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8 - 풍류객 심용

從心所欲 2019. 4. 22. 13:30

 

한 도위(都尉)가 압구정(狎鷗亭)에 놀러갔는데, 가희와 금객을 모두 불러 많은 손님들을 맞이한 후 질탕하게

 마음껏 놀았다. 풍취 있는 정자의 가을밤, 달빛이 물결에 비치니 흥취가 크게 일었다. 그 때 갑자기 강 위에서

맑고 낭랑한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 바라보니 한 작은 배가 물에 떠 오고 있었는데, 노옹(老翁)이 머리에는

화양건(華陽巾)1을 쓰고 몸에는 학창의(鶴氅衣)2를 입고, 손에는 백우선(白羽扇)을 들고서 백발을 표표하게

날리고 있었으며, 청의(靑衣)를 입은 동자들이 좌우에서 노옹을 모시고 옥소(玉簫)를 불고 있었고, 배 위에서는

한 쌍의 학이 날개를 펄럭이며 춤을 추고 있었으니, 이는 분명 신선(神仙)이었다.

생가(笙歌)가 그치자 많은 사람들이 난간에 빽빽이 서서 혀를 차며 부러워하였다. 모든 사람의 눈이 강 가운데를

주시하게 되니 연회석상(席上)이 텅 비어 한 사람도 없었다. 도위가 흥이 깨진 것을 분하게 여겨 작은 배를

타고 나가보니 그는 바로 심공인지라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도위가 말하였다.

“공은 승유(勝遊)를 압도하고 있구료!”

실컷 놀고서 놀이를 마쳤다.

▶도위(都尉) : 임금의 사위

 

또 한 재상이 평양감사에 제수되어 떠나는데, 그의 가운데 형이 수상이었는지라 홍제교(弘濟橋) 위에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전송하였다. 성문 밖에도 수레가 수 십 량(輛) 있었고 사람과 말과 수레 등이 길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그의 복력을 칭찬하여 말하였다.

“당체(棠棣)3꽃은 꽃송이가 활짝 피지 않았는가!”

이 때 갑자기 소나무 숲 속에서 말 탄 사람이 나는 듯이 나왔다. 몸에는 붉은 자주색 털로 짠 갖옷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색 촉묘피(蜀猫皮)를 써 귀를 가리고, 손에는 말채찍을 들고 안장에 기대어 돌아보았는데

그 풍채는 사람을 동요시킬 만 하였다. 미녀 서너 명이 머리에는 전립(戰笠)을 쓰고 몸에는 소매가 짧은 웃옷을

입고 허리에는 물빛남색 전대(纏帶)를 매고 발에는 붉은 꽃이 피어나는 무늬를 넣은 운혜(雲鞋)4를 신고

양 대열을 이루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에는 다시 동자(童子) 여섯 사람이 청색 적삼에 자주 빛 허리띠를

두른 채 각각 악기를 들고 말 위에서 연주하였다. 사냥꾼이 팔뚝에 독수리를 앉히고 개들에게 소리치며 수풀

속에서 달려 나오자 구경꾼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모두 말하였다.

“저 사람은 필시 심합천(沈陜川)일 것이다!”

바라보니 과연 심공이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다시 찬탄하며 말하였다.

“세간의 인생이란 백구과극(白駒過隙)과 같으니 진실로 마음과 뜻이 즐기는 것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다. 조금

전의 전별연이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마는 그러나 자고로 공명(功名)은 실패함이 많고 성사되는 것은 적은

법이다. 참소를 근심하고 꺼림을 두려워하여 가슴속에 얼음과 숯불이 상반하는 것 같은 것이 마음과 생각을

쾌적하게 하고, 호탕함과 상쾌함을 스스로 즐기면서 자신의 몸 이외에는 근심하지 않는 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희롱하며 “전별할까? 사냥할까? 사냥하지 전별은 하지 않으리!”라고 말하였으니

그 흠염(歆艶)함을 가히 알 수 있겠다.

 

[한량무(閑良舞), 한국일보사진]

 

[한량무(閑良舞), 국립극장홈페이지]

 

위의 두 일화에 심공(沈公)으로 소개된 인물은 합천(陜川) 심용(沈鏞, 1711 ~ 1788)이다. 실존인물이기는

하나 「청구야담(靑邱野談)」5이나 「동야휘집(東野彙輯)」6등의 야담집에만 등장하는 풍류객이다. 심용은

상당한 재력이 있었으나 재물은 소홀히 여기고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풍류를 즐겼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일세의 가객(歌客), 금객(琴客)과 술꾼 시인들이 몰려들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연일 객들이

벅적거렸다 한다. 또 장안의 잔치와 놀이에 심용을 청하지 않고는 벌일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하였다. 그와 함께

했던 예인(藝人)들로는 가객 이세춘과 금객 김철석(金哲石), 기생 추월(秋月), 매월(梅月), 계섬(桂蟾) 등이 있다.

