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5 - 농암 이현보

從心所欲 2019. 4. 13. 16:36

 

지금은 안동호로 인해 그 자취를 볼 수 없지만 옛날 청량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의 도산서원 앞을 가로지르던

분강(汾江)은 그 물줄기를 따라 선비들의 청신한 풍류 활동이 펼쳐졌던 풍류의 현장이었다고 한다.

그 출발은 농암(聾巖) 이현보였다. 벼슬을 마치고 노인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이현보는 남은 세월을 풍류로

풀어냈고, 그 전통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이현보가 쓴 〈비온 뒤 배를 띄우고 점석에서 노닐며 퇴계에 차운하다(雨餘泛舟遊簟石次退溪)〉라는 글에는

이현보가 즐겼던 풍류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현보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온 지 5년이 지난 1547년

7월 어느 여름날 저녁으로, 그가 여든한 살 때이다.

 

【점석(簟石)의 놀이를 이황과 황준량(黃俊良)1, 그리고 여러 자제와 함께했다. 조그만 배에 올라 농암(聾巖)2

아래에서 닻줄을 풀어 천천히 나아갔다. 사자 바위를 지나 코끼리 바위에 이르러 배를 정박하고 두루 구경하고

나서, 다 함께 그 바위 등에 올라가서 오래도록 만져 보고 놀았다. 그러다가 곧장 아래로 내려와서 바로 점석에

다다랐다. 이때는 오랫동안 내린 비가 새로 개고, 먼지와 더러운 것들이 깨끗하게 씻겼던지라 매끄럽기가 마치

벽옥(璧玉) 같았다. 다만 큰 비가 있었던 뒤끝이어서 돌 틈에 고인 물이 남아 있었다. 자리를 가려서 빙 둘러앉되

위아래의 순서는 가리지 않았다. 이윽고 조그만 술상을 차렸는데, 술잔 주고받는 예절은 모두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하였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기를 종일토록 하다 보니 바야흐로 날이 어두워지려 하였다.

구름 그늘이 달빛을 가리고 물빛이 아득하여 촛불을 밝혀 보니 바위는 강 가운데 놓여 있고, 강물은 여기에

이르러 나뉘어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 자리를 돌아 이황의 좌석 아래로 흘러갔다. 내가 취흥(醉興)을 타서

재미난 놀이를 하였다. 술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나뭇가지 뗏목에 올려서 띄우니 이황이 아래에서 웃으며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하였고, 손자사위와 자제들은 이 정경을 보고 부러워하였다.】

 

이런 풍류는 뒷날 '영남가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퇴계 이황은 이현보가 1518년 안동부사 시절 향교에서

직접 가르치기도 한 사이였다. 풍류의 주요 인물들은 이 지역에 농토와 누정 등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갖춘 양반

출신들로, 청년기에 정치적 이상을 품고 관직에 진출했던 영남 사림들이다. 그러나 막상 이들이 접한 정계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기(士禍期)의 어둡고 부조리한 세계였다. 그래서 이들은 한양으로 상징되는 어지러운 정치

현실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주로 지방 수령을 지내면서 고향 인근에서 성리학에 바탕을 둔 향촌 교화 운동을 벌이는

한편 풍류 문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풍류 현장에는 격식에 구애되지 않는 여유로움 속에서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 그리고 술과 놀이가 있었다.

 

[이현보 「매일당구경첩」 中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 27.7 x 42.6cm, (보물 1202호)]

 

 

60세 때인 1526년, 이현보가 부모를 뵙기 위해 휴가를 얻어 내려온 일이 있었다.

당시 부친은 85세, 어머니는 80세였다. 그러자 경상도 관찰사 김희수(金希壽)가 선생의 이러한 정성을 고려하여

수연(壽宴)을 주관하고, 여러 고을 수령들을 함께 불렀고 음식을 마련하도록 했다. 무희와 악공들과 화공도 왔다.

참석자들이 축하시를 썼고, 이후 농암이 서울로 올라가 눌재(訥齋) 박상(朴祥)으로 하여금 그것을 기록하게 하고

그림까지 남겼다.

그림의 중앙상단에는 농암의 종택, 우측 바위 위에는 애일당(愛日堂)과 강각(江閣)이 보이고, 그 아래는 분강의

뱃놀이 풍류가 보인다. 이 그림은 지금은 안동댐에 수몰된 ‘분강촌(汾江村)’의 실경에 가장 근접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애일당’은 이현보가 부모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며, ‘강각’은 어부가, 농암가 등 강호가도의 국문

시조가 지어진 유서 깊은 문학현장으로 소개되고 있다.

