산재망성도(山齋望星圖)  (0) 2021.06.18
부채그림  (0) 2021.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