이세춘은 단가(短歌)에 곡조를 붙여 부르면서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라는 말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신광수(申光洙)의 <관서악부(關西樂府)>7에 전하는 시에 의하면 “시조는 장단을 배열한 노래로 장안의

이세춘에서 비롯한다.”고 하였다. 또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 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네. 기생집

드나드는 강호 백수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네”라고 읊었을 만큼 이세춘은 1750 ~60년대 즈음에 세간에

이름을 날리던 가객이었다. 그런가 하면 김철석은 당대 거문고의 명수였다. 공주 기생 출신인 추월(秋月)은

가무(歌舞)와 자색(姿色)을 겸비하여 풍류객들 사이에서 수십 년간 큰 인기를 끌었고, 황해도 출신의 계섬은

노래 솜씨가 대단하여 지방의 기생들이 서울에 와 계섬에게 노래를 배울 정도의 여류명창이었다. 훗날

화성(華城)에서 베풀어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선창여령(先唱女伶)으로 참가한 일이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도 남아있다. 매월은 왕실 종친의 가희(歌姬) 출신으로 추월,

계섬과 함께 심용의 후원을 받던 여류 가객이었다.

 

심용에 관한 기록은 『청구야담(靑邱野談)』권1의「유패영풍류성사(遊浿營風流盛事)」에 있는데 특히 심용이

자신의 예인들과 평양 감사의 회갑연에 참석한 일화가 유명하다.

 

【하루는 심공이 가객 이세춘, 금객 김철석, 기생 추월, 매월,  계섬 등과 초당(草堂)에서 만나 가야금 타고 노래

부르며 밤을 지냈다. 공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은 서경(西京)을 가보고 싶지 않니?”

모두 말하였다.

“가보고 싶은 생각이야 있었지만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심공이 말하였다.

“평양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5,000년 동안 번화했던 곳이다. 그림 같은 강산과 거울 같이 맑은

물에 비친 정자와 누각이 우리나라 제일이라고 이를 만한데 나 또한 아직 가보지 못했다. 내가 들으니 평양

감사가 대동강(大洞江)에서 회갑연을 열어 도내 수령들을 모두 모으고 또 이름난 기생과 가객을 뽑아 고기가

산을 이루고 술이 바다를 이루리라는 소문이 크게 퍼졌는데, 장차 모일에 잔치가 열린다고 하더라. 일단 그

곳에 가기만 하면 통쾌하게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전두(纏頭)로 주는 돈과 비단도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양주지학(揚州之鶴)8이라 이를만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껑충껑충 뛰며 서로 축하하였다.

드디어 행장을 꾸려 출발하였는데, 풍악산(楓嶽山)에 간다고 칭탁하고서 자취를 감춰 우회로로 몰래 평양성에

들어간 뒤 평양 외성에 있는 조용하고 외진 곳에 머물렀다. 그 다음 날이 잔칫날이었다. 작은 배 한척을 세내어

그 위에 청색 장막을 설치하고 좌우에는 담황색 주렴을 늘어뜨린 뒤 그 안에 기생과 가객과 관현악기를 감추고

배를 비단 파도에 감추었다. 배가 부벽루(浮碧樓)에 갈 즈음 이윽고 북을 치고 노래하여 하늘을 떠들썩하게

하며 배를 저어 온 강을 뒤덮었다.

평양 감사는 망루가 있는 배 위에 높이 앉아 있었고 수령들도 모두 다 모여 큰 잔치가 벌어졌다. 맑은 노래와

아름다운 춤이 물결에 비치며 요동하였고 성 머리의 강 언덕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심공은 노를 저어 나아가

서로 바라다 보일만 한 곳에서 배를 멈추었다. 저쪽 배에서 검무(劍舞)를 하면 이쪽 배에서도 검무를 하고,

저쪽 배에서 노래 부르면 이쪽 배에서도 노래를 불러 마치 효빈(效嚬)하는 듯한 형상을 지으니 저쪽 배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몹시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비선(飛船)을 내보내 잡아오게 하니, 심공이 노를 급히 저어 달아나는지라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선이 더

이상 쫒아가지 못하고 돌아가면, 다시 노를 저어 나왔다. 이렇게 하기를 서너 차례 하니 평양 감사가 매우

괴이하게 여기며 말했다. “내가 그 배 안을 멀리서 바라보건대, 검의 광채가 번득이고 노래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하니 이는 결단코 하토(遐土)9의 평범한 사람이 아니로다. 또 담황색 주렴 안에는 학창의를 입고

화양건을 쓰고 손에 깃털부채를 들고 부치는 한 노옹이 똑바로 단정하게 앉아 자약하게 웃고 떠들고 있으니

이인(異人)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선장에게 몰래 명령을 내려 십 여 척의 작은 배로 일제히 그 배를 포위하여 붙잡아 끌어오게 하였다.

