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떤 대학생과 얘기하는 도중 자신의 이름을 '무슨 자(字), 무슨 자, 무슨 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후로도 같은 일을 계속 겪으면서 젊은 사람들이 설 배워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얼마 전에는 나이 60은 되어보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혹시 내가 잘 못 알고 있나 하는 의구심을 거졌던 일도 있었다.
예전에 윗사람과 대화할 때 부모님 함자(銜字)는 "○씨 성(姓)에 ○자, ○자 쓰십니다."로 답하고 자신의 이름은 씨(氏) 대신에 가(家)를 써서 '성은 ○가이고 이름은 ○○입니다"라고 대답하는 법이라고 웃어른에게 배웠다. 상대방이 이름을 잘 못 알아 들은 경우에는, 이름에 쓰는 한자를 훈을 달아 무슨 ○, 무슨 ○를 쓴다고 말씀드리라는 얘기도 곁들어 들었었다. 이 경우에도 자신의 이름에는 절대 자(字)자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름을 소중히 여겨 실명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던 우리의 옛 풍속1에서는 기껏 공들여 지은 이름은 놓아두고 아명(兒名)부터 시작해서 자(字)2나 호(號)를 쓰고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터라, 윗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불손한 일이어서 붙여 부르지 못하고 한 자, 한 자 글자를 떼어 말할 수밖에 없었던 풍습 때문이다. 옛날에는 이름 하나 말하는 것도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했을까?
유학이 지배하던 사회에 한자문화권인 한국, 중국, 일본에는 '피휘(避諱)'라는 제도가 있었다. '휘(諱 : 숨길 휘, 꺼릴 휘)'는 원래,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명(名)이라 하는 것에 대칭되는 말이었지만3 후에는 생전의 이름 그 자체를 휘(諱)라고 부르게 되었다. 포괄적으로는 죽은 사람의 생전 이름을 높여서 이름 앞에 붙이거나, 부를 때 이름이나 성함이라는 말 대신 쓰는 글자로, 죽은 제왕, 성인, 상급자나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자 앞에 존경의 뜻으로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피휘(避諱)'란, 일반 백성들이 평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이러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자(字)에 쓰인 글자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경우 그 글자를 피하거나 고쳐서 달리 쓰는 것을 말한다. 피휘에는 황제나 왕의 이름을 피하는 국휘(國諱)와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가휘(家諱) 및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성인휘(聖人諱) 등이 있다. 중국에서 국휘의 경우 황제는 7대, 왕은 5대 위의 이름까지 피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국가 사이의 외교문서나 집안 사이의 서신 등에서도 서로 피휘를 지켰고 왕의 이름에 쉬운 글자가 들어 있으면 나라 전체에 불편이 생기기 때문에 왕족의 이름은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짓되 주로 외자로 이름을 짓는 관습이 생겼다. 예를 들어 세종의 이름은 도(祹)이었고, 영조는 금(昑), 정조는 산(祘)으로 모두 잘 쓰지 않는 한자 하나만을 이름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 왕 뿐만 아니라 중국의 피휘에도 신경을 썼어야 했다. 일례로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중문(中門)인 흥례문(興禮門)의 경우, 원래는 1426년(세종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려 그렇게 불려왔는데 1867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는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다.
이름에 쓰여진 글자 하나 가지고도 이렇게 복잡한 내력을 따져야 하는 사회에서 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입에 담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딱히 피휘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유대인에게도 이와 흡사한 풍습이 있다.
하나님의 십계명을 전하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최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20:7)라는 말씀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엄격하게 따랐으며 성경을 읽을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발음하지 않고 지나갔다.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오직 자음만 (영어식으로는 YHWH 또는 YHVH) 사용함으로써 누구도 정확한 발음을 알 수 없게 표기만 한 채 발음하지 않음으로써 정확한 음가(音價)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 표기에 아도나이(Adonai : ‘주님’, ‘나의 주’라는 뜻)라는 단어의 모음을 붙여 ‘여호와’(원래 음은 오히려 ‘야훼’에 가깝다고 함)라는 발음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A.D. 6-7세기경에 확정된 맛소라 사본의 학자들 역시 히브리 성경을 복사하면서 네 개의 히브리 자음만 베껴 쓰고는 그것을 발음하지 않았다고 한다.
풍습이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 윗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으려던 방편이 근래 와서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전달하면서 나름 예의를 갖추려는 마음으로 쓰는 것에 대하여 맞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평생에 내 이름을 '무슨 자, 무슨 자'라고 소개하지는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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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중국시사문화사전(2008, 도서출판 인포차이나),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라이프성경사전
- '실명경피속(實名敬避俗) [본문으로]
- 중국에서 비롯된 풍습으로, ≪예기 禮記≫에 의하면 “남자는 20세에 성년이 되어 관례(冠禮)를 마치고 성인이 되면 자가 붙는다. 여자는 15세로 결혼하게 되어 비녀를 꽂으면 또한 자가 붙는다”고 하였다. 본명이 태어났을 때 부모에 의해 붙여지는 데 비해 자는 윗사람이 본인의 기호나 덕을 고려하여 붙이게 되며 자가 생기면 본명은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흔히 윗사람에 대해서는 자신을 본명으로 말하지만 동년배 이하의 사람에게는 자를 쓴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도 자를 사용하나 손아래 사람인 경우, 특히 부모나 스승이 그 아들이나 제자를 부를 때는 본명을 사용하였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 휘는 원래 '왕이나 제후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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