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열려있는 문을 통해 건물 안을 들여다 볼 차례이다. 궁궐 정전의 어칸이나 대부분의 사찰 법당 정칸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면 어좌나 부처와 눈을 마주치게 되어있다.
아래 사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의 내부 모습이다.
임금님의 어좌와 주변 장식이 보인다. 계단이 달린 단(어탑) 위에 어좌가 있고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이
보이고 위로는 닫집이 보인다.
닫집의 '닫'은 '따로'의 옛말로 닫집은 '따로 지어놓은 집'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며 한자로는 당가(唐家)
라고 한다. 이 닫집의 기원에 대해서는 ‘부처님을 중앙에 모셨던 고대 불전에서는 금당(金堂)이 부처님 집
이었으므로 닫집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예불공간이 차츰 대웅전 안으로 들어가 불단이 뒤로 밀리면서 송구한
마음에 별도로 부처님 집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닫집’이라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햇볕을 막기 위해귀한 사람
머리 위에 씌웠던 우산인 산개(傘蓋)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산개, 진천 보탑사 목탑1,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지금 남아있는 사찰의 닫집들은 모양에 따라 운궁형(雲宮形), 보궁형(寶宮形), 보개형(寶蓋形)으로 나뉜다.
운궁형은 포작(包作) 기법을 사용하지 않은 간결한 구조로 앞쪽에 장식판재 만을 건너지르고 불상 위 천장에
구름, 용, 봉, 비천 등으로 장식한 천장을 가리킨다.
[운궁형 닫집, 봉선사2,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반면 사찰 닫집 중 가장 흔한 형태인 보궁형은 운궁형과 달리 독립된 집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섬세하게 짜여진
공포와 화려한 장식, 그리고 허공에 매달린 기둥(일명 헛기둥: 虛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닫집은 불국정토의
궁전을 상징하는데 ‘최고의 원형(原形)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일련의 위계적인 이미지에 해당되기 때문에
자체에 아무런 무게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고 기둥은 있으나 떠받치는 기능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촉수(觸手)나 걸려 있는 뿌리처럼 아래로 내려뻗어 있을 따름’이라는 보충해석도 있다.
아래 부석사 무량수전의 닫집도 보궁형인데 위에 짧게 달린 헛기둥들이 보인다.
그런데 운궁형이나 보궁형의 닫집과는 달리 보개형은 지붕을 천장 속으로 밀어 넣은 형태라 닫집이라기 보다는
천장의 한 종류로 분류하여 보개천장으로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아래는 봉정사 대웅전 내부 천장의 모습과 보개를 클로즈업한 사진이다.
근정전의 어좌 위의 닫집은 운궁형이나 그 안의 천장을 보개천장으로 만들어 두 마리의 용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다. 보개천장은 궁궐 정전에서 임금이 앉는 어좌 위나 불전에서 부처님 머리 위 정도에만 설치되는
특별한 천장이다. 일반적으로 우물천장 일부를 감실을 만들 듯 높이고 여기에 작은 첨차를 화려하게 짜 올려
장식한 다음 가운데는 용이나 봉황을 그리거나 조각해 장식한다.
어좌 앞의 근정전 한가운데의 천장에도 또 다른 보개천장이 있는데 여기도 구름 무늬 사이에 여의보주와
쌍룡을 조각하였다. 반면,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명정전 중앙천장에는 봉황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근정전에 조각되어 있는 용은 칠조룡(七爪龍)이다. 발톱이 7개인 용이라는 뜻이다. 황제나 왕이나 모두 용을
상징으로 쓸 수는 있었지만 발톱 수에는 차이가 있었다. 칠조룡은 중국의 황제를 상징한다. 중국의 제후급인
조선의 왕은 오조룡(五爪龍)이어야 한다. 그런데 근정전에 7조룡을 조각한 것에 대한 확실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흥선대원군이 왕권강화를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고종의 지위를 청나라 황제와 견주는
위치에 놓고자 하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고 조선 말기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과 연관지어 해석되기도한다.
