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조선경국전 27 – 부전 상공

從心所欲 2022. 7. 14. 14:49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정도전이 중국의 주례(周禮)대명률(大明律)을 바탕으로 하여, 치국의 대요와 제도 및 그 운영 방침을 정하여 조선(朝鮮)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規範體系書)로 후에 조선 법제의 기본을 제공한 글이다.

내용은 먼저 총론으로 정보위(正寶位)ㆍ국호(國號)ㆍ정국본(定國本)ㆍ세계(世系)ㆍ교서(敎書)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하고, 이어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 육전(六典)의 담당 사무를 규정하였다.

육전(六典)국무(國務)를 수행하는 데 근거가 되는 6()의 법전을 의미한다. 통상

이전(吏典) · 호전(戶典) · 예전(禮典) · 병전(兵典) · 형전(刑典) · 공전(工典)을 말한다. 육전이란 말은 원래 주례(周禮)에서 나온 말로, ()나라 때는 치() ·() ·() ·() ·() ·()6전으로 되어있었다. 정도전은 이를 치전(治典)ㆍ부전(賦典)ㆍ예전(禮典)ㆍ정전(政典)ㆍ헌전(憲典)ㆍ공전(工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 엘리자베스 키스  < 평양의 동문 (East Gate, Pyeng Yang)>,  목판화 , 1925 년 ]

 

부전(賦典) : 육전(六典)의 호전(戶典)에 해당하는 재정경제(財政經濟)에 관한 법전.

<상공(上供)>
상공(上供) : 대궐(大闕)에서 필요한 경비.

인군(人君)은 광대한 토지와 많은 인민을 전유하니, 그 소출의 부(賦)는 무엇이든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게 없고, 무릇 나라의 경비도 무엇이든 자기의 소용이 아닌 게 없다. 그러므로 인군에게는 사유 재산이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상공(上供)과 국용(國用)을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음식과 의복은 왕의 봉양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요, 분반(匪頒)은 왕의 사여(賜與)를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요, 진보(珍寶)는 왕의 완호(玩好)를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들을 모두 상공이라고 부른다.
인군(人君) : 임금. 군주(君主).
분반(匪頒) : 여러 신하들에게 물품을 나누어 주는 것, 또는 그 물품.
사여(賜與) : 왕이 신하에게 물품을 하사하는 것.
진보(珍寶) : 진귀한 보배.
완호(玩好) : 진기한 물건을 좋아하는 것.

《주례》로 상고하면, 각기 담당 관리를 두어서 상공에 필요한 물품의 출입과 회계를 맡게 했으나 인주가 사치스러운 마음이 생겨서 소비가 무절제하게 될지도 모르고, 또 담당 관리가 부정한 짓을 행하여 재물이 축나게 될지도 모를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총재로 하여금 총괄하여 절제하게 하여, 비록 인주가 사사로 쓰는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유사의 경리와 관계를 갖도록 하였다.
 
한나라와 당나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천자가 사유 재산을 갖게 되어, 군국의 재정과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재산의 출처를 보면, 산해(山海)나 어장에서 나오는 물산으로부터 세로 받아들인 것, 또는 주군에서 바친 사적인 헌물, 또는 백성들이 바친 상부(常賦)에서 액수가 초과되어 남은 것 등으로서, 국가의 경리에서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통섭(統攝)하여 국가 재정과 서로 엇갈리지 않게 하였으며, 흉년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그 재산을 내어서 굶주리는 사람과 군인을 먹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식자들은 천자가 사유 재산 가진 것을 비난하여,
“인군이 가인(家人)이나 근신의 행동을 바로잡지 못하여 사인(私人)을 두게 되고, 사인을 두게 되니 사비(私費)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사유 재산을 갖게 되는 것인데, 만사의 폐단은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 게 없다.”
하였으니, 경계함이 이렇듯 지극하였다.
 
전조에서는 요물고(料物庫)를 두어 왕실에 대한 식량 조달을 관장하게 하고, 사선서(司膳署)로 하여금 각종 반찬을 장만하는 일을 맡게 하였으며, 사온서(司醞署)에서는 술과 단술을 맡게 하고, 내부(內府)에서는 포백(布帛)ㆍ사면(絲綿)을 맡아서 의복을 지어 바치게 하였으며, 사설서(司設署)에서는 장막과 요[褥]를 맡아서 포설(鋪設)을 제공하게 하였다. 이들 관서는 모두 조사(朝士)가 맡게 하였고, 사헌부(司憲府)에서 수시로 감독하여 물품의 남고 모자라는 수량을 조사하게 하였으니, 《주관(周官)》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할 만하다.
충렬왕(忠烈王) 이래로 원(元)나라를 섬기기 시작하여 대대로 공주(公主)를 맞이하자 궁중 하인에 대한 비용이 많아지고, 연경(燕京)에 친조(親朝)하거나 그곳에 머무르면서 시위할 적에는 노비 등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덕천고(德泉庫)ㆍ의성고(義成庫) 따위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소속된 토지ㆍ노비ㆍ재산 등은, 혹은 내탕(內帑)의 일부를 떼어 팔아서 마련하거나, 혹은 왕씨 외가(外家)의 세업이거나 소출, 혹은 죄인에게서 몰수한 재산이거나 하여 국가의 경리와는 관계가 없었는데, 마침내는 인주의 사유 재산이 되어 버렸다.
 
전하는 잠저에 있을 때부터 헌의(獻議)하여, 이러한 사유 재산을 모두 혁파해서 국가 재산으로 귀속시키려 하였는데, 당시의 집권자가 이것을 완강히 거절하였기 때문에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혁파된 것이 열에 네댓은 더 되었다. 즉위한 뒤에는 5고(庫)와 7궁(宮)을 모두 공용으로 귀속시켰다.
5()7() : 5고는 사수(私需)에 속한 의성(義成)ㆍ덕천(德泉)ㆍ내장(內藏)ㆍ보화(保和)ㆍ의순고(義順庫). 7궁은 미상.  

옛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부(少府)의 금전(禁錢)을 혁파하여 대사농(大司農)에 귀속시켜 공용으로 충당하게 한 일이 있었는데, 사신(史臣)이 이를 칭송하여,
“능히 한 사람 개인의 사사로움을 극복하였다.”
하였다. 이제 전하의 처사를 옛날의 광무제의 그것에 견주어 보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다만 즉위 초에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무척 많고 그에 따라서 용도도 크게 불어났으나, 출납할 즈음에 유사가 지나치게 법문에만 구애되어 충분히 비용을 지급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일의 기회를 놓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법문을 적당히 가감 손질하였으니, 즉위 초에 내린 교서(敎書)와는 같지 않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편의를 따른 것뿐이고, 그 성법은 고치지 않았다. 신은 여기에서 상공에 관한 것을 적고 따라서 그 내용을 설명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절검을 존중하고 사리사욕을 극복한 전하의 훌륭한 뜻을 알게 하는 바이다.
소부(少府)의 금전(禁錢) : 천자(天子)가 사용하는 소부전(少府錢). 소부전은 주로 천자의 사용에만 공급되므로 금전이라 한다.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김동주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