 

[위 <분천헌연도(汾川獻燕圖)>중 왼쪽 부분] 

 

 

명농당(明農堂)은 1510년(중종 5년), 영천 군수로 있던 이현보가 잠시 휴가를 내어 고향 예안을 찾아서 고조부

이헌이 지은 긍구당(肯構堂)의 남쪽에 조그맣게 초가집을 짓고는 벽에다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그렸다는

별채이다.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표방한 이때, 이현보의 나이가 34세였으니 실제 귀거래하기까지는 무려

42년이 걸린 셈이다.

 

[현재의 농암종택 가을풍경, 농암종택 홈페이지]

 

고향에 내려온 이현보는 전래되던 <어부가(漁父歌)>를 개작하여 각각 9장과 5장으로 된 〈어부장가(長歌)〉와

<어부단가(短歌)>를 남겼는데, 후에 윤선도가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도 여기에서 시상(詩想)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현보는 <어부가>를 개작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어부가 서(序)」에 이렇게 기록했다.

 

【어부가 양편(兩編)은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늙어서 전원으로 물러나 마음이 한가롭고 일이 없어

고인(古人)의 글을 모아 술을 마시면서 시가(詩歌)를 읊던 중에 노래 부를 수 있는 시문(詩文) 약간 수(首)를

비복(婢僕)에게 음률(音律)을 가르쳐 때때로 들으며 소일하였다. 아손배(兒孫輩)3가 늦게 이 노래를 얻어

보이기에 내가 살펴보니 사어(詞語)가 한적(閑適)하고 의미가 심원(深遠)하여 음영(吟詠之餘)에 사람으로

하여 공명에서 멀어지게 함이 있으며, 표표(飄飄)하고 하거(遐擧)한 진외지의(塵外之意)4가 있었다.

이를 얻은 후에는 전에 완열(玩悅)하던 가사(歌詞)는 모두 버리고 오로지 이에 뜻을 두었다. 손수 베끼어

화조월석(花朝月夕)5에 술잔을 잡고 벗을 불러 분강의 작은 배 위에서 영(詠)하게 하면 흥미가 더욱 참되어

태로움을 잊었다. 다만 말에 불륜(不倫) 혹 중첩이 많으니, 이는 반드시 전사(傳寫)의 와전(訛傳)이다.

이 노래는 성현의 말씀에 근거한 글이 아니어서 망령되이 찬개(撰改)를 가하여 일편십이장(一篇十二章)은

삼장(三章)을 버리고 구장(九章)으로 만들어 장가(長歌)를 지어 영(詠)하고 십편십장(十篇十章)은 줄여

단가(短歌) 오결(五闋)로 지어 엽(葉)으로 창(唱)하고, 합치어 일부신곡(一部新曲)을 이루게 했다. 이는 다만

산개(刪改)했을 뿐만 아니라 첨보(添補)한 곳이 또한 많다. 그러나 각기 구문(舊文)의 본의(本意)를 따라

증손(增損)하였을 뿐이다. 이름하여 농암야록(聾巖野錄)이라 하니 보는 사람은 행여 분수에 넘친 일이라고

나무라지 말기를 바란다.】

 

76세에 강호의 진정한 즐거움을 추구했던 이현보는 전래해온 <어부가>의 시적 세계가 자신이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강호 생활의 한적한 정취를 유감없이 펼치고 있다는 생각에 이 작품에 매료되어 이전에 즐기던

한시(漢詩)들을 모두 버렸다고 한다. 그가 개작한 <어부장가>의 3장과 4장이다.

 

盡日泛舟 烟裡去

有時搖棹 月中還이라

이어라 이어라

我心隨處 自忘機라

至菊悤 至菊悤 於思臥

乘流 無定期라

 

종일토록 배를 띄워 물안개 속으로 흘러가고

때때로 노 저어 달빛 아래 돌아온다.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내 마음 가는 곳 따라 스스로 모든 일을 잊었노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노를 두드리고 물결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가네.

 

 

萬事無心 一釣竿

三公不換6 此江山라

돗디여라 돗디여라

山雨溪風 捲釣絲라

至菊怱 至菊怱 於思臥

一生蹤跡이 在滄浪라

 

만사를 무심히 하고 낚싯대 하나에 뜻을 두니

삼공 벼슬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도다.

돛을 내려라 돛을 내려라

산의 비와 계곡의 바람이 낚싯줄을 거두는구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일생의 자취가 바다의 푸른 물결에 있네.

