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正歌) 중 가사(歌詞)는 일반적으로 긴 노래 가운데서 고상하게 치는 한정된 작품을 가리킨다. 즉,
가사체(歌辭體)의 긴 사설을 일정한 장단에 담은 느린 노래이다. 가곡과 시조는 동일한 선율 위에 다른
시조시를 얼마든지 얹어 부를 수 있으나, 가사는 그 노랫말에 맞는 곡조가 정해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가곡과 같이 감정을 절제하여 고아(古雅)하게 표출하는 정악(正樂)적인 요소와 서도창법 등의 민속악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또한 시조와 같이 장고 장단에 의하여 혼자 부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반주를 할
경우에는 피리, 대금과 장구로 편성하고 때로 여기에 해금이 같이 연주되기도 한다.
농암(聾巖) 이현보(1467 ~ 1555)가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있는 어부사(漁父詞)를 개작한 것을 가사의
효시로 보고 있고, 조선 중기에 가객(歌客)들에 의하여 발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모두 12곡이
전승되고 있어 ‘십이가사(十二歌詞)’라고도 부르는데, 어부사를 제외한 나머지 11곡은 모두 조선 말기에
발생된 곡들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노래를 부르는 가사(歌詞)와 문학용어 가사(歌辭)를 구분하는 경향이다.
시조라는 용어는 원래 3장 형식으로 구성된 노래라는 뜻을 지닌 음악용어였으나, 근래에 국문학자들이
노랫말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논의하는 바람에 일반인들에게는 문학적용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음악계에서는 ‘시조창(時調唱)’과 ‘시조시(時調詩)’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시조는 가곡, 가사와 함께 주로 상류사회 선비들에 의하여 발달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주 없이 무릎장단
만으로도 노래할 수 있고, 평시조 선율 한 가지만 익히면 수백 곡 이상의 시조시를 얹어 부를 수 있어
특정 층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불려졌다. 그래서 파생된 종류도 많으며 창법이 다양하고 쉽게 익힐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반면 능숙한 창법 구사가 어려워 예로부터 “시조에는 명창이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시조를 부를 때는 마지막 구절인 ‘하노라’, ‘하느니’ 등의 노랫말을 생략하고 부르지 않는다.
아래 우조 시조창 ‘월정명’은 우조시조(羽調時調) 월정명(月正明)을 노래한 것이다.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 등은 계면조 선법인데 비하여, 우조는 평조(우조)선법과 계면조 선법을 혼용하여 노래하는
시조이다. 이 ‘월정명’은 남창가곡 평롱(平弄)의 사설로도 연주되는데, 숙종 때의 박상간(朴尙侃)이란 분이
지은 시조로 알려져 있다. 남창가곡에서는 감월하의 시조 노랫말과는 다르게 종장이 ‘아희야 저 달을
건져스랴 완월장취(翫月長醉)허리라’로 되어있다.
초장 : 월정명(月正明) 월정명(月正明)커늘 배를 저어 추강(秋江)에 나니
(달이 참으로 밝다, 달이 참으로 밝다 하기에, 배를 타고 가을 강에 나가니)
중장 :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가운데 명월(明月)이라
(물 아래 하늘이 펼쳐있고, 하늘 가운데 밝은 달이로구나.)
종장 : 선동(仙童)아 잠긴 달 건저라 완월(玩月) 하게
(신선의 시중드는 동자야, 잠긴 달 건저라. 오래 오래 달을 즐길 수 있게)
[우조 시조창 '월정명', 김월하]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一到 滄海) 허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 허니 쉬어간들 어떠리
조선 중종 때의 명기(名妓)인 황진이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이 시조는 이중적 의미로 유명하다. 표면적으로는 흐르는 시냇물이 바다에 닿으면 다시 못 오니 쉬어 가라는 것이지만,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는 속뜻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김월하]
우리는 이 시조를 학교에서 국문학적 시각으로 배워 황진이가 이 시조를 써서 상대에게 전달해줬을 것으로 인식해왔다.
