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

조선경국전 29 – 부전 군자

從心所欲 2022. 8. 1. 11:15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정도전이 중국의 주례(周禮)대명률(大明律)을 바탕으로 하여, 치국의 대요와 제도 및 그 운영 방침을 정하여 조선(朝鮮)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規範體系書)로 후에 조선 법제의 기본을 제공한 글이다.

내용은 먼저 총론으로 정보위(正寶位)ㆍ국호(國號)ㆍ정국본(定國本)ㆍ세계(世系)ㆍ교서(敎書)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하고, 이어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 육전(六典)의 담당 사무를 규정하였다.

육전(六典)국무(國務)를 수행하는 데 근거가 되는 6()의 법전을 의미한다. 통상

이전(吏典) · 호전(戶典) · 예전(禮典) · 병전(兵典) · 형전(刑典) · 공전(工典)을 말한다. 육전이란 말은 원래 주례(周禮)에서 나온 말로, ()나라 때는 치() ·() ·() ·() ·() ·()6전으로 되어있었다. 정도전은 이를 치전(治典)ㆍ부전(賦典)ㆍ예전(禮典)ㆍ정전(政典)ㆍ헌전(憲典)ㆍ공전(工典)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부전(賦典)은 재정경제(財政經濟)에 관한 법전으로 호전(戶典)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조운(漕運)과 조창(漕倉). 두피디아. : 평안도지역과 함경도 및 제주도는 잉류지역으로 구분하여 조세를 서울로 운송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보관하였다가 군량미나 외국 사신의 접대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군자(軍資)>
▶군자(軍資) : 군대에 필요한 물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니, 공자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 군사를 넉넉하게 해야 할 것이다.”
라고 답하였다. 나라는 군사에 의지해서 보존되고, 군사는 식량에 의해서 생존하는 것이다.

공명(孔明 )의 치병술(治兵術)이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보다 뛰어난 것은, 그가 위(魏)나라를 정벌할 적에 위수(渭水) 연안에서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지구 전법을 쓴 때문이었다. 항우(項羽)는 백전백승의 자질을 타고난 사람이었으나, 하루아침에 군량이 떨어져서 전쟁에 지고 자신도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것을 보더라도 식량이라는 것은 삼군(三軍)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니,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공명(孔明) : 제갈량(諸葛亮)의 자().
관중(管仲)이나 악의(樂毅) : 관중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현상(賢相)으로 이름은 이오(夷吾). 제환공(齊桓公)을 도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다. 악의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장수로 한()ㆍ위()ㆍ조()ㆍ연()의 연합군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쳐서 70여 성을 빼앗았다.

그러므로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던 사람들은 군사만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식량도 다스렸으며, 식량의 수입만을 다스렸을 뿐 아니라 반드시 식량의 생산에 관하여도 배려하였다.
식량의 생산은 토지와 인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악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구릉(丘陵)과 수택(藪澤) 등 경작할 수 없는 지역이 전 국토의 10분의 8~9를 차지하고 있다. 거기다가 농사를 짓지 않고 놀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그 수효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경성에 살고 있는 사람을 헤아려 보면 수십만 명이 못 되지 않을 것이고, 또 도망하여 중이 된 자가 10만 명이 못 되지 않을 것이며, 자제로서 놀고 있는 자, 서민으로서 공역을 담당하고 있는 자, 수졸(戍卒)로 변방에 나가 있는 자, 공장(工匠)ㆍ상인(商人)ㆍ무격(巫覡)ㆍ재인(才人)과 화척(禾尺) 따위를 합치면 이 또한 10만 명이 못 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의지하여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가히 생산하는 사람은 적은데 먹는 사람은 많다고 하겠다.
수졸(戍卒) : 변경(邊境)이나 요해처(要害處)를 지키는 군졸.
무격(巫覡) : ()는 여자 무당, ()은 남자 무당.
재인(才人) : 고려와 조선 때 천한 직업에 종사하던 무리로 일명 재백정(才白丁)이라고도 한다유목민족인 달단(韃靼)의 후예로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기도 하고, 신라말 고려 초의 혼란기에 유입되었던 양수척(楊水尺)의 일부가 고려 후기에 재인으로 변모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화척(禾尺) : 후삼국으로부터 고려에 걸쳐 떠돌아다니면서 버들 그릇[柳器]을 만들거나 도살을 업으로 하는 등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인 양수척(楊水尺). 조선에 들어 세종 5년인 1423년에 재인(才人)과 함께 백정(白丁)으로 개칭되었다.

더욱이 농민들이 상장(喪葬)ㆍ흉년ㆍ질병으로 인하여 농사에 전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해마다 계절마다 맞이하는 빈객 접대와 제사 비용 또한 백성들이 마련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가히 일하는 사람은 느린데 쓰는 사람은 급하다고 하겠다. 그러니 군량이 어느 겨를에 풍족해질 수 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황지(閒荒地)를 개간하고 놀고 있는 백성들을 없애어 모두 농사에 돌아가게 하여, 백성들의 농사일을 살펴서 그들의 힘을 너그럽게 해 주고, 빈객 접대와 제사 의식을 통제하여 그 비용을 절약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렇게 한 뒤에라야 군량이 풍족해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군자감(軍資監)을 설치하여 군량을 저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군량의 수입과 지출의 액수만을 다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은 식량의 자체 생산 문제까지 아울러 논하여 편에 적어서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근본을 삼으려 한다.
▶군자감(軍資監) : 조선시대에 군량미 등 군사상에 필요한 물자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아. 본감(本監)은 서강에 있었고 이후 저장창고가 비좁아져서 지금의 소공동 지역인 송현(松峴)과 용산의 효창공원 옆에 추가로 분감(分監)이 세워졌다.

 

번역본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김동주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