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4 - 강호가도(江湖歌道)

從心所欲 2019. 4. 11. 16:25

 

널리 알려진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도 서로 글로 써서 주고받은 것이

아니다. 역성(易姓)혁명을 준비하던 측의 이방원이 온건개혁파였던 정몽주(鄭夢周)를 회유하기 위하여 마련한

자리에서 이방원은 이렇게 시조를 지어 불렀다.

 

"이런들 엇더하며 져런들 엇더하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츩이 얼거진들 엇더하리

우리도 이갓치 얼거져 백년(百年)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이 직설적인 말을 피하고 에둘러서 자신의 뜻을 노래하자 정몽주는 직설적이고 단정적인 말로 자신의

굳은 의지와 결기를 나타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一百番)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 결과 정몽주는 돌아가는 길에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지만

이 긴박한 상황에서 서로 자신의 뜻을 노래로 표현한 이런 풍류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이방원의 하여가는

남창가곡 삼수대엽(三數大葉) 계면조로 전하고 정몽주의 단심가는 시조창으로 전해지고 있다.

 

황진이에 대한 한음(漢陰) 이덕형의 글에 송공(宋公)으로 소개된 인물은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  ~

1583)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었다. 그가 명종2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개성부 유수(開城府 留守)를 지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송순이 황진이를 처음 만난 것은 1547년이다. 황진이의 용모에 대한 기술 내용으로 보아 당시 황진이의

나이를 20세 전후로 추정한다면 황진이는 대략 1525년 전후에 출생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송순의 나이는 55세였다.

 

송순이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김안로(金安老)가 득세하게 되자 고향 담양에 귀향하여 제월봉

아래에 면앙정(俛仰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는데 후에 이 면양정에는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또한 면양정에는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들이 많이 모여들어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송순 자신도 많은 한시와 시조, 가사, 국문시가를 남겼다.

 

[담양 면앙정. 호남기록문화유산 사진]

 

사대부의 삶과 시가(詩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 사대부 지식인은 모두 다 시인이었다. 그들에게 시는

자신의 뜻을 표명하는 수단이기도 했으나, 또한 인생 그 자체이기도 했다. 시를 통해 풍류를 풀어내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나아가 자연과 소통하는 것은 사대부가 삶의 가치를 확인하고 하는 과정이다.

사대부들은 맑은 물과 조용한 산을 찾아 말없는 자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고

진정한 여유와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한 사대부의 풍류를 일컬어 '계산풍류(溪山風流)'라 한다.

조선시대 최초의 가사(歌辭) 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償春曲)〉은 이런 풍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전라북도 태인(泰仁)에 은거한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1481)이 만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에는 사대부들이 꿈꾸는 삶의 방식과 풍류가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상춘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홍진(紅塵)에 묻힌 분네, 이내 생활 어떠한고.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어 지락(至樂)을 모르는가.

수간모옥(數間茅屋)을 벽계수(碧溪水) 앞에 두고

송죽 울울한 곳에 풍월주인(風月主人) 되었구나."

 

[정선,「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계상정거(溪上靜居)>1 , 지본수묵, 25.3 × 39.8cm, 개인소장]

 

좋은 산과 맑은 물을 찾아 풍류를 풀어내는 것은 사대부들의 보편적인 꿈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이러한 삶은

특히 향촌에 생활 기반을 둔 사대부들에 의해 실현되었다. 향촌의 사대부들이 풍광이 아름다운 산기슭이나

강 언덕에 정자를 짓고 수시로 벗들과 어울려 문예 활동을 하면서, 계산풍류의 창작 활동은 하나의 중요한

문예 사조가 되었다.

우리나라 고전문학(古典文學)의 체계를 세운 한국 최초의 국문학 연구가이자 국문학자였던

도남(陶南) 조윤제(1904 ~ 1976)선생이 이를 '강호가도(江湖歌道)'라 명명했다.

송순은 농암 이현보와 함께 이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라는 이름을 얻고 있다.

 

강호가도의 풍조는 조선시대 정치상황과도 연관이 있다. 여러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사대부들은 자칫 잘못하여

정쟁에 휘말리면 일신(一身)뿐만 아니라 가문을 보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온전한

처신을 꾀하는 사람들은 아예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았고, 기왕에 나간 이는 세상이 어지럽게 되면 벼슬에서

물러나려 했다. 이리하여 뜻있는 선비들이나, 풍파에 놀란 사람들은 벼슬을 단념하고 당쟁에서 벗어나 산과

들에 파묻히는 쪽을 택했다. 또한, 나이 들어 벼슬을 마친 사대부들도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유유자적하며

산과 물에 즐거움을 붙여 늙어 가기를 꿈꿨다.

 

[ 최북, 운산촌사 (雲山村舍), 지본담채(紙本淡彩), 28.7 X 21 cm, 간송미술관 소장]

 

선조와 인조 때에 관직에 있으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던 장만(張晩, 1566 ~ 1629)의 시조에는 그런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풍파(風波)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웨라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 갈기만 하리라"

 

송순(宋純)도 이렇게 읊었다.

