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지금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예전의 국민학교 때.
"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들의 이름이라며 선생님이 가르쳐주는대로 따라 외운 덕분에 그나마 지금까지
조성 왕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기억하는 덕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왕의 이름들이 묘호였다는 사실은 그 후로
수 십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왕에게는 이런 호칭말고도 더 많고 복잡한 호칭이 있다는 사실도.
묘호(廟號)란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드리는 존호(尊號)1이다. 왕이 죽으면 주요 대신들과
담당부서가 의논해 묘호, 능호(陵號)를 동시에 정해 각각 3개를 올리면,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 임금들의 호칭은 생전에 불렸던 것이 아니라 사후에 붙여진 호칭인 것이다.
[종묘 추계대제, 2016년]
묘호는 원래 중국 황제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통일 신라 때 무열왕 묘호를 태종으로 정하자 제후국인
신라에서 천자의 칭호를 쓰는 게 불충하다며 당나라 고종이 시비를 걸어왔다. 그러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위업을 내세워 뜻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그 이후 다른 왕들은 묘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왕으로 불렸다.
고려시대에 묘호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전기에 중국은 송, 요, 금이 서로 각축하며 절대 패자가 없었던
까닭이다. 고려는 태조, 혜종, 정종, 광종으로부터 24대 원종까지는 자체적인 묘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 제25대 충렬왕부터는 원나라로부터 시호만 받고 묘호는 받지 못하여 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 이름에 충(忠)자를 넣어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야만 하는 수치도 당했다. 고려
왕들의 충자 돌림은 30대인 충정왕까지 6대간 계속되다가 공민왕 때 가서야 왕의 시호에서 ‘충’자를 뗄 수 있었다.
하지만 공민왕이라는 시호 역시 원나라가 약해지고 명나라가 강성해지면서 명나라에서 받은 시호였다. 고려는
자체적으로 공민왕에게 ‘경효(慶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 나마 우왕과 창왕은 모두 폐시(廢弑)되어 시호가
없고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새 왕조 조선에서 추증한 것이다.
[공민왕릉]2
묘호로는 조(祖)와 종(宗), 두 가지가 사용되었다. 조나 종을 쓰는 데는 꼭 일정한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조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국통(國統), 즉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쓰고, 종은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 붙였다. 이와 같이 조가 창업이나 중흥의 공업(功業)을 남긴 왕에게
붙인다는 원칙 때문에, 은연중 종보다 조가 격이 더 높다는 관념을 낳게 하였다. 조선조에 있어서 조의 묘호가
많은 까닭도 이러한 관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조 때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이거나 또는 재위 시에 큰 국난을 치렀던 임금은 대체로 조의
묘호를 가지게 되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 임진왜란을 치른 선조, 홍경래의 난을 치른 순조 등이
모두 그 예이고, 비록 반정은 아니라 하더라도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도 같은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임금으로 중종이 있다. 중종의 묘호도 인종 초에 왕이 교서를 내려 “선왕이
난정(亂政)을 바로잡아 반정을 하여 중흥의 공이 있으므로 조로 칭하고자 한다.”고 하자, 예관(禮官)이 “선왕이
비록 중흥의 공이 있기는 하나 성종의 직계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조로 함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중종으로
하게 되었다. 조의 묘호에 우월성을 인정함으로써 본래 종의 묘호이었던 것을 조로 바꾼 예가 많다. 선조도 본래
선종(宣宗)이었던 것을 광해군 8년 이를 선조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 때 윤근수(尹根壽)는 “업의 임금을 조라
칭하고 정체(正體)를 계승한 임금을 종이라 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고 하여 선조로 개호(改號)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인조 1년 정경세(鄭經世)는 “조는 공(功)으로써 일컫는 것으로 하등 좋고 나쁜 차이가 없는
것이니, 이는 본래대로 선종(宣宗)으로 복귀시킴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영조·정조·순조도 본래는 영종·
정종·순종이었던 것을 후세에 이를 모두 조로 고쳤던 것이다. 영조와 정조는 고종 때 고치고, 순조는 철종 때
개정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묘호는 창시 개국한 왕과 그의 4대조까지만 조(祖)를 붙이고 그 뒤의 왕은 종통을 잇는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종(宗)을 붙이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이 원칙을 지켜 후대 황제에게 거의
조(祖)를 붙이지 않았지만 조선은 신하들의 아첨으로 ‘祖'를 붙이는 경우가 꽤 있었다. 묘호제정의 원칙은
후기로 갈수록 모호해지고 당쟁과 세도정치 가운데 조(祖)를 남발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영조, 정조, 순조의
경우 3연속 조(祖)를 남발한 예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반정으로 축출되어 종묘에 들어가지 못해 왕자 시절
받았던 봉군 작호를 칭호로 쓰게 되었다. 200년 후에 묘호가 정해진 왕들도 있는데 2대 정종과 6대 단종이었다.
조선은 중국의 충실한 제후국이며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나라였음에도 묘호만은 끝까지 고수하고 유지했다.
[태조 건원릉]
묘호(廟號)가 왕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용도로 추증된 것이라면 시호(諡號)는
왕이나 사대부가 죽은 뒤에 그 공덕을 찬양하여 추증하는 호(號)를 가리킨다는 차이점이 있다.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두고 있는데,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주나라 주공(周公) 때부터 시법(諡法;시호를
의논하여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인 514년 법흥왕이 즉위한 뒤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贈諡)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왕과 왕비, 종친, 실직(實職)에 있는
정2품 이상의 문무관과 공신에게만 주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대상이 확대되었다.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3을 설치하여 증시(贈諡)를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일반 관리에 대한 증시는 봉상시(奉上寺)4에서 주관하였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수는 194자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나중에 봉상시의 건의에 따라 새로 107자를 첨가하여 모두 301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의 직품이 시호를 받을 만한 위치라면 후손들은 시호를 청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또 좋지 않은 글자가
쓰인 시호가 내려질 경우에도 다시 시호를 청하거나 개시(改諡)를 청할 수 없었다. 시호를 내리는 목적은 여러
신하의 선악을 구별하여 후대에 권장과 징계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글은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고전용어사전(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인물한국사(정성희), 시사상식사전(박문사) 등을 참조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린다 하여 올리던 칭호. (한국고전용어사전) [본문으로]
- 공민왕릉은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서쪽의 현릉(공민왕)과 동쪽의 정릉(노국대장공주)으로 구성된 쌍분이다. [본문으로]
- 도감(都監)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하기 위해 수시로 설립한 임시관서의 명칭이다. 기구의 성격 자체가 비상설적인 것으로 설치와 폐지 시기 및 기능은 일정하지 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하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태조 원년(1392)에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봉상시(奉常寺)를 두어 종묘(宗廟), 제향(祭享) 등의 일을 관장케 하였다. 봉상시는 제사를 관장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여러 시(寺) 또는 감(監)으로 불리는 관사(官司) 중에서는 최상위에 기재하였음.(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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