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1 - 정가(正歌)

從心所欲 2019. 4. 5. 11:35

 

[김홍도, <후원야연(後園遊宴)> 1 , 견본담채, 52.8×33.1㎝]

 

[신윤복,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상춘야흥(賞春野興)>, 지본채색, 28.2 x 35.6cm, 간송미술관]

 

 

위의 그림과 같은 상황에서 우리 조상들은 무슨 노래를 부르고 들었을까? 판소리나 민요를 부르고 들었을까?

 

‘우리 가곡’ 하면 흔히 이은상, 홍난파, 이흥렬 같은 이름들과 ‘가고파’, ‘봉선화’, ‘바우고개’ 같은 곡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런 곡들은 모두 1920년대 이후에 서양 음악의 영향을 받아 작곡된 것들로 예술가곡이라 부른다.

정작 우리의 전통 가곡은 따로 있다. 

 

우리의 전통 가곡은 우리와 낯설다. 1964년 국가가 판소리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하면서 아낌없는 제도적 지원으로 판소리가 우리의 대표적인 옛 소리로 자리를 잡았지만, 대신 다른 옛 소리들은 판소리의 위세에 묻혀 버렸다. 가곡도 그 중의 하나다.

 

우리의 전통음악은 크게 정악(正樂)과 속악(俗樂)으로 나누고 성악곡은 정가(正歌)와 속가(俗歌)로 나눈다. 이런 분류에 동의하지 않는 시각도 있지만, 정악과 정가는 일반적으로 감정을 정제하여 표현하는 반면, 속악과 속가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음악으로 간주된다. 정가(正歌)는 아정(雅正)하거나 정대(正大)한 노래라는 뜻으로, 일반 백성들에 의해서 구전되는 속가(俗歌)와 예술적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옛 노래를 분류할 때 속가에는 판소리, 잡가(雜歌), 민요, 병창(竝唱), 입창(立唱) 등이 속하고 정가에는 가곡(歌曲), 가사(歌詞), 시조(時調)를 꼽는다. 이 외에 불교음악인 범패(梵唄)와 무속음악인 무가(巫歌)는 종교음악으로 따로 분류하기도 하고, 시창(詩唱)2, 송서(誦書)3, 악장(樂章)4, 창사(唱詞)5같은 성악곡을 정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정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속도가 아주 느리다. 현대인의 감각, 특히 성질 급한 지금의 우리나라 사람들 감각으로는 참고 듣기 힘들만큼 느리다. 서양 메트로놈의 가장 느린 한계치인 40을 넘어서 ♩= 20의 속도를 보이는 곡도 있다. ‘천천히 걷는 빠르기로’ 또는 ‘느리게’ 로 해석되는 서양의 안단테(Andante)가 ♩= 80인 반면 가사는 ♩= 30~40 정도, 시조는 ♩= 30~35 정도의 빠르기이니, 느리기는 매한가지다.

둘째로는 노랫말의 모음을 길게 뽑아서 노래한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태평성대’라는 노랫말을 가곡으로 노래하면 “타으이~~~펴으~~허어어~~~엉 서어어헝다이이이~~~이이히~~이이”와 같이 ‘대’의 ‘ㅐ’를 ‘아으이’와 같은 형태로 발음하면서 노래한다. 우리말인데도 우리가 옛 노래 가사를 알아 듣기가 쉽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다. 모음을 이렇게 길게 뽑아서 노래하는 이유는, 긴 길이 속에서 발음이 변화되면서 농담강유가 생기고 농담강유가 정가의 아름다운 선율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셋째, 정가의 노랫말은 시조시(時調詩), 가사(歌辭), 한시(漢詩)와 운율적인 문학작품들이다. 특히 가곡과 시조는 모두 시조시(時調詩)를 노랫말로 삼는다. 우리는 흔히 시조라 하면 단순히 작품내용만을 생각하는데 본래는 시조를 단가(短歌)라 하여, 장가(長歌:고려가요 ·경기체가 등)에 비해 짧은 형식의 노래라는 뜻으로 호칭되었었다. 그러다 단가에 곡조를 맞추어 부르게 됨으로써, 이런 곡조를 영조때의 가객(歌客)이었던 이세춘(李世春)이 시조라 이름 붙였다6. 시조란 시절의 노래, 즉 시절가조(時節歌調)의 약칭으로서 시절가(時節歌)라고도 한다.

넷째, 정가를 부를 때는 속청이라고 하는 비단실을 뽑아내는 듯한 가느다란 목소리를 사용한다. 속청은 세성(細聲), 속소리, 세청 등으로도 불리는데, 가성(假聲)을 쓰는 것이다. 정가 중 남창가곡에서만은 속청이 금기이지만 여창가곡과 가사, 시조, 시창에서는 모두 속청을 사용한다. 하지만 높은 음역을 쉽게 부르기 위해서만 속청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중, 저음대에서도 독특한 미감을 자아내기 위하여 속청을 사용한다.

또 다른 정가의 특징으로는 감정을 절제하는 음악이라는 점을 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명상적이고 관조적 음악이라는 것이다.

 

정가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예술적인 성악곡은 가곡이다. 가곡은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 이라고도 불리며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신선의 노래’라는 표현도 한다. 시조시를 사설(辭說, 노랫말)로 하는 가장 오래된 노래로, 관현악반주에 맞추어 연주되는 전문가의 음악이다.

