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차 3

병풍 39 - 금강산도

보지도 못한 중국의 산수를 흉내 내고 상상 속의 이상적 풍경만 그리던 조선에서 우리 강토의 풍경을 조선적 화풍으로 그리는 진경산수화의 물꼬를 튼 것은 겸재 정선이다. 더욱이 그의 금강산 그림은 이후 문인이나 전문적인 화원을 막론하고 금강산 그리기 열풍에 빠져들게 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한 열기는 민간으로도 확대되면서 금강산을 주제로 한 많은 민화들이 제작되었다. 문인이나 전문 화원들의 그림이 감상을 목적으로 첩(帖)이나 축(軸)의 형태로 제작된 반면, 민간에서는 장식을 목적으로 한 병풍으로의 제작이 활발하였다. 민화 금강산도는 처음에는 정선이나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를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는 도상의 변용과 자유로운 표현 양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또한 내용면..

우리 옛 병풍 2021.10.10

병풍 38 - 군접도(群蝶圖)

조선에서 나비를 그린 화가들은 적지 않다. 심사정과 김홍도도 그렸고 조희룡도 그렸다. 그 외에도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여러 화가들의 작품들이 지금도 전한다. 나비는 대개 꽃을 그릴 때 짝을 맞추기 위해 그려지지만, 민화에서는 나비의 한자인 접(蝶)자가 80노인을 뜻하는 ‘늙은이 질(耋)’자와 그 중국어 발음이 같아,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도 그려졌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채색화가 늘어나면서 나비의 아름다운 색과 문양 그 자체를 재현해내려는 화가들의 그림들이 이어졌다. 꽃과 어울린 형형색색의 나비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배가하여 화려한 장식화로서의 요소를 갖추게 되면서 병풍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화조도에서 나비가 있어도 꽃을 돋보이기 위한 부수적 요소였던 반면, 화가의 의중이..

우리 옛 병풍 2021.03.22

병풍 10 - 산수도(山水圖)

중국에서 수나라 때인 7세기 전반에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산수화는 10세기인 중국 오대(五代)와 북송(北宋)대에 이르러 회화의 주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수의 장엄한 위용을 그리는 것에 치중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산수화 역시 궁중과 민가에서 병풍으로 널리 제작되었다. 하지만 같은 산수도병이라도 쓰이는 병풍차(屛風次)에는 차이가 있었다. 공교함을 근본으로 하는 궁중의 병풍차(屛風次)가 장식화로서의 화려함과 위엄이 특징이라면, 사대부들의 산수도병은 차분하면서도 와유(臥遊)의 여유로움이 있었다. 또 서민들의 민화 산수도병은 소박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그림들로 꾸며졌다. ▶병풍차(屛風次) : 병풍을 꾸미는 그림이나 글씨. 이 은 작가와 제작 연대는 알..

우리 옛 병풍 2020.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