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율곡 이이는 왜 강릉에서 태어났을까?

從心所欲 2018. 5. 30. 15:00

 

<오죽헌>

 

 

율곡 이이는 강릉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가 살던 오죽헌에서다. 이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의 집은 서울이었다. 그런데 이이는 왜 아버지가 살고 있던 서울집이 아니라 외가에서 태어나게 되었을까?

여자는 결혼하면 시가와 친가에서 모두 출가외인으로 취급받아 일생 다시 친정집을 찾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조선시대에, 그것도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가 친정집에서 출산을 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혹시

이이의 부모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조선시대에도 요즘처럼 산후조리의 편의를 위해

친정집에서 출산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일까?

 

<김은호 作 율곡이이 초상>

 

 

기록에는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신사임당의 외가가 있는 강릉에서 혼인을 했고 그 12년 뒤에 셋째 아들 율곡을

강릉에서 낳았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혼인 풍습은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인데 신랑이 산부 집으로

가 혼인을 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율곡이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에는 혼인 때에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가 이원수에게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가도 서운하지 않았는데 그대의 처만은 내 집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는 구절이

있다. 신명화의 말은 혼인 후에도 딸을 그냥 자신의 집에 있게 하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남성 중심적, 부계적

사회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조선시대에 장인이 사위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더 충격적인 사실은 신사임당이 시어머니를 처음 본 것이 혼인 3년 후이고 신사임당이 시댁에 들어와 완전히

정착한 것은 혼인을 하고도 무려 19년이 지나서라고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칭송받는 신사임당이.....

 

혼인을 가리키는 우리말식 표현에 '장가간다‘, ’시집간다‘는 말이 있는데 원래 우리나라 고유의 혼인방식은

‘장가(丈家)들기’였다고 한다. 즉, 신랑이 장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 때의 혼인

풍습은 양가 간에 구두로 결혼이 약속되면 여자 집에서는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고, 정한 날 저녁 무렵에

신랑이 신부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신부와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는 과정을 거쳐, 신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지어놓은 별채에서 신부와 자고 그 때부터 처갓집에서 결혼생활을

했다고 한다. 처갓집에서 지은 작은 별채를 ‘사위 집’이라는 뜻의 서옥(壻屋)이라고 하며 이런 혼인 풍습을

서옥제라 부른다. 이 혼인 풍습이 데릴사위제와 다른 점은 데릴사위는 남자가 처가에서 평생을 살지만,

서옥제는 사위가 자식을 낳아서 장성할 때까지만 머문다는 것이다. 사위는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처가에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나중에 처를 처갓집에서 데리고 나오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성경에 야곱이 외삼촌의

집으로 가 레아, 라헬과 결혼하여 자식들을 데리고 숙곳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너무나 흡사하다.

 

<기산 김준근의 '장가가고'. 캐나다 로얄온타리오박물관 소장>

 

 

고구려의 이러한 혼인제도는 그 후로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져왔는데 이런 혼인 제도를

‘사위가 며느리 집에 머무는 혼인’이라는 뜻의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상적 유교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왕조에서는 이런 혼인 풍습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사대부 집안의 혼인을

<의례>1의 ‘사대부의 혼례'에 의거하여 육례(六禮)2를 치르도록 했지만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절차인

친영(親迎)3에서 우리 전래의 혼인 풍습과 중국의 풍습이 충돌을 일으켰다. <의례>나 주희의 <주자가례>

같은 중국식은 친영 절차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혼례식을 치르고 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태종 때부터 나라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다가 세종 대에 이르러 세종이

이 문제에 칼을 빼든다. 우리의 혼인 풍습이 <의례>에 명시된 중국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철저한

유학자 세종은 김종서에게 우리나라에서 중국식의 친영례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풍습은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라고

명을 내린다면 그 노비나 피복과 살림살이들을 여자 집에서 모두 준비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곤란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남자의 집이 부자라면 신부를 접대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가난하다면 부담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남자의 집에서도 이를 꺼려 왔던 것입니다.”

김종서의 대답에서 당시 사대부 계급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혼인 방식을 중국식으로 바꾸면, 과거 남성의

노동으로 지급하던 혼인의 대가를 당시 노동을 하지 않던 사대부 계급으로서는 노비, 피복, 살림살이를 여자

집에 대신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자 집에서도 중국식 친영을 쉽게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대안을 내놓았을까?

