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 3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 ~ 1555)는 형조참판과 호조참판을 역임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문장가이자 서예가였다. 안동부사로 있던 1518년에는 퇴계 이황을 향교에서 직접 가르치기도 했었다. 이현보는 시문에 능하여 우리말 시가를 비롯하여 다수의 시조작품을 창작하였고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 시조작가로 조선시대 문학사에서 소위 강호가도(江湖歌道)로 불리는 문예활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경상도 예안현 분천리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호는 농암(聾巖)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 외에 설빈옹(雪靈翁)이라고도 하였다. 분강촌(汾江村)에 있던 그의 종택은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 안동시 도산면 가송길로 옮겨진 상태다. 농암종택에는 고문서류를 비롯하여 전적, 그림 등을 비롯한 여러 자료가 전하는..

우리 옛 뿌리 2022.05.02

풍류와 가락 5 - 농암 이현보

지금은 안동호로 인해 그 자취를 볼 수 없지만 옛날 청량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의 도산서원 앞을 가로지르던 분강(汾江)은 그 물줄기를 따라 선비들의 청신한 풍류 활동이 펼쳐졌던 풍류의 현장이었다고 한다. 그 출발은 농암(聾巖) 이현보였다. 벼슬을 마치고 노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이현보는 남은 세월을 풍류로 풀어냈고, 그 전통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이현보가 쓴 〈비온 뒤 배를 띄우고 점석에서 노닐며 퇴계에 차운하다(雨餘泛舟遊簟石次退溪)〉라는 글에는 이현보가 즐겼던 풍류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현보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온 지 5년이 지난 1547년 7월 어느 여름날 저녁으로, 그가 여든한 살 때이다. 【점석(簟石)의 놀이를 이황과 황준량(黃俊良)1, 그리고 여러 자제와 함께했다. 조그만 배에 올라 ..

우리 옛 뿌리 2019.04.13

풍류와 가락 4 - 강호가도(江湖歌道)

널리 알려진 이방원의 와 정몽주의 도 서로 글로 써서 주고받은 것이 아니다. 역성(易姓)혁명을 준비하던 측의 이방원이 온건개혁파였던 정몽주(鄭夢周)를 회유하기 위하여 마련한 자리에서 이방원은 이렇게 시조를 지어 불렀다.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하리 우리도 이갓치 얼거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이 직설적인 말을 피하고 에둘러서 자신의 뜻을 노래하자 정몽주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말로 자신의 굳은 의지와 결기를 나타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一百番)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 결과 정몽주는 돌아가는 길에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

우리 옛 뿌리 2019.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