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조선경국전 18 – 부전 경리

從心所欲 2022. 6. 17. 11:57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정도전이 중국의 주례(周禮)대명률(大明律)을 바탕으로 하여, 치국의 대요와 제도 및 그 운영 방침을 정하여 조선(朝鮮)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規範體系書)로 후에 조선 법제의 기본을 제공한 글이다.

내용은 먼저 총론으로 정보위(正寶位)ㆍ국호(國號)ㆍ정국본(定國本)ㆍ세계(世系)ㆍ교서(敎書)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하고, 이어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 육전(六典)의 담당 사무를 규정하였다.

육전(六典)국무(國務)를 수행하는 데 근거가 되는 6()의 법전을 의미한다. 통상

이전(吏典) · 호전(戶典) · 예전(禮典) · 병전(兵典) · 형전(刑典) · 공전(工典)을 말한다. 육전이란 말은 원래 주례(周禮)에서 나온 말로, ()나라 때는 치() ·() ·() ·() ·() ·()6전으로 되어있었다. 정도전은 이를 치전(治典)ㆍ부전(賦典)ㆍ예전(禮典)ㆍ정전(政典)ㆍ헌전(憲典)ㆍ공전(工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김윤보의 「풍속도첩」중 소작료 운반, 19세기말, 지본수묵, 개인소장]

 

부전(賦典) : 재정경제(財政經濟)에 관한 법전.

<경리(經理)>
▶경리(經理) : 일을 경영하고 관리함.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빈부나 강약의 차이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며, 토지에서의 소출이 모두 국가에 들어갔으므로 나라도 역시 부유하였다.

토지 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지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토지를 차경(借耕)하여 일 년 내내 부지런하고 고생하여도 식량은 오히려 부족하였고, 부자는 편안히 앉아서 손수 농사를 짓지 않고 용전인(傭佃人)을 부려서도 그 소출의 태반을 먹었다. 국가에서는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그 이득을 차지하지 못하니, 백성은 더욱 곤궁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졌다.
호강자(豪强者) : 향촌에서 국가 권력과 대립되었던 토착화한 지방 세력. 토호.
용전인(傭佃人) : 소작인.

이에 한전제(限田制)나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것은 고식적인 방법에 불과한 것이나, 역시 백성의 토지를 다스려서 이를 백성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는 것이다. 당(唐)나라의 영업전(永業田), 구분전(口分田) 제도도 역시 인구를 계산하여 토지를 주어서 스스로 경작하게 하고 그 전조(田租)를 받아서 국가의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식자(識者)들은 그 토지 제도가 바르지 못했음을 비난하였다.
【안】 당나라의 수전(授田) 제도는 1부(夫)가 1경(頃)의 토지를 받아서 그 중의 80묘(畝)는 구분전으로 삼고, 20묘는 영업전으로 삼았다.
 영업전(永業田)ㆍ구분전(口分田) : 영업전은 영원히 업주권(業主權)을 부여받은 토지. 구분전은 어느 사람이나 분배받는 토지. 당나라 제도에서 18세 이상의 남자는 토지 1( : 1백 묘()), 독질자(篤疾者)나 폐질자(廢疾者) 40묘를, 과부는 30묘를 지급받아, 그 중 20묘는 영업전으로 하고 나머지는 구분전으로 하였다.
전조(田租) : 전지(田地)의 조세(租稅). 전세(田稅).

전조의 토지 제도에는 묘예전(苗裔田)ㆍ역분전(役分田)ㆍ공음전(功蔭田)ㆍ등과전(登科田)과 군전(軍田)ㆍ한인전(閑人田)을 두어서 그 전조를 받아먹게 하였는데, 백성이 경작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개간하고 점유하는 것을 허락하여 관(官)에서 간섭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노동력이 많은 사람은 개간하는 땅이 넓고, 세력이 강한 사람은 점유하는 땅이 많았다.
【안】 고려의 토지 제도는 당(唐)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묘예전을 전대의 국왕 후손에게 분급(分給)하고, 역분전을 관작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인품에 따라서 주고, 공음전을 공신 및 귀화인(歸化人)에게, 등과전을 등과인(登科人)에게 특별히 주었다.
군전(軍田) : 군인에게 지급된 토지.
한인전(閑人田) : 한인(閑人)에게 지급된 토지.고려 시대의 한인은 6품 이하의 관인 자녀로 아직 벼슬하지 않고, 시집가지 않은 자를 가리키거나 토호(土豪) 출신의 무인(武人)을 가리켰다.

그러나 힘이 약한 사람은 또 세력이 강하고 힘이 센 사람을 따라가서 그의 토지를 빌어 경작하여 그 소출의 반을 나누었으니, 이것은 경작하는 사람은 하나인데 먹는 사람은 둘이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져서 마침내는 스스로 살아갈 길이 없어서 농토를 버리고 직업이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직업을 바꾸어 말업(末業 )에 종사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아! 그 폐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말업(末業) : 상ㆍ공업.

그 제도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게 되면서는, 세력가들이 서로 토지를 겸병하였으므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에는 그 주인이 더러는 7~8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고, 전조를 바칠 때에는 인마(人馬)의 접대며, 청을 들어 강제로 사는 물건이며, 노자로 쓰이는 돈이며, 조운(漕運)에 드는 비용들이 또한 조세의 수효보다 배, 또는 5배 이상이나 되었다. 상하가 서로 이익을 다투어 일어나서 힘을 겨루어 빼앗으니, 화란이 이에 따라 일어나고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고야 말았다.

전하는 잠저에 있을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私田)을 혁파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 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뜻을 같이한 2~3명의 대신들과 함께 전대의 법을 강구하고 오늘의 현실에 알맞는 것을 참작한 다음, 경내의 토지를 측량하여 파악된 토지를 결수(結數)로 계산하여 그 중의 얼마를 상공전(上供田)ㆍ국용전(國用田)ㆍ군자전(軍資田)ㆍ문무역과전(文武役科田)으로 나누어 주고, 한량(閑良)으로서 경성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자, 과부로서 수절하는 자, 향역(鄕驛)ㆍ진도(津渡)의 관리, 그리고 서민과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공역(公役)을 맡은 자에게도 모두 토지를 주었다.
상공전(上供田) : 왕실 경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지급된 토지.
국용전(國用田) : 국가의 제사ㆍ빈객 등 공공 경비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
군자전(軍資田) :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
문무역과전(文武役科田) : 현직 문무 관리에게 지급된 토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 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나은 게 아니겠는가?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김동주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