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왕의 이름 2

從心所欲 2018. 6. 9. 19:26



[종묘, 배병우 作, 1996]


왕에게 주어지는 호칭에는 묘호와 시호 외에 신료들이 왕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올리는 호칭인 존호(尊號)도

있다. 존호를 올릴 때는 존숭(尊崇) 여부에 대한 발의(發議)를 하는데 왕이 직접 전교(傳敎)나 비망기(備忘記)로

하명하거나 또는 대신과 중신들이 상소로 건의하고 임금이 윤허하는 경우가 있다. 존호를 올리게 되는 동기는

대략 왕, 왕대비, 대왕대비 등의 50, 60, 70세 등의 탄신을 축하하거나 금상왕의 치적을 찬양하는 경우, 또는

선대의 왕이나 왕비의 덕을 찬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

존호를 올릴 때는 존숭도감을 설치하고 존호(尊號)를 올릴 때 필요한 의식과 절차 등을 기록하여 책을 만든다.

이것을 존숭도감의궤[尊崇都監儀軌)라고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존숭도감의궤는 모두 68종으로 이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1604년(선조 37)에 만든 ≪선조재존호도감의궤 宣祖再尊號都監儀軌≫ 1책으로, 선조와

선조비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대해 존호를 추상(追上) 또는 가상(加上)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정식 이름은 '태조 강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 康獻 至仁啓運聖文神武 大王)'

인데, 여기서 태조(太祖)는 묘호, 강헌(康獻)은 시호, 지인계운성문신무(至仁啓運聖文神武)는 존호이다.

왕들에게는 묘호, 시호, 존호 외에도 이름인 휘(諱)2, 관례를 행하면서 받는 호칭인 자(字)3, 자신이 스스로를

표시하기 위해 붙이거나 스승 또는 친구들이 붙여주는 일종의 별명인 호(號)도 있고 묻힌 능 이름인 능호(陵號)

도 있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은 성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휘는 도(祹), 자는 원정(元正),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莊憲), 존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능호는 영릉(英陵)이다. 왕이 되기

전에는 충녕군(忠寧君)4에 봉해졌고, 태종 12년에는 다시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된 적이 없지만 왕과 관련된 칭호로 연호(年號)라는 것이 있다. 연호(年號)는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5이다. 중국에서는

본래 건국기년(建國紀年)으로 일관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해를 세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명칭의 연호는 없었다. 따라서 군주를 상속하면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를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漢)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14년 무렵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연호 제도가

정비되어 한 무제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6년을 단위로 나누어 건원(建元, 기원전 140년~기원전 135년), 원광

(元光, 기원전 134년~기원전 129년), 원삭(元朔, 기원전 128년~기원전 123년)...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이다. 신라에서는 536년(법흥왕 23)에 건원(建元, 536∼550)을 최초의 연호로 사용하였고 조선

왕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의 제후국을 자인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 하다가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패배하여 종주국 행세를 못하게 되자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고쳐 개국 505년

1월 1일로 쓰면서 독자적으로 건양(建陽)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 글은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인물한국사(정성희), 시사상식사전(박문사) 등을 참조, 인용하여 작성되었습니다.



  1. 출처: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본문으로]
  2.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원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는 생전의 이름 그 자체를 휘라 일컫게 되었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3. 실제의 이름(實名, 本名)이 아닌 부명(副名)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웬만큼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성명 외에 자와 호(號)를 가졌다. 두 가지 이상의 이름 가지기를 좋아한 풍속인 ‘복명속(復名俗)’이나, 실제의 이름 부르기를 꺼린 풍속인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이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있었던 까닭이다. ‘자’는 중국에서 비롯된 풍습이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4. 군(君)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종실이나 외척, 공신에게 주어졌던 작호(爵號)이다. 조선시대 들어 봉군제(封君制)는 여러 번 개정을 거친 끝에 [경국대전]에서 종실의 경우, 왕의 적자(嫡子)는 대군(품계 없음), 서자는 군(품계 없음)으로 정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5. 나라나 민족이 역사적으로 경과한 햇수를 계산할 때, 어떤 특정한 연도를 기원으로 하여 그로부터 햇수를 세는 방법(표준국어대사전) [본문으로]

'우리 옛 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양살이에도 급이 있었다 2  (0) 2018.06.24
귀양살이에도 급이 있었다 1  (0) 2018.06.22
왕의 이름 1  (0) 2018.06.09
율곡 이이는 왜 강릉에서 태어났을까?  (0) 2018.05.30
피휘(避諱)  (0) 2017.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