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귀양살이에도 급이 있었다 1

從心所欲 2018. 6. 22. 16:18



[다산초당]


추사 김정희는 위리안치 처분을 받았음에도 제주 읍내의 오현단을 방문했는가 하면 한라산 일대를 돌아보기도

했다. 또한 대정향교의 유생들과 교류도 하고 원근 각처에서 배우러 찾아 온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도 귀양살이 중에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고 종종 다산초당을 빠져나와 만덕산 고개길을 넘어 만덕사

(지금의 백련사)의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 담소도 하며 다도(茶道)의 경지를 높이기도 했다. 모두 우리가 

그간 들어왔던 귀양살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다. 정약용은 군현(郡縣)안치라 고을 내에서만은 행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웠다 치더라도 집안에 꼭 틀어 박혀있었어야 할 김정희는 어떻게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오솔길]


조선시대의 형벌에는 다섯 가지가 있었다. 이를 오형(五刑)이라 하는데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이다. 이는 중국의 ≪대명률≫을 따른 것이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즉위 교서에 모든 공사 범죄의 판결은

≪대명률≫1을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발표한 데서 비롯되었다. 태형(笞刑)과 장형(杖刑)은 매를

때리는 것이고 도형(徒刑)은 징역형, 류형(流刑)은 유배 즉 귀양이고 사형(死刑)은 죽이는 벌이다.2


태형은 5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로, 죄수를 형틀에 묶고 하의를 내려 엉덩이를 노출시킨 다음 엉덩이를

한 대씩 때리면서 세는 형벌이다. 장형은 태형보다 무거운 형벌이나 처벌 방식은 태형과 같고 단지 회초리

크기만 달랐다. 대명률에는 형구(刑具)의 크기가 명시되어 있었는데 현재 단위로 계산하면 장형에는 대두

(大頭, 굵은 쪽)의 지름이 약 1cm,  소두(小頭, 가는 쪽) 지름 약 0.7cm, 길이 약 1m의 잘 다듬은 가시나무가

 사용되었고 태형에는 대두 약 0.84cm , 소두 0.53cm의 굵기에 역시 1m 길이의 가시나무가 사용되었다.

모두 몽둥이 보다는 회초리에 가까운 굵기와 길이였다.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굵은 몽둥이에 끝이 넓적한 형구는 곤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곤형(棍刑)에 사용되었다.

곤형은 버드나무로 만든 곤장으로 죄인의 볼기와 허벅다리를 번갈아 치는 형벌로 오형과는 별도로 영조 21년

(1745년)에 간행된 『속대전(續大典)』에 처음으로 규정되었다. 군무(軍務)에 관한 사건, 궁궐 난입자, ​도둑,

송범(松犯 : 소나무를 불법 벌목한 죄인) 등에 한하여 시행하도록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남용되는 일이

많았다. 곤장은 길이, 너비, 두께를 달리하여 중곤(重棍), 대곤(大棍), 중곤(中棍), 소곤(小棍)과 특별곤형에

사용하는 치도곤으로 나뉘었다. 치도곤(治盜棍)의 말뜻은 '도적을 다스리는 몽둥이'로 길이 약 173cm, 두께는

약 3cm로 넓적한 형태인 다른 곤들과 달리 둥근 형태였으며 치도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도형은 요즘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형벌로, 일정 기간 동안 죄인을 관아에 구금하고 노동을 시키는 형벌이다.

도형을 받게 되면 장형도 같이 받았다.

사형에는 목을 매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 그리고 몸을 여섯 부분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

(凌遲處死)의 세 가지가 있었다. 사형의 집행은 세분화하여 사형을 선고하더라도 감형(減刑)을 전제로 하는

일률(一律), 죽인 뒤에 그 시체를 거리에 내거는 효시(梟示), 시기를 기다렸다가 목을 졸라 죽이는 교대시

(絞待時),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목을 졸라 죽이는 교불대시(絞不待時), 어느 시기를 골라 베어 죽이는 참대시

(斬待時), 사형이 선고되는 즉시 죽이는 참불대시(斬不待時), 독약을 주어 죽게 하는 사약(賜藥), 시체를 여러

도막으로 잘라서 각처에 보내 백성들에게 구경시키는 육시(戮屍) 또는 전형회시(典刑回示), 그리고 능지(凌遲)

등이 있었는데, 참형이 가장 많았다.

능지처참(陵(凌)遲處斬)이라고 더 잘 알려진 능지처사는 대역죄(大逆罪)나 패륜을 저지른 죄인에게 과하던

최대 극형이다. 언덕을 천천히 오르내리듯(陵遲) 고통을 서서히 최대한으로 느끼면서 죽어가도록 하는 잔혹한

방식이다. 죽은 시체나 생명이 있는 상태에서 사지와 목을 오거(五車)에 따로따로 매달고 말이나 소를 달리게

하여 찢어서 토막 내는 거열형(車裂刑)도 이에 속한다. 세조 때 사육신과 그 공범자에 대한 처벌에 있어서 죄응

능지처사(罪應凌遲處死)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거열형에 처하고 백관 앞에 효수 전시의 부가형을 가하였다.

거열형은 조선 중기 이후로는 그 예가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관참시(剖棺斬尸)는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의 관을 갈라 시체를 꺼내 목을 베는 형벌이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

고통은 없겠지만, 산 사람도 아니고 망자(亡者)의 시신을 다시 파내 훼손하는 형벌은 본인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유형은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벽지(僻地), 절해고도(絶海孤島), 원지(遠地)에 보내 격리하는 형벌이다.