하지만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에는 이 시조가 불린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황진이는 한때 이름을 떨쳤다. 종실(宗室)인 벽계수2가 스스로 지조와 행실이 있다 하여 항상 말하기를 ‘사람들이 한 번 황진이를 보면 모두 현혹된다. 내가 만일 당하게 된다면 현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쫓아버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이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벽계수를 유인해왔다. 때는 늦가을이었다. 달밤에 만월대에 오르니 흥이 도도하게 일어났다. 진이가 문득 소복단장으로 나와 맞이하며 나귀의 고삐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명월은 자신의 자를 인용한 것이며, 수(守)는 수(水)로 대신했으니, 그 자리에서 보는 경치를 그대로 노래로 옮긴 것이다. 벽계수는 달 아래 한 송이 요염한 꽃을 대하고 또 그 목소리가 마치 꾀꼬리가 봄 수풀에서 지저귀고 봉황이 구소(九霄)에서 우는 것 같음을 들으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해서 나귀 등에서 내렸다. 진이가 말하기를 “왜 나를 쫓아내지 않으세요?” 하니, 벽계수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그 때 부른 노래가 바로 이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였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조선의 수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깨달아 얻는 즐거움은 결코 다른 사람이 짐작할 바가 아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송악산 자락의 화담(‘꽃 피는 연못’이라는 그의 호는 이 지명에서 연유되었다) 옆에 초막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던 서경덕에게는 그의 명성을 듣고 개성 일대와 서울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서경덕은 출신 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 제자들 중에 황진이가 있었다. 황진이는 대제학을 지냈던 소세양과 10년 면벽의 지족선사를 정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게 한 뒤 화담 서경덕을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서경덕은 명성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경덕에게서 우주의 철리, 인성의 본질, 인간의 참된 삶과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황진이는 그곳에서 서경덕과 영원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황진이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글을 남겼는데, 그중 ‘오성(이항복)과 한음’의 한음(漢陰) 이덕형이 지은 「송도기이(松都奇異)」3가 꽤 신뢰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선조 37년(1604년) 시재어사(試才御史)로 송도에 파견되었을 때, 이덕형이 진복이라는 서리의 아버지에게서 황진이의 이야기를 듣고 지은 글이다.
"진이(진랑)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娼妓)다. 진이의 어머니 현금은 꽤 얼굴이 아름다웠다. 18세 때 병부교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이 단아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또한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에 와서 기둥에 기대서서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물을 청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으며 돌려주면서 “너도 시험 삼아 마셔보아라” 하였다. 마시고 보니 그것은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진이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선녀라고 불렀다. 개성유수 송공(송염 또는 송순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부임했을 때 마침 절일(節日)을 당하였다. 낭료(郎僚)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잔치를 베풀었는데, 진랑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가냘프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를 아는 사람으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었다. 한 번 진이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은 것이로군!” 하고 기꺼이 관대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물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하고는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여러 종들이 붙잡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모두 물러갔다.
송공이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붉게 분칠한 여인이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떨기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왔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된 잔치에서 손님들 중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것은 대개 그의 첩이 발 뒤에서 엿보고 전과 같은 변을 벌일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叵羅,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진랑은 얼굴을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를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이때 송공이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하였다.
악공 엄수는 나이가 일흔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 안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하였다. 처음 진랑을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하였다. 노랫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洞府, 신선이 사는 곳)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 하였다.
이때 조사(詔使, 중국에서 오던 사신)가 본부(本府)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 선비와 부인)들과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길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우두머리 사신이 진랑을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 관(館)에 이르러 통사(通事,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천하절색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진랑이 비록 창류(娼流)이긴 했지만 성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예(賤隸)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화담 서경덕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니, 화담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이 어찌 절대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에 본부의 어사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 진복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진랑과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진랑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하였다. 나는 묻기를 “진랑이 이술(異術)4을 가져서 그랬던가?” 하니 노인이 말하기를 “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다.“5
[황진이 묘, 황해북도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소재]
참조 :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2012, 신정일), 창악집성(하응백. 2011. 휴먼앤북스), 김월하정가전집(정인봉).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국악정보(2010. 국립국악원, 전라북도)
- 이능화(李能和)가 지은 책으로 1927년 한남서림(翰南書林)에서 간행되었다. 내용은 신라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 말기까지 역대 기녀들에 관계되는 모든 실상(實狀)을 상세히 밝혔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을 비롯하여 각종 문집과 야사 등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고증근거로 하고, 그에 입각하여 서술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 벽계수(碧溪守, 1508년 ~ ?)는 조선의 왕족이다. 세종의 서자 영해군의 손자로, 이름은 이종숙(李終叔)이다.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묘는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에 있다. 벽계수는 거문고에 능하고 호방하여 풍류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진이를 만났을 때는 정 4품 수(守)의 관직에 있을 때로 추정되고 있다. (위키백과) [본문으로]
- 이덕형(李德泂)이 쓴 송도에 얽힌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야담 설화집. [본문으로]
- 요술이나 마술 같은 이상한 술법 [본문으로]
-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전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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