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좌 뒤에 있는 그림. 흔히 일월오봉도라고 부르지만 어좌 뒤에 있는 일월오봉도는 병풍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일월오봉병이라고 부른다. 미술사가였던 故오주석선생은 ‘TV사극에서 이 일월오봉병이 보이지 않는
왕은 조선왕이 아니다’라고 했다. 대궐에서는 물론이고 멀리 능 행차를 할 때도 따로 조그만 병풍을 준비했다가
멈추기만 하면 이 병풍을 펼쳤다. 조선시대 기록화에서도 빈 어좌 뒤에 일월오봉병을 그림으로써 왕의 존재를
대신했다. 한마디로 일월오봉병은 조선 국왕의 상징인 것이다. 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
또는 야외 행사 때에는 천막 안의 옥좌 뒤에, 왕이 죽었을 때도 빈전(殯殿)의 관 뒤에다 이 병풍을 쳤고 역대
선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 같은 곳에도 초상화 뒤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병풍이었다. 4첩, 8첩,
혹은 좁은 한 폭 짜리 협폭(挾幅), 또는 삽병(揷屛)1 형식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다. 여러 가지 의궤(儀軌)
기록에 의하면, 이 병풍은 ‘오봉산병(五峰山屛)’, 또는 제일 많은 경우 단순히 ‘오봉병(五峯屛)’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대다수의 오봉병은 크기나 폭에 관계없이 다음과 같은 형식상, 구도상의 특징을 보인다.
1) 화면의 중앙에는 다섯 개의 봉우리 가운데 가장 큰 산봉우리가 위치하고 그 양 쪽으로 각각 두개의 작은
봉우리가 협시(挾侍)하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2) 해는 중앙 봉우리의 오른편에 위치한 두 작은 봉우리 사이의 하늘에, 달은 왼편의 두 작은 봉우리 사이의
하늘에 떠 있다.
3) 폭포 줄기는 양쪽의 작은 봉우리 사이에서 시작하여 한두 차례 꺾이며 아래쪽의 파도치는 물을 향해 떨어진다.
4) 네그루의 적갈색 키 큰 소나무가 병풍의 양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바위 위에 대칭으로 서 있다.
5) 병풍의 하단을 완전히 가로질러 채워진 물은 비늘모양으로 형식화되어 반복되는 물결무늬로 문양화(文樣化)
되어있다. 산과 물의 경계선 또는 작은 봉우리 같은 형식화된 물결들의 사이사이, 혹은 그 두 군데 모두에 위로
향한 손가락을 연상케 하는 역시나 형식화된 하얀 물거품들이 무수히 그려져 있다.
오주석 선생은 일월오봉도의 의미를 음양을 뜻하는 하늘의 일월, 오행인 동시에 도덕적으로는 인의예지신을
상징하는 오봉, 그리고 뭍과 물로 나뉜 땅을 합쳐 3재(三才), 즉 天地人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일월오봉병은
그림 자체로는 미완성이고 왕이 그 앞에 앉아야 그림이 완성된다고 하였다. 즉 천·지·인, 석 삼三 자를 그은
정중앙에 백성들을 위한 올곧은 마음으로 왕이 정좌함으로써 일월오봉병과 임금이 하나 되어 임금 王 자를
그릴 때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일제(日帝)는 이런 조선 왕의 상징인 일월오봉병에 대한 훼손도 빼놓지 않았다. 아래 사진은 1925년 한 신문에
실렸던 창덕궁 인정전의 모습이다.
어좌가 있어야 할 곳의 풍경이 낯설다. 일월오봉병이 없고 대신에 이상한 그림이 보인다. 이 사진의 내용을
좀 더 명확히 짐작케 하는 사진이 서울역사막물관 자료에 있다.
전혀 우리나라 궁전 내부라고 짐작키 어려운 분위기에 어탑도 없고 일월오봉병도 없다. 뒷편에 걸려있는
그림은 봉황이다.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인정전 사진첩(仁政殿寫眞帖)] 에 들어있다는 아래 사진을 보면
봉황의 형태가 조금 더 분명해 보인다.
이 사진은 일본 메이지-다이쇼(明治-大正) 연간에 자주 사용된 핸드 컬러링(hand coloring) 기법을 사용하여
흑백 사진 위에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의 물감을 덧입힌 것이라고 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정전(正殿)인
창덕궁의 정전을 이런 왜색(倭色)으로 둔갑시켜 놓은 것이다.
1857년에 이루어진 인정전의 보수 공사를 기록한 [인정전중수도감의궤(仁政殿重修都監儀軌)]에는 당시
인정전에 <일월오봉도>가 닫집 형태의 당가(唐家)에 부착되어 어좌의 후면에 설치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면 언제, 어떤 연유로창덕궁 인정전의 내부가 이렇게 뒤바뀌게 된 것일까? 그 내막에 대하여 김수진
서울대학교 강사는 '한국 봉황 문장(紋章)의 기원과 정치학'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경운궁을 떠난 순종은 한일병합을 거치면서 융희제(隆熙帝)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고, 1907년부터 1926년 서거할 때까지 창덕궁에 기거했다. 사실상 1907년 이후 한일 간의 주요 의정서는 주로 창덕궁에서 체결되었다. 〈일월오봉도〉가 유독 창덕궁에서만 제거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궁내청 소장 [인정전 사진첩]에는 1917년에 화재로 소실된 희정당과 대조전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사진첩 전체를 1917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전제한다면, 〈봉황도〉는 1907년에서 1917년 사이 어느 시점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발표된 양정석의 연구는 〈봉황도〉의 제작 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연구는 1908년에 일본인 건축가들에 의해서 창덕궁 인정전이 대대적으로 개축된 일련의
역사를 조명했다. 특히 창덕궁의 건축 도면과 당대 문헌들을 분석함으로써, 1908년 인정전 개축이 일본인들에
의해 메이지 황궁을 본뜬 형태로 진행된 것임을 밝혔다. 이에 근거해볼 때, 봉황도가 제작, 설치된 시점도
인정전의 전반적 개축이 이루어진 1908년 전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다........."