귀양, 정배(定配) 등으로 표현하고 또 간단히 배(配)·적(謫)·방(放)·찬(竄)·사(徙) 등으로도 불렀다. 귀양의

원말은 귀향(歸鄕)으로,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을 귀향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초에는

방축향리(放逐鄕里)3의 뜻으로 쓰이다가 후기에 가서 유배의 뜻으로 변했다.

조선 시대에 유형은『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반드시 장형을 함께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죄의 경중에

따라 장 100에 유 2,000리, 2,500리, 3,000리의 3등급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이런 명률의 유형제는 중국을

대상으로 한 형벌이었으므로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는 명률을 적용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한양에서 남쪽

끝까지 해 봐야 기껏 1,000리도 되지 않는 거리인지라, 빙빙 돌고 돌아 정해진 거리를 채우고 유배지로 갔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세종 12년인 1430년에 우리 실정에 맞도록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제정하였다.

100리를 1식(30리)으로 환산하여 각각 900리, 750리, 600리로 조정되었다. 유형을 집행하는 지역에 따라 그

배소(유배지)도 명시하였는데 경기도와 충청도를 제외한 전국 각 고을에 고루 지정되었다. 일례로 서울, 경기,

개성지역의 죄인을 유배 보낼 때의 배소는 아래와 같이 정하였다.


구분

유삼천리 배소

(流三千里配所)

유이천오백리 배소

(流二千五白里配所)

유이천리 배소

(流二千里配所)

경성·경기·

유후사4

경상, 전라, 평안, 함길도 내 30식외 빈해각관(息外濱海各官)5

경상, 전라, 평안, 함길도내 25식외각관(息外各官)

경상, 전라, 평안, 함길도내 20식외 각관



유형은 집행 방법에 따라 부처(付處)와 안치(安置)로 나눈다. 부처는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을 가까운

지역에 유배시키는 것으로 거처할 곳을 자원할 수 있는 자원부처(自願付處), 고향에 유배되는 본향(本鄕)부처,

가까운 도에 보내 그곳 수령이 살 곳을 정하는 중도(中道)부처 등이 있었다.

안치는 부처에 비해 좀 더 무거운 형벌이다. 유배 지역 내에 일정한 장소를 지정하고 그 안에 거주를 제한하는

것으로 자원(自願)안치와 본향(本鄕)안치 같은 가벼운 것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열악한 섬에 유배시키는 절도

(絶島)안치와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위리(圍籬)안치가 있었다. 위리안치의 경우는 왕족 또는

중신 등 주로 역모에 연루된 죄인들에게 많이 적용된 형벌로 그 지역 지방관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개인적인

활동이나 주민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통상 위리안치를 울타리에 가시덤불을 쌓는 가극안치(加棘安置)와

혼용하여 가시나무 대신으로 쓴 탱자나무가 전라도에 많기 때문에 전라도 연해의 섬으로 귀양을 많이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위리안치가 반드시 가극안치는 아니었기에 신뢰하기 힘든 주장이다.


조선시대 전국의 유배지 중에서 가장 험한 곳은 북쪽 변방이나 외딴 섬이다. 그중에서도 도망갈 가능성이 거의

없고 생활환경이 열악한 절도(絶島)가 가장 혹독한 곳이었다. 실제 유배지로 지정된 지역은 삼수, 갑산6

함경도와 평안도의 국경지역, 남해안의 여러 섬들이었다. 절도(絶島:외딴섬)는 물자도 궁핍하고, 생활환경도

극도로 열악하여 섬 생활에 익숙지 않은 유배죄인의 삶을 옥죄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땅도 넓지 않고,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흑산도, 추자도 등과 같은 절도는 유배지 가운데서도 최악의 곳으로 여겨졌다.


[남해안 섬, 구글사진]



[추자도, 오마이뉴스 사진]


조선 시대 유배지로 이용된 빈도수를 보면 제주도, 거제도, 진도, 흑산도, 남해, 해남 등의 순서라고 한다.

세종 때의 규정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바닷가에 한정되었지만 실제로는 많은 섬들이 유배지로 선정되었다.

특이한 점은 부산의 동래가 12번째, 기장이 14번째 순위라는데 당시 부산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지기도 했지만

생활 여건도 열악했던 듯하다.

(계속)



이 글은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시사상식사전(박문각),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2011,휴머니스트), 역사로 통하는 고전문학(2012.사씨 남정기),

문화원형백과(2005.한국콘텐츠진흥원) 등의 자료를 참조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1. 대명률(大明律) : 중국 명(明)나라의 형률서. 조선에서는 실제적인 활용을 위해 이두(吏讀)로 자구(字句)를 직해하고 윤색하여 1395년(태조 4)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를 간행하였다. 그 뒤 500년 동안 조선의 현행 형법전으로 활용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2. 고대 중국 주(周) 나라 무렵의 오형(五刑)은 묵(墨:이마에 글자를 새기는 벌), 의(劓:코를 베는 벌), 비(剕:발목 또는 뒤꿈치를 자르는 벌), 궁(宮: 생식기를 없애는 거세), 대벽(大辟:사형)이었다.(한시어사전, 2007.국학자료원) [본문으로]
  3. 관직을 삭탈하고 고향 시골로 쫓아냈던 형벌로 유배보다 한 급 가벼운 형벌 [본문으로]
  4. 조선 초기에 개성(開城)을 맡아 행정 사무를 보던 유후(留後)가 관할 행정구역 [본문으로]
  5. 30식외 빈해각관 : 900리 바깥 바다에 가까운 고을 수령의 관리 하에 둔다는 의미 [본문으로]
  6. 삼수(三水)는 함경남도 북서쪽 압록강 지류에 접하고 있는 지역이고 갑산(甲山)은 함경남도 북동쪽 개마고원의 중심부에 있는 지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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