김종서의 답변에 세종은 “이 예법이 갑작스레 실시될 수 없다면 왕실에서 먼저 행함으로써 사대부들에게 본받게

하면 어떠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실제로 두 번이나 자신의 딸과 아들의 혼인 때 중국식 친영방법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왕실에서 이렇게 직접 본까지 보이며 앞장을 섰으니 당연히 혼인 풍습이 바뀌었을까?

아니다. 일제는 물론 예전 우리 정부도 그렇게 없애려 했던 설날 풍속을 끝까지 살려내 3일 연휴로 만들고 대체

휴일까지 만들어낸 민족이 그렇게 만만할 리가 없다.

왕실은 당일로 신부를 데려다가 혼인하는 것이 예법이 되었고 <국조오례의>4에도 종친과 모든 문무관들은

(중국식)친영례로 해야 한다는 규정이 실렸으며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친영례가 서서히

행해지기는 했어도 대다수의 사대부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세종이 직접 시범을 보인지 근 80년이 지난

중종 때(1512년)에도 “경대부의 집에서 혼인할 때에는 친영의 의식을 한결 같이 예문(禮文)에 따라 하라”고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 화담 서경덕 같은 분이 제안한 우리의 전래 방식과 주자사례를 절충한

‘반친영’도 등장한다. 혼인식을 신부 집에서 치루고 3일 동안 머무른 후 신랑 집으로 돌아와 친영례를 치르는

방식이다. 우리식과 중국식을 섞었기 때문에 반친영(半親迎)이라고 부른다.

 

<신사임당 초상>

 

 

그런데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은 중종의 그와 같은 교시가 있은 10년 뒤에 결혼하면서도 우리 전래의

혼인 방식을 따랐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이 결혼한 신부의

집이 신사임당의 친가가 아니라 외가였다는 것이다. 신사임당의 어머니도 우리 전래의 혼인풍습에 따라,

혼인한 뒤에도 남편 집이 있는 서울로 가지 않고 계속 친정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신사임당을 낳고 그

집에서 딸을 결혼까지 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신사임당에게는 외가가 사실상의 친가였던 셈이다. 태종 때의

실록에 기록된 “(고려의) 옛 습속에 따르면 혼인예법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외가에서 자라게 합니다”는 말이 1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사회 풍습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이 혼인 3년 만에 시어머니를 처음 보게 된 이유에 대해,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사임당의 아버지인 신명화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상을 마친 뒤 올라와 시어머니에게 신부의 예를 치렀다고 설명한다.

조선시대에도 시집간 딸이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극히 드문 사례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이렇게

신부의 예를 치룬 뒤에는 다시 또 친가로 내려가 지내다가 시어머니가 너무 연로하여 가사를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결혼 19년 만에 드디어 시댁으로 들어오게 된다. 근대화된 우리 사회에서조차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흉이 될 수도 있었던 이런 모습이 오히려 조선시대 당시에는 전혀 흉이 되지 않는 사회풍습이었던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우리나라는 백 년 전만 해도 처가살이 풍습이 남아있어 외척이 본친과 거의 다름이

없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우리 전래의 풍습은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고, 18세기에 들어서야 가부장제가

확고해지면서 비로소 중국식에서 유래한 시집가기가 일반화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뿌리가 깊을 듯한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는 속담도 이런 사정을 보면 조선 후기에 나왔을 것이고 오랫동안

악명을 얻어온 여성의 시집살이 역사가 실상 남자들의 처가살이 역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율곡의 묘는 경기도 파주 자운서원에 있다. 아버지 이원수의 고향과 선산이 모두 파주인 까닭이다.

 

 

  1. 주례(周禮), 예기와 함께 삼례(三禮)로 일컬어진다. 공씨댁(공자의 옛집) 벽 속에서 찾아냈다고 전해지는 금문의례(今文儀禮) 17편을 가리킨다. 노나라 고당생(高堂生)이라는 사람이 연구해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의례’라는 책명이 붙여진 것은 당나라 문종 때 9경(經)을 석각(石刻)하면서 주례와 예기 그리고 이 책을 합쳐 3례라고 일컬으면서부터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2. 육례(六禮) : 전통사회에서 행하던 혼인절차의 여섯 가지 의식(儀式). 곧,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징(納徵)·청기(請期)·친영(親迎)을 말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본문으로]
  3. 6례의 여섯번째 절차로 신랑이 직접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오늘날 결혼예식에 해당된다. [본문으로]
  4.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조선 전기 신숙주, 정척 등이 왕명을 받아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에 대한 예법과 절차 등을 그림을 곁들여 편찬한 예전(禮典)이다. 세종이 저작을 명했으나 완성되지 못하고 세조를 거쳐 성종 5년(1474년)에야 완성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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