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귀양살이에도 급이 있었다. 3

從心所欲 2018. 7. 2. 20:09

 

[김홍도 「사계풍속도병」 中 <후원야연>, 파리 기메미술관]

 

 

유배지에 도착하면 압송관은 유배인을 유배지 고을 수령에게 인계하고, 수령은 죄인을 보수 주인(保授主人)에게 위탁한다. 보수주인은 집 한 채나 방 한 칸을 유배인의 거주지로 제공하고 유배인을 감호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대개 그 지방의 유력자나 형편이 다소 나은 사람들이 지정되었다. 배소에 있는 유배인의 생활비는 그 고을이 부담한다는 특명이 없는 한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의 생활은 사실상 상당 부분, 해당지역의 관찰사나 수령에 의해 좌우되었다. 유배인의 신분과 처지 그리고 유배지의 형편에 따라, 일정한 거주 지역을 마련하고 집집마다 날짜를 정하여 돌아가며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고을의 백성에게 거두어 유배인이 거처하는 곳의 보수주인에게 주기도 하였다.

 

유배인에 대한 대우는 천차만별이어서 혹독한 보수주인을 만나게 되면 유배인들이 굶는 것도 예사였다. 물론 유배인의 가세가 넉넉한 경우에는 본가에서 보내온 돈으로 집을 구입하거나 지을 수도 있었으며 살림살이도 평소의 일상과 같이 이어나갈 수도 있었다.

세종 31년인 1449년에 유배인의 처첩 및 미혼자녀는 함께 살게 하고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기혼자녀도 오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에 가족 일부나 전부가 따라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정조 때에는 이런 조항이 잘못 적용되면 전 가족이 유배지로 이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므로 주의해서 형률을 적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가족이 하나 둘 씩 유배지에 따라와 살다가 결국 그곳에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유배지에 따라가 사는 것은 금전적 어려움이 따를 뿐만 아니라 생계에 위협도 따르고 집안이 쇠잔해질 우려가 있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외딴 섬에 유배되면 현실적으로 가족이 따라가서 사는 것이 무리였다. 그래서 대개는 혼자나, 종이 따라가든가, 아니면 가족들이 종종 왕래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노상알현도> 또는 <반상도>, 김득신]

 

 

유배인의 유배지에서의 행동 반경은 군현(郡縣)안치냐 위리안치냐에 따라 달라진다. 군현안치는 유배지로 지정된 고을 안에서의 행동이 자유로웠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다. 하지만 위리안치는 배소가 집으로 한정되어 원칙적으로 집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추사 김정희의 경우다. 위리안치라고 해서 다 울타리에다 가시나무를 두른다든지 대문을 잠가 원천적으로 출입을 봉쇄하는 것은 아니다.

가시나무를 두르는 가극안치나 대문을 외부에서 걸어 잠그는 것과 같은 특별한 처분은 조정에서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있는 대역죄인, 그 중에서도 주로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왕족들에 대한 형벌이었다. 사형에 처하고 싶어도 대의명분이 약하여 당장 사형을 시키지 못하지만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막으면서 웬만하면 그 안에서 죽기를 바라는 그런 형벌집행이다. 추사는 위리안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하인들이 번갈아 오가며 추사의 수발을 들고 아들들도 다녀갔으며 초의선사 같은 경우는 반년이나 머물면서 추사와 같이 지냈다.

 

위리안치형을 받더라도 직접 신체적 구속을 당하거나 가족 및 외부 접촉이 차단되지는 않았으며 특히 절도나 극변에 안치되는 경우,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섬에 갇혀있는 상태라 유배인들에 대한 구속이나 감시는 정해진 규정보다는 느슨한 편이었다. 물론 관할 수령의 재량권에 달린 일이었다.