이런 내력이라면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명정전의 어좌 위와 전(殿) 중앙의 보개천장에 용 대신 봉황이 조각된
연유 또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잔재일 것이라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봉황이 비록 상서로운 동물이지만 수백 년 동안 조선의 왕을 상징해온 용을 대체할만한 상징은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김수진은 아래와 같은 의견을 밝혔다.
".........물론 조선 왕실에서 제작된 많은 공예 의장품에 봉황 문양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봉황이 단독으로 선택되었다기보다는 용, 기린, 주작, 공작과 같은 다른 금수 도안과 함께 선택되었다. 국왕의 행렬에 사용되는 기물에도 봉황은 빠짐없이 등장했지만 봉황이 가장 중요한 존재로 선두에 위치한 것은 아니다. 봉황은 대형 교룡기(交龍旗)3의 다음 차례에 보다 작은 크기로 위치하면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으로 구성된 사수기(四獸旗)와 백호기(白虎旗), 주작기(朱雀旗), 백학기(白鶴旗), 현학기(玄鶴旗) 등과 대등한 지위인 ‘벽봉기(碧鳳旗)’로 제작되었다. 엄밀히 말해 용보다 서열이 낮은 봉황은 단독으로 왕을 상징한 것도 아니며, 벽봉기는 ‘봉황’이 아닌 ‘봉’의 도안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는 조선 왕실에서 봉황이 단독으로 군왕을 상징할 만큼 시각적 우위를 가지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현재
봉황은 우리나라 대통령을 상징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또한 ‘1945년 9월 미 군정이 총독부를
접수한 이후 창덕궁 인정전은 중요한 정치 거점으로 사용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옮겨간 이후에도 창덕궁 인정전이 상당 기간 국정과 외교의 장으로서 기능했다‘4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일월오봉병으로 돌아오면 2011년「궁궐 장식 조선왕조의 이상과 위엄을 상징하다」라는 책을 발간한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허균이라는 분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미술과 사대부들의 풍류에 대해 연구하고 많은
책을 쓰기도 했는데 일월오봉병에 대해 옛사람들의 우주관과 음양사상, 천명사상, 길상관념 등을 들어 각각의
상징과 전체 그림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허균 선생은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해도 일월오봉병에 해와 달은
그려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효종원년(1659)에 제작된 ⌜효종빈전도감의궤⌟를 보면 오봉병을 제작하되 오채로
오봉산, 적송, 수파(水波)를 그린다고만 되어있을 뿐 해와 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숙종 대의
의궤에서도 그냥 ‘오봉병’으로만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의전용 병풍 그림의 화의(畵意)가 오봉산에
집중되어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주장을 덧붙였다.
“의궤를 보면 당가 천장에 두 자 길이 정도의 철사로 일월경(日月鏡)을 매달아 오봉병 화면 위를 스치듯 내려오게 하여 해와 달을 대신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일월경과 오봉병이 한 세트였다.
그러나 영조의 대상(大喪)이후로 일월경 사용이 금지되면서 금은니(金銀泥)로써 해와 달을 화면에 직접 그려
넣는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부터 현재 남아있는 일월오봉병처럼 해와 달을 붉은 색과 흰색
(또는 노란색)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어좌 뒤에 설치되었던 병풍의 제작과 기능에 관련하여서도 허균 선생은 흥미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어좌 단 뒤쪽에 설치된 일월오봉병을 자세히 살펴보면 경첩과 문고리가 달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일월오봉병에 여닫는 문이 설치되어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임금이 궁 밖으로 나갔다가 어좌에 오를 때는 정전
정면의 어도를 따라 월도의 답대를 지나 당가 정면의 층계로 오른다. 하지만 편전에서 나올 때는 정전 뒤켠 어칸
문을 통해 어좌에 올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 궁궐 정전 당가의 계단을 주목해보면 근정전과 중화전의 경우
당가 사방에 설치된 네 개의 계단 중에서 북쪽의 계단 폭이 가장 넓다. 이는 왕이 정전 안으로 들어와 당가에
오를 때 이 계단을 사용하였던 때문으로 추측된다. 왕은 정리(廷吏)의 안내에 따라 일단 정전 뒤쪽의 문을 통해
정전 안으로 진입한다. 이어 앞에 보이는 당가의 계단을 올라, 이미 열려져 있는 일월오봉병의 문을 나와 어좌에
앉았던 것이다.“
- 그림이나 서예, 조각품을 나무틀에 끼워서 세운 것 [본문으로]
- 찯덕궁 인정전의 중수 공사는 1854년 9월 23일 치목을 시작하여 이듬해 1월 25일 정역(停役)했다가 1857년 5월 26일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윤 5월 6일에 공사를 마쳤다. 의궤(儀軌) 집필 역시 1857년 5월 20일 호조에서 착수하여 12월 25일에 총 8건(件)을 작성하여 규장각(奎章閣), 호조, 예조(禮曹), 춘추관(春秋館) 및 4사고(史庫)에 각각 이장시켰다. (문화원형백과) [본문으로]
- 임금이 행차할 때 행렬의 앞에 세우던 기 [본문으로]
- 김수진 '한국 봉황 문장(紋章)의 기원과 정치학', 201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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