현재 전하는 가곡의 종류는 남창가곡이 24곡, 여창가곡이 15곡, 남녀창가곡이 27곡인데 이러한 가곡 종류의 숫자가 전체

악곡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악곡에도 노랫말인 시조시가 바뀜에 따라 선율이나 장단 수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실제 악곡 수는 훨씬 더 많다. 가곡의 긴 것은 10여분, 짧은 것은 3~4분 길이이지만 종류를 따라 모음곡 형태로 연주하게 되면 각기 2시간 이상이 걸린다.

 

여창가곡 <우조(羽調) 이수대엽(二數大葉)> ‘버들은’은 여창가곡 15곡 가운데 첫 곡이다. 사설은 작자 미상이기는 하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시조시(時調詩)이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구십삼춘(九十三春)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누구서 녹음방초(綠陰芳草)를 승화시(勝花時)라 하든고

 

'봄날 꾀꼬리는 마치 옷감을 짜듯이 부지런히 버드나무 위아래를 오가며 푸르름을 짜 나가는데, 그것을 지켜보는 작가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느라 봄 세 달 동안을 시름을 짜내며 힘들게 보냈다. 그렇게 어려운 시간이 지나 녹음방초가 왔는데, 그것을 남들은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니, 누가 푸른 풀과 잎들이 꽃보다 아름다운 때라 하는가' 하고 탄식하는 내용이다.

 

초장, 중장, 종장의 3장으로 구성된 시조시가 가곡에서는 5장으로 나누어 부르고 연주된다.

대여음(大餘音) → 초장(初章) → 2장 → 3장 →중여음(中餘音) → 4장 → 5장의 순서다.

 

시조시 가곡
    대여음    관현악 반주(전주)
초장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초장    버들은 실이 되고
    2장    꾀꼬리는 북이 되어
중장  구십삼춘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3장    구십삼춘에 짜내느니 나의 시름
    중여음    관현악 반주(간주)
종장  누구서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든고 4장    누구서
    5장    녹음방초를 승화시라 하든고

 

가사와 시조는 반주 없이 연주해도 무방하지만 가곡은 반드시 반주가 함께 해야 한다. 반주에는 거문고, 가야금, 세피리, 대금, 해금, 장고 연주자 각 1명씩을 원칙으로 하되 양금, 단소가 곁들여지기도 한다고 한다. 가사와 시조는 반주의 선율이 노래 선율을 그대로 따라가는 ‘수성가락’인데 비하여, 가곡의 반주는 대개 노래 선율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면서도 노래 선율과는 별개로 연주되는 부분들이 있다.

 

이수대엽 ‘버들은’의 빠르기는 ♩= 20 수준으로 가곡 중에서 가장 느린 곡이라는 의미로 ‘긴 것’이라고도 불린다. 이 짧은 노랫말에 연주 시간이 무려 9분이 넘는다. 한없이 느린 속도로 노래하게 함으로써 ‘여인의 탄식’을 절로 자아내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곡이 느릴수록 긴 호흡이 필요하고 그것을 표현해내기 위한 깊은 음악성이 요구되는데, 고(故) 김월하 선생이 부른 이 곡은 ‘강함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조화된 명곡’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고리타분한 가락처럼 들릴 수도 있는 전주 부분의 대여음이 끝난 후 들려오는 가두(歌頭)인 ‘버들은...’은 음과 음색이 전혀 예상 밖이다. 옛 글에 근세 가곡의 거장이었던 금하(琴下) 하규일(1867∼1937)에게 여창 가곡을 배우던 제자들이 ‘버들은’이라는 이 석자를 배워 그의 마음에 들기까지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삼사년은 족히 걸렸다는 부분이다.

 

 

 

 

 

 

참조 :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도서출판 보고사), 창악집성(하응백. 2011. 휴먼앤북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류무형문화유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김월하정가전집(정인봉)

 

 

  1. 바위 그늘이 시원한 후원에서 간단한 음악연을 베풀고 있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낙관은 없으나, 인물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날카롭고 정확한 선묘가 30대 김홍도의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 김홍도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문으로]
  2. 시창(詩唱) : 음률을 붙여서 한시(漢詩)를 읊는 것 [본문으로]
  3. 송서(誦書) : 음률(音律)을 넣어서 글을 읽는 시창(詩唱)의 한 갈래 [본문으로]
  4. 악장(樂章) : 조선 초기에 발생한 시가 형태의 하나. 나라의 제전(祭典)이나 연례(宴禮)와 같은 공식 행사 때 궁중 음악에 맞추어 불렀으며, 주로 조선 왕조의 개국과 번영을 송축하였다. ‘용비어천가’가 대표적. [본문으로]
  5. 창사(唱詞) : 궁중무용을 출 때 춤추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 [본문으로]
  6.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석북 신광수(申光洙)의 '관서악부(關西樂府)'에 “일반적으로 시조는 장단을 배제한 노래로서 장안의 이세춘으로부터 전래된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이세춘으로부터 시조창이 시작되었다고들 하나 이세춘 이전에 시조창이 있었고, 그 형식의 완성자가 이세춘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창악집성, 2011. 하응백)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