 

"늙었다 물러나자 마음과 의논하니

이 님 바리고 어드러로 가잔 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몬저 가리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년 ~ 1555)의 효빈가(效嚬歌)도 다르지 않다.

 

"귀거래(歸去來) 귀거래 말뿐이오 가리업싀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하니 아니가고 엇델고

초당(草堂)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명들명 기다리나니"

 

돌아간다. 돌아간다 말만 할 뿐 실제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고, 논밭과 동산이 황무지가 되었으니 아니 가고

어떻게 할 것인가! 초가집에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리는데.....

이현보가 76세 때인 1542년, 벼슬을 그만두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친지들과 이별을 나누다가 취하여

배 위에 누워 지은 시라고 한다. ‘찡그림을 흉내낸다’는 뜻의 효빈(效嚬)은 서시빈목(西施矉目)의 고사성어와 같은

뜻으로, 이현보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흉내 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대부들이 이처럼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관료신분의 세습으로 인한 토지 세습과

양반관료들의 토지 사유화가 늘어나면서 이 사유지에 기반을 둔 생활 근거가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확보된 사유지와 함께 향리에서 토지나 명망을 기초로 한 독점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송순의 회방연(回榜宴)에 얽힌 고사를 보면 호남 지역의 호방한 풍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회방연이란 과거

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말한다. 송순은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50년 동안 벼슬을 지내다가 7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면앙정(俛仰亭)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87세가 되던 1584년에 한바탕 흥겨운 회방연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담양부지(潭陽府誌)》에는 당시의 파격적인 잔치 모습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송순이 문과 급제한 지 회갑이 되던 날에 면앙정에서 축하하는 잔치가 베풀어졌다. 마치 친은일(親恩日)2

같아서 호남 온 고을이 흠모하여 구경하였다. 술자리가 반쯤 이르렀을 때 수찬(修撰)3 정철(鄭澈)이 말하기를,

"이 노인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대나무 가마를 메도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정철은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와 함께 송순을 태운 대나무 가마를 떠메고 내려왔다. 그 뒤를 각 고을 수령과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따랐다. 사람들 모두 감탄하며 부러워하였다.】

 

술의 흥이 한껏 고조되자 정철의 제안으로 고경명, 기대승, 임제 등이 송순을 대나무 가마에 태우고 스스로

가마꾼 노릇을 자청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호남의 탁월한 문인 학자이며 호남 시단의 중추적인 인물들이다.

아니 호남을 넘어서 이 나라 최고의 학자이자 문인들이었다. 그때 정철과 고경명의 나이는 이미 쉰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나이도 체면도 다 떨쳐 버리고 취흥을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에는 도학적 풍류와는 또 다른

차원의 호방한 낭만적 풍류가 흘러넘친다.

 

[담양 소쇄원, 문화유산채널 사진]

 

송순의 면앙정은 김성원의 식영정(息影亭)과 양산보의 소쇄원(瀟灑園) 등과 더불어 호남 지역 계산풍류의

중요한 산실이었다. 송순이 직접 지은 〈면앙정가(俛仰亭歌)〉는 면앙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광과 속세를 떠나 자연을 즐기는 강호한정(江湖閑情)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호남 계산풍류의

한 원형을 이루게 된다. 특히 작품의 후반에서 펼쳐 낸 비약적인 시적 상상력은 도도한 흥취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술이 익었거니 벗이라 없을쏘냐.

불리고 타게 하며 켜면서 이어가며

갖가지 소리로 취흥(醉興)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으락 앉으락 굽으락 젖히락

읊으락 휘파람 불락 마음대로 놀거니

천지도 넓고 넓고 일월(日月)도 한가하다.

희황(羲皇)4시절 모를러니 이때가 그때로다."

 

 

 

 

참고 및 인용 : 살아있는 고전문학 교과서(권순긍, 신동흔, 이형대, 정출헌, 조현설, 진재교, 2011. 휴머니스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도서출판 보고사),

창악집성(하응백. 2011. 휴먼앤북스)

 

  1.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은 정선의 외할아버지 박자진이 퇴계 이황선생이 쓴 ‘회암서절요서’를 들고 우암 송시열을 찾아가 보여주고 발문을 받아 만든 서첩이다. 1746년, 정선은 여기에 네 점의 그림을 더해 화첩을 만든 것으로 퇴계와 우암 두 선생의 참된 자취를 모은 문서라는 의미이다. 경상남도 예안 남쪽 기슭에서 은거하던 퇴계의 모습을 그린 그림. 46세에 관직을 물러난 퇴계선생은 두 칸짜리 집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는데 전국에서 제자들이 찾아들자 계천(溪川)위에 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도산서원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본문으로]
  2.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여 벌이는 잔치 [본문으로]
  3. 조선시대 홍문관의 정5품 관직 [본문으로]
  4. 중국 고대 전설상의 황제인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키는 것으로'아득한 옛적의, 백성(百姓)이 평안하고 한가(閑暇)한 세상(世上)'이라는 뜻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