 

 

[김홍도 <어부오수도(漁夫午睡圖)7>, 지본담채, 29.0 x 41.5cm. 개인 소장]

 

 

사대부들이 자신을 어부에 빗대어 노래하는 것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오래된 시적 전통이다. 어부는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어은(漁隱)으로 비유되며 은일자(隱逸者로 상징되었다. 그 뿌리는 멀리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부터 시작하여 강태공과 엄자릉의 고사(故事)8를 거쳐 도원명의

『도화원기』까지 이른다. 관직에 묶여있던 벼슬아치나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대부들에게는 조각배를

타고 유유자적 떠다니는 어부의 자유로운 삶이 늘 이상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현보의 글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집안 노비들에게 음률을 가르쳐 부르게 했다는 대목이다. 노비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544년, 신재(愼齊) 주세붕(周世鵬)9이 청량산을 가던 도중에 이현보를 방문한

일을 기록한 글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농암을 분강가(汾江家)로 찾아뵈오니, 공이 문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방에 들어가 바둑을 두니 곧 술상이

나왔다. 큰 여종은 거문고를 켜고, 작은 여종이 비파를 불면서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농암의 ‘귀전부’,

이하(李賀)의 ‘장진주사’와 소설당(蘇雪堂)의 ‘행화비렴산여춘’ 등을 노래했다. 공의 아들 문량(文樑)은

자(字)가 대성(大成)인데 모시고 있다가 수곡(壽曲)10을 불렀다. 나와 대성이 일어나 춤을 추니 공이 또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이때 공의 춘추 78세로 내 아버지의 연세여서 더욱 감회가 깊었다.】

 

평소 종에게 음률을 가르쳐 부르게 한 것이나 아들이 아버지의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를 하며 손님과 어울려

춤을 추고 이에 78세의 노인도 흥에 겨워 같이 춤을 추는 모습은 상상만 하여도 얼마나 아름답고 멋스러운가!

아마도 이것이 풍류의 본질일 것이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납량만흥(納凉漫興)>,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참고 및 인용 :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권순긍, 신동흔, 이형대, 정출헌, 조현설, 진재교, 2011. 휴머니스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창악집성(하응백. 2011. 휴먼앤북스), 농암종택 홈페이지

 

 

  1. 황준량 :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 [본문으로]
  2. 이현보의 집 앞 분천(汾川)에는 ‘귀머거리 바위’라는 뜻의 농암(聾巖)이 있었는데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본문으로]
  3. 손자 사위인 황중거 [본문으로]
  4. 속세(俗世)의 번거로움과 떨어진 곳의 정취 [본문으로]
  5. ‘꽃이 핀 아침과 달 밝은 저녁’이란 뜻으로, ‘경치(景致)가 가장 좋은 때’를 이르는 표현이다. 시기적으로는 음력 2월 보름과 8월 보름 밤 또는 넓게 봄과 가을을 가리키기도 한다. [본문으로]
  6. 삼공(三公)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뜻한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이란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삼공 자리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다. ‘萬事無心 一釣竿 三公不換 此江山’은 강호(江湖)의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南宋(남송)의 학자이자 시인인 대복고(戴復古, 1167년 ~ 1248년)의 조대(釣臺)라는 시의 구절이다. [본문으로]
  7. 화제로 쓰여진 글은 이현보의 어부장가 7장에 나오는 醉來睡着無人喚 流下前灘也不知(취해서 잠들어 부르는 이 없으면 앞 여울로 흘러내려가도 알지 못하리)라는 구절의 일부다. [본문으로]
  8. 중국 은나라 말엽, 강상(강태공, 생몰년 미상)은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인재를 찾아 떠돌던 서백(주나라 문왕)을 만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평정했다. 엄자릉으로 널리 알려진 엄광(嚴光 기원전 39년 ~ 기원후 41년)은 후한(後漢)을 개국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유수가 황제가 되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훗날 유수가 엄자룡이 보고 싶어 백방으로 찾아 둘이 만났는데 엄자룡은 유수를 황제가 아닌 예전의 친구처럼 대하고 같이 자면서 황제인 유수의 배 위에 발을 올려놓기까지 했다. (중국인물사전,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본문으로]
  9. 주세붕(1495 ~ 1554)은 풍기군수로 재직하면서 1543년 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白雲洞)서원을 세우고 고려 말의 학자 안향(安珦)을 제향 했다. 1551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에는 해주에 수양(首陽)서원을 세우고 고려 때의 학자 최충(崔沖)을 제향 했다. 명종 때 청백리로 뽑혔다. 시문에 능해 태평곡(太平曲), 군자가(君子歌) 등의 가사 8수를 지었다.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본문으로]
  10. 장수를 축원하는 노래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