뱃머리에 이르자 심공이 주렴을 걷고 크게 웃었다. 평양 감사는 원래 심공과 친한 우의가 있었는지라 심공을

보자 한편 놀랍기도 하고 또 한편 기쁘기도 하여 심공이 즐겼던 뜻에 대해 대략 물었다. 배 가운데 있는 여러

수령과 손님과 감사의 자제, 사위, 조카들은 모두 한양 사람인지라 한양 기생과 음악을 보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익히 알았던 사람들이 많아 서로 더불어 악수하고 회포를 풀었다.

그러고 나서 가기(歌妓)와 금객들이 평생의 기예를 다 베풀어 종일토록 놀았으니 서경의 가무하는 기녀들이

모두 얼굴빛을 잃었다.

그 날 연회석에서 감사는 천금(千金)을 한양 기생에게 주었고, 다른 수령들도 자신의 능력껏 돈을 주니,

거의 만금(萬金)에 이르렀다. 심공은 질탕하게 즐기다 열흘 만에 집에 돌아왔으니,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풍류미담(風流美譚)으로 전하고 있다.】

 

[전 김홍도, 《평양감사향연도》10 中 <월야선유도>, 지본채색, 71.2 × 196.6cm, 국립중앙박물관]

 

[<월야선유도> 세부, 평양감사의 배 주변>]

 

[전 김홍도, 《평양감사향연도》 中 <연광정연회도>, 지본채색, 71.2 × 196.6cm, 국립중앙박물관]

 

후에 심용이 죽어 파주(坡州)의 시곡(柴谷)에 장사되었는데, 가객과 금객 무리들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우리들은 평생 동안 심공을 위해 왔소. 공은 풍류를 즐기는 사람 중에서 우리를 알아주는 사람이었고 또 소리를 아는

사람이었소. 노래가 끊기고 가야금 소리가 쇠잔해져 버렸으니 우리들은 장차 어찌 할꼬!”

저들은 장례를 치른 후 한바탕 노래하고 가야금을 타고는 마침내 무덤 앞에서 통곡한 뒤, 각자 자기 집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다만 계섬 만이 무덤을 지키며 가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털이 모두 백발이 되고 눈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곳에 남아 다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다.

 

 

참조 및 인용 : 문화원형백과(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도서출판 보고사),

창악집성(하응백. 2011. 휴먼앤북스), 한국민속문학사전

 

  1. 도사(道士)나 은자(隱者)가 쓰는 두건(頭巾) [본문으로]
  2.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 덕망 높은 학자가 평소 입는 옷으로, 목둘레에서부터 앞단·도련, 소매 끝에 5∼6 cm 정도의 검정색 선을 두른 소매가 넓고 뒷솔기가 갈라진 웃옷이다. [본문으로]
  3. 산앵두나무 [본문으로]
  4. 예전 여자들이 신는 마른신의 하나로 앞코에 구름무늬가 있다. [본문으로]
  5. 조선 후기에 편찬된 편자 미상의 야담집 [본문으로]
  6. 조선후기 문신 이원명이 문헌 및 민간에 유전하는 자료를 수집하여 주제별로 분류해 편찬한 야담집 [본문으로]
  7.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 ~ 1775)의 문집을 후손들이 석북집(石北集)이라는 이름으로 16권 8책으로 펴냈는데 권10에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관서악부(關西樂府)’가 수록되어 있다. 신광수는 과시(科詩)에 능하여 시명이 세상에 떨쳤다. [본문으로]
  8. 많은 복락(福樂)을 한 몸에 갖추려고 함 [본문으로]
  9. 지방, 변두리 [본문으로]
  10.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이 그림의 제목은 ‘평양감사향연도’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평양감사’ 대신 평안감사’나 평안관찰사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그림은 평안도 관찰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잔치를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세 폭으로 구성되어있는데 각각 부벽루연회도, 연광정연회도 그리고 월야선유도이다. 부벽루와 연광정의 잔치는 낮에 열렸고, 월야선유도는 대동감에서 밤에 열린 잔치를 그렸다. 월야선유도는 평양성 건너편에서 바라 본 풍경을 그린데 반해 연광정연회도와 부벽루연회도는 평양성에서 대동강 쪽을 바라보고 그렸다. 월야선유도 중앙 성벽에 깃발이 걸린 건물이 연광정이고, 그 왼쪽의 이층 누각이 대동문으로 둘은 평양성을 대표하는 정자들이다. 오른쪽 성벽 끝부분에 있는 건물은 부벽루, 부벽루의 대각선 방향 산 위에 있는 건물이 을밀대다. 부벽루 앞쪽 강에 모래가 쌓인 듯한 섬이 능라도다.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