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귀양살이에도 급이 있었다 2

從心所欲 2018. 6. 24. 11:06

유형(流刑)은 원래 기한이 없이 종신을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 일종의 무기징역형인 셈이다. 징역형인 도형(徒刑)은

1년부터 시작해서 6개월 단위로 5등급이 있었지만 가장 긴 형기(刑期)가 3년이라 사실은 단기 징역형이다.

 

유형은 관아에 구금되지 않아 신체가 조금 더 자유롭다는 차이만 있을 뿐 실상 유배지가 감옥이다. 얼마나

귀양살이를 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로 그것은 오직 왕의 마음에 달렸다. 김정희는 9년, 정약용은 18년

귀양살이를 했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생활 15년 끝에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거기서 숨을

거뒀다. 물론 운 좋게 바로 풀려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왕의 마음이다. 유배죄인의 처지에서는 왕이 있는

궁전을 향해 날마다 절이라도 하고 시(詩)로 왕에 대한 일편단심을 읊조리며 기약 없이 왕의 마음 바뀌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관아사진, 구글이미지]

 

 

사극에 등장하는 귀양 가는 죄인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때로는 칼까지 쓰고 나무 창살 속에 갇힌 상태로

함거(檻車)1라고 부르는 소달구지에 실려 포졸들에 의해 호송되는 모습이다. 과연 그랬을까?

 

유배지가 결정되면 의금부나 형조에서는 유배인을 귀양지(배소:配所)까지 압송해 갈 압송관을 배정하고

유배인에게 귀양지로 출발하도록 한다. 유배자가 관직자일 경우에는 의금부에서, 관직이 없는 경우에는

형조에서 관할하였다. 두 경우는 출발부터 다르다.

관직자의 경우는 의금부에서 유배지를 배정하고 이를 알려 주면 유배자가 본가(本家)에서 출발하는데, 압송관과

동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관직자에게는 국가에서 말과 음식을 제공하였고, 노비나 아들이 시종하고 갈 수도 

있었다. ‘죄인을 압송(押送)한다’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유배 길이었다.

 

[국내 유일의 유배문학관을 자랑한다는 경남 남해유배문학관에서 만들어 놓은 조형물]

 

그러나 벼슬이 없는 일반 사족은 형조에서 유배지를 배정하고, 본인이 형조에 나가서 명을 기다렸다가 역자

(驛子)2가 형조에 와서 죄인을 인계받아 직접 압송해 가서 다음 관할지에 인수인계하였다. 이들은 유배길에

소용되는 경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였기 때문에 재산이 넉넉지 못하거나 동료, 친인척이 많지 않은 사족들의

경우에는 유배길 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유배에 가는데 탈 말과 의식을 장만하느라 가산을

처분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압송관이 유배 길에 필요한 물품 또한 유배인이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으며,

압송관 중에는 무리한 금품 요구를 하거나 무례히 구는 폐단도 허다했다.

 

반면 관직자는 달랐다. 유배인이 관직자일 때에는 유배 길목의 수령들이 말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을 조정에서

허용했다. 그래서 유배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유배자와 정치적 견해를 함께하는 동료 관료들 또는 경유지역의

수령들에게서 향응을 제공받았다. 성종 때 이후로는 종묘사직에 관련된 유배인, 즉 역모죄가 아닌 경우는 경유지

지방관이 술과 고기를 보내주고 전송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 같은 사례는 조선후기에도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직 복귀 가능성이 높은 유배인의 경우는 유배지와 경유 지역의 수령들의 대접이 더욱 융숭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선조 때 이항복은 북청으로 유배 가는 길 29일 중 하루를 제외한 28일 내내 모두 경유지 수령과 역촌(驛村)3에서

후한 접대를 받았으며 유배지에서는 병마절도사로부터 집과 노비들까지 제공받아 지냈다 한다. 또한 경종 때에

갑산에 위리안치된 윤양래는 경유지방관들로부터 받은 물품이 너무 많아 말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조선시대 영향력 있는 관료들의 유배 길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 사례들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31세 때 함경도 경원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부산의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을