붉은 색과 금색의 화려함으로 눈을 사로잡는 두 개의 목재 구조물은 앞의 작은 것이 어좌의 등받이 격인 등널
(배판)이고 뒤의 것은 곡병(曲屛)이라고 부르는데 곡병은 세 방향을 에워싸고 있는 세 폭 병풍과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다. 등널과 곡병은 사각형 격간이 층을 이루는 구조로 서로 짜임새가 비슷하다. 둘 다 중앙 머리 부분에
금색의 산 모양 문양을 얹고 있는데 이것을 서일상운문(瑞日祥雲紋)이라고 한다. 서기어린 햇빛과 상서로운
구름이라는 뜻의 서기상운은 고결한 인품과 기상, 또는 서기 충만한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로, 최고의 상서를
상징하는 장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등널과 곡병은 상설물이지만 흔히 용상(龍床)이라고 부르는 어좌는 정전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새로 설치했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근정전은 정전(正殿)으로 관원들이 임금께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조회를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좌를 행사가 있을 때마다 새로 설치했다고 하면 조회가 드문드문 있었다는 얘긴지
아니면 매일 어좌를 새로 만들었다는 소린지 어리둥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조회는 조하, 상참, 조참의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대조회라고도 부르는 조하(朝賀)는 정월 초하루와
동지, 그리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등에 거행되는 대규모 의식으로 왕세자를 비롯한 모든 품계의 신하들이 임금을
모시고 하례를 드리는 행사이며 때에 따라서는 외국의 사신들도 참석했다. 따라서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도
근정전과 같이 궁궐의 가장 중요한 전각인 정전에서 치러졌고 의상과 복색도 화려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정전은 항상 임금이 앉아있는 곳이 아니라, 조하 같은 대규모행사가 있을 때만 사용되는
특별한 공간이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어좌를 행사 때마다 새로 설치했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에 동지라는 절기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주역의 괘사로 보았을 때 동지는 모든 괘가 음(陰)이
되는 때로 그 다음날부터 양(陽)의 기운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기 때문이라고 힌다.
조회의 두 번째 형태인 조참(朝參)은 조하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의 의식이다. 원래는 ‘5일 조참’으로 불리던
별칭대로 5일마다 열리는 행사였는데 조하가 열리는 초하루와 보름을 빼고 나면 실질적으로는 월 4회 정도가
되었다. 『경국대전』에도 매월 4차례(5·11·21·25일) 열리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조참은 근정전이 아닌
근정문의 중앙에 남향으로 어좌를 마련하고 시행했는데 조참 때에는 한성에 있는 모든 관리가 참석하였으며
신하들은 품계에 따라 영제교(금천교) 남북에 갈라서서 대기하였다가 왕이 자리에 앉으면 전의(典儀)가 부르는
구령에 따라 4배하는 것으로 의식이 종료되는 아주 간단한 의례다. 하지만 모든 신하가 국왕을 알현할 수 있는
의식행사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조하와 조참이 규모 있는 의식행사였던 반면 상참(常參)은 매일 아침 거행되는 상견례이자 약식 조회였다.
상참은 고려 때부터 있던 제도인데 조선시대에 이 제도를 본격 실시한 것은 부지런하신 세종임금 때부터였다.
종6품 이상의 문무관이 매일 오경(五更: 새벽 3∼5시)에 검은 옷이나 검은 베옷(여름)을 입고 국왕을 알현하는
의식이었다고 한다. 새벽 3시∼5시!
조선시대 품관은 종6품 이상을 참상관, 정7품 이하를 참하관으로 분류하는데 참상관이라는 명칭은 바로 이
상참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관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참하관에서 참상관으로 오르는 것을 승륙(陞六)
또는 출륙(出六)이라 하여 관로(官路)의 한 관문으로 여겼다고 한다.
모든 제도가 그렇듯 조선왕조의 이러한 조회제도도 처음 만들 때의 의도와는 다르게 세월이 지나면서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점차 번거로운 의식을 탈피하는 쪽으로 변모해 갔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많은 비용이 드는
조하례는 생략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5일마다 했던 조참은 효종 대에 이르러 1년에 1회만 실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상참은 경연이나 차대와 같은 덜 형식적인 자리로 대체되면서 정전이 아닌 편전에서 치러졌다.
영조는 조선 초기의 의례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던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동안 얼마나 상참을
하지 않았으면 영조 때의 교리 김약로가 “상참하는 날에는 각사가 근무를 그만두는데, 상참은 바로 조종조에서
날마다 행하던 예절입니다. 지금 만약 날마다 상참을 행한다면 각사는 장차 업무를 볼 날이 없게 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상참을 하는 날에는 관리들이 근무를 하지 않고 상참이 끝난 뒤 모여서 뒤풀이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 글은 알기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2007.동녘), 한국고전용어사전(2001.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 전통
건축장식의 비밀(허균, 2013, 대원사), 문화원형백과(2002.한국콘텐츠진흥원), 두산백과 등을 참조, 인용하여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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