유배인은 유배지를 이탈하지 않아야 했고 관아는 이를 감시할 책임이 있었다. 그렇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포졸이 집밖에서 지키는 일은 없었다. 대신 점고(點考)라는 제도가 있어 한 달에 두 번 유배인을 불러 유배지를 이탈했는지 여부를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고을에 유배온지 오래되었거나 정치적으로 별 영향력이 없는 유배인들에 대해서는 점고를 생략하는 일도 많았다 한다. 그러다 보니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생겨나, 정조 7년(1783)에는 죄인들이 유배지에서 도망하는 일이 부쩍 많아진 원인이 고을 수령이 점고를 엄격히 하지 않은 탓으로 보고 죄인이 도망하면 해당 고을 수령을 금고 6년에 처하도록 한 일도 있었다. 정조 후반에는 지방에 파견되는 암행어사에게 유배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시찰하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고을 수령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유배인들은 골칫거리였다. 특히 유배인들이 많이 몰리는 지역은 문제가 심각했다. 유배지라는 곳이 험지라 그렇지 않아도 형편이 어려운 지역인데 유배인이 늘어날수록 지역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도 늘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갹출(醵出)이나 관의 보조, 보수주인의 자부담 모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일부러 영양가 떨어지는 음식을 먹여 영양실조로 유배인을 죽게 만드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정조 8년(1784)에는 천재로 힌하여 농작물의 피해가 심각한 읍에는 죄인을 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 고을에 여러 명의 유배죄인이 몰리지 않도록 각처에 분산시키는 정책도 취하였다. 정조 10년(1786)에 기장, 사천, 고성 등 경상도의 재해가 심한 읍에 죄인이 10명이 넘게 보내져서 궁핍한 고을이 견디기 어렵다는 보고가 있자 이에 한 고을의 정배죄인이 10명을 넘지 못하도록 정하기도 하였다. 유배인들 또한 서당을 열어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글씨를 써 팔아서 생활 물품을 마련하기도 했다. 장사를 하거나 날품팔이도 했고 그것마저도 어려운 경우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해야 했다.

 

 

[김홍도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圖帖)》 中 <서당>. 26.9 x 22.2cm, 국립중앙박물관]

 

반면 유배인들이 유배지에 끼친 긍정적 영향도 있었다.

지역적으로 오지인 유배지에 학문의 뿌리를 심어준 것이다. 정쟁의 결과로 유배형을 받았을 뿐 유배죄인들의 상당수는 소위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의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고명한 학자들의 가르침은 유배지에서는 생각도 못할 귀한 기회였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서 서당을 열어 양가의 자제들뿐만 아니라 불제자들까지 가르쳤다. 길재 정몽주의 맥을 이어온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김굉필은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제자로 삼고 학문을 전수하였다. 워낙 많은 유배인들이 몰렸던 제주도도 이런 후광을 입은 대표적 지역이다.

유배인들은 또한 훈장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름대로의 학문을 연구하고 지역의 지식인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지역의 지식인의 핵심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하면서 <목민심서>를 쓴 것을 비롯하여,형인 정약전은 유배 생활 15년 동안 흑산도 근해의 어류, 해초, 바다 새 등 227종의 이름과 분포 등을 《자산어보》라는 이름으로 기록했는데 지금도 그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구운몽》은 숙종 때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이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유배지에서 쓴 것이고, 송강 정철이 유배지인 전남 담양에서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보길도에서 지은 <어부사시사>와 <오우가>, 거기다 추사의 <세한도>까지 우리 문학을 대표하는 빼어난 저서와 작품들이 모두 유배지에서 나온 것들이다.

 

법에 정한 유배에 관한 조항은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원칙이 바뀌고, 실제 운영면에서도 원칙과는 많은 차이를 보였다. 법에 따르면 유형을 가는 유배인은 무조건 장 100대를 맞게 되어 있었다. 물론 대명률에 따라 속전이라는 이름 하에 금전이나 포(布)를 내고 매 맞는 것을 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반에 가면 명색이 관료 정도가 되면 장형을 받고 유배 가는 일은 거의 없어질 정도로 정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는 경우에는 장형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다.

 

옛날 관료들은 당쟁 때문에 귀양 가고 요즘 공직자들은 개인의 영달을 좇다 감옥에 간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위한 일로 고초받은 공직자는 눈 씻고 봐도 찾기 힘든데, 죄값을 치르는 중에도 공직자들은 음으로 양으로 배려를 받아왔다. 종종 공직자들이 관련된 재판 판결문에 공직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해 공헌한 점을 감안하여 형을 감한다는 공감 1%도 안 가는 문구가 등장한다. 그 정도 배려를 받으려면 자리에 있을 때 일이라도 열심히 했어야 한다. 공직에 있으면서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은 죄를 묻는 법이 하루 빨리 입법되기를 소망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시사상식사전(박문각),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나무위키,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2011,휴머니스트), 역사로 통하는 고전문학(2012.사씨 남정기), 문화원형백과(2005.한국콘텐츠진흥원) 등의 자료를 참조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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