받았다. 윤선도가 이배를 가게 되자 수령이 많은 물품과 함께 노비 40여 명, 말 20여 필을 제공하는 한편 지나는 길목에

있는 고을에 미리 통지하여 접대를 잘 하도록 지시까지 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윤선도는 아직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성균관 유생 신분이었기에 신빙성은 의심된다. 오히려 윤선도를 유배 보낸 세력들이 윤선도를 모함하기 위하여

퍼뜨린 낭설일 수도 있고 윤선도의 집안이 워낙 재산이 막대하여 자비로 준비한 유배 행차의 풍경을 과장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윤선도가 유배 길에 조생이라는 기생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위로하자 그 총명함에 감탄하여 시를 지어 주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그의 유배 길이 죄인의 행차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압송관은 유배인을 귀양지까지 직접 압송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실제로 동행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유배인이

벼슬아치일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동행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고 한다. 유배인과 압송관이 각자 자신의 여정에 따라

별도로 길을 가서 저녁에 숙박지에서 확인하는 정도이거나, 심지어는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한 뒤에 압송관이

당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유배인이 유배길에 오르면 정해진 기일 내에 귀양지에 도착해야 하였겠지만 얼마 만에 유배지에 도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조선후기에는 대략 하루 평균 80-90리를 가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사례는 일률적이기 않았으며 신분과 위리안치 여부에 따라 거리의 가감이

있었다고 한다.

 

조정에서의 양반 관료들에 대한 유배지 결정은 의금부의 의견보다 국왕의 의지에 의해 확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유배지 가운데 풍토가 척박하여 유배인이 생활하는데 많은 불편이 있었던 함경도의 극변4 지역과 전라도,

경상도의 도서(島嶼) 지역이 유배지로서 꺼리는 곳이었으나 사화를 비롯한 정쟁에 연루된 관료들 중에는 이들

지역에 유배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중기부터 말기에 이르면 변경이나 내륙으로 유배 보내지는 경우가 드물고

거의가 유인도, 무인도를 가릴 것 없이 물도 솟지 않고 생활수단조차 없는 절해의 고도에 보내졌다.

 

 

근래에는 제주도갸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휴양지로 꼽히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안전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이 확보된 이후의 일이다. 변변치 않은 배로 험한 바다를 건너야 했던 그 옛날, 제주도로 유배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주도는 해로(海路) 9백리, 중죄대벌

(重罪大罰)이 아니면 감히 여기에 부처(付處)하지 않는다. 조야(朝野) 모두가 그 때문에 무서워했다」고 했다.

제주도는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기도 했지만 기후 변화가 심하고, 물자를 얻기도 어려워 사람이 살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제주도에 유배된 사람의 숫자는 다른 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고

유배죄인들의 신분도 높았다는 사실은 치열한 정쟁과 무관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제주도 가운데서도 추사가

유배되었던 대정현은 대표적 유배지로 주로 중죄인들이 유배되던 곳이었다.

 

 

 

이 글은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2011,휴머니스트),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시사상식사전(박문각),

역사로 통하는 고전문학(2012.사씨 남정기), 문화원형백과(2005.한국콘텐츠진흥원) 등의 자료를 참조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1. 예전에 죄인을 실어 나르던 수레. 함거는 죄인이 처형장에 갈 때 타는 것이었다. [본문으로]
  2. 역참에 소속되어 그에 관련된 각종 업무와 물자 조달을 부담하던 역리(驛吏)와 일반 역민(驛民) [본문으로]
  3. 역촌(驛村) : 역참(驛站)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역참은 중앙과 지방 사이의 명령 전달, 관리의 사행(使行) 및 운수(運輸)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된 교통 및 통신 기관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중앙집권체제의 지향에 따라 역참제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보여 수십 차례의 개편이 반복되었다. 조선시대 역참제의 개괄적인 모습은 ‘경국대전’에서 41역도 516역의 전국 역로망체제로 완성되었다. 그 후에는 큰 변화 없이 그 체제가 한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봉수제(熢燧制) ·파발제(擺撥制) 등이 운영되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극변(極邊) : 지극(至極)히 먼 변두리, 먼 변경(邊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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