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뿌리

풍류와 가락 10 - 명창(名唱)과 후원자들

從心所欲 2019. 4. 27. 13:56

 

[김월하 선생 생전 공연 모습]

 

 

이익(李瀷)은『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기생의 유래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양수척(揚水尺)은 곧 유기장(柳器匠)으로서,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 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에 이들이 남녀노비로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 따라서 기(妓)와 비(婢)는 원래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중 비가 기보다

먼저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계섬도 노비의 신분에서 이름 높은 가기(歌妓)가 되었다. 그 과정에는 이정보 같은 후원자의 도움이 있었다.

계섬보다 약 200년 앞선 때에 노비의 신분에서 당대의 명창 자리에 오른 인물이 있었다. 석개(石介)라는

인물이다. 석개에 대한 글은『어우야담(於于野譚)』1에 실려 있다.

 

석개(石介)란 자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의 하녀이다. 얼굴이 늙고 원숭이 같고 눈은 등명(燈明)

같았다. 어렸을 때 외방으로부터 들어와 영하(鈴下)의 노역자로 충당되었다. 송인의 집이 호족 집안이요

귀한 외척이어서 분바르고 붉고 푸른 단장을 한 미인들이 좌우를 갖추어 응대하기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석개를 시켜 나무통을 이고 물을 길어 오라 하니, 석개가 우물로 가서는 통을 우물 난간에 매달고 종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곡조를 이루지 못해서 마치 나무하는 아이요 나물 캐는 여자의 노래 같았다. 날이 저물어

통으로 돌아왔다. 맞았는데도 오히려 고치지 않고 이튿날도 다시 그처럼 했다. 또 그를 시켜 약을 캐라 하니,

광주리를 끼고 교외에 있는 밭으로 나가 작은 돌을 많이 주어서 한 곡을 부르곤 돌 하나씩을 광주리에 던져

넣었다. 광주리가 이미 차고 나면 한 곡조마다 드디어 노래하며 돌 하나씩을 밭으로 내놓았다. 차면 다시

버리기를 두세 차례하고 날이 저물자 빈 광주리로 돌아왔다. 매를 맞고도 오히려 고치지 않고 이튿날도 다시

이와 같이 했다. 여성위가 듣고 그를 기이하게 여겨 노래를 배우게 하니, 장안의 제일 명창이 되었는데 근래

100년간 그런 명창이 없었다.

 

외모도 볼품없는데다 시키는 일도 안 하고 제멋대로인 여종을 나무라고 벌주는 대신 오히려 노래를 가르친

주인의 인품이 대단해 보인다. 그런 주인의 배려와 후원 덕분에 석개는 노비 신분에서 당대 최고의 명창이

되었다. 노래를 배우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도 아니고 또 명창이 되기까지는 더 오랜 세월이 걸렸을 테니

본인의 노력도 노력이거니와 그 기간을 변함없이 지켜보고 지원해준 주인의 공도 적지 않은 것이다. 

석개의 주인이었던 송인(宋寅, 1516~1584)은 열한 살 때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중종의 사위가 되면서 여성위에 봉해졌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 조식(曺植), 정렴(鄭), 이이(李珥),

성혼(成渾)과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고,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일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망(人望)이 있어 집에는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인물평에는, 부유한 환경에서도 가난한 사람처럼 살았고, 상중(喪中)에 혹시라도

음식에 대한 유혹으로 도리를 거스를까봐 평상시에 하루걸러 담박한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놋쇠그릇으로

요강을 만들지 않았는데 뒷날 요강이 망가졌을 때 사람들의 음식그릇이 되지 않을까 걱정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묘비명에 따르면,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고 탐방을 즐겼다고 한다. 부마가 되어 정계에 나갈 수 없는

처지이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한가로이 풍류를 즐기는 일이었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한강가에는 이름난 정자들이 있어 양반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가 되었는데, 송인도 동호에

수월정(水月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동호는 지금의 동호대교 북쪽에 한강과 중랑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호수와 같이 물이 맑고 잔잔하여 ‘한양도성 동쪽에 있는 수려한 물가’라는 뜻으로 ‘동호(東湖)’2로 불렸다.

송인은 이곳에서 많은 지인들과 어울려 자주 풍류를 즐겼다.

 

[정선. 「경교명습첩」中 <압구정도> 3 , 견본채색, 20.2×31.3㎝, 간송미술관]

 

 

[ <압구정도> 세부]

 

 

송인의 풍월행차에는 늘 석개가 같이 하였는데 석개는 주로 가사(歌詞)를 불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석개는

‘비단 옷을 입고 날마다 권세 있고 귀한 집 잔치에 가니 전두(纏頭)4로 받은 금과 비단이 날마다 집에 쌓여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나라의 내로라하는 재상들이 그의 노래에 화답시를 지어 두툼한

시첩이 만들어지는 영광까지 얻었다.

 

여성군5 송인의 비(婢) 석개는 가무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 영의정 노수신, 좌의정 김귀영,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이양원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6

 

이러한 일들이 계섬이 홍국영 때의 일을 “그 자들이 어찌 나의 재주를 아끼고 소리를 감상해서 그랬겠는가?

자리 주인에게 아첨한 것이다.”라고 한 경우와 같은지 다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거나 석개는 아름답지 않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노래 하나로 비천한 노비의 신분으로는 감히 꿈꿀 수 없는 부와 영광을 누렸다. 후에 딸을

하나 낳아 옥생(玉生)이라 이름 지었는데, 그 딸 역시 어머니의 재주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당시 최고의 실력자가

되었다. 하지만 석개의 삶은 최후가 아름답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왕의 일행을 따라 해주 행재소(行在所)7

갔을 때, 세력 있는 집안의 종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그 종을 관가에 고발하여 벌을 주려고 하다가

살해당하고 만다. 분에 넘치는 복이 겨운 줄 모르고 권세까지 부려 남을 해치려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잃은 것이다.

 

[신윤복 <후원탄금도>, 지본채색, 23.6 × 31.5cm]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는 조선후기의 종실(宗室)8로 학문이 깊고 달변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시로 그 자문에 응하여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동지사(冬至使),

진하사(進賀使), 진주사(陳奏使), 사은사(謝恩使)) 등으로 여러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타고난 달변과 깊은

학식을 바탕으로 복잡한 외교문제를 잘 해결하여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에 많은 포상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점차 교만해져서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사치를 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 서평군은 특히 음악을 좋아하였다. 거문고 솜씨도 상당한 수준에 달하여 영조 3년 당시 종신(宗臣) 63인을

불러 잔치하는 자리에서 서평군의 거문고 소리를 듣기를 청한 일도 있었다. 서평군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그의

집에 음악을 전담하는 노비인 악노(樂奴)를 10명이나 데리고 있었고 희첩(姬妾)들도 모두 가무(歌舞)에 능한

사람들을 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옥(李鈺, 1760-1812)의 「가자송실솔전(歌者宋蟋蟀傳)」9에 의하면

서평군은 가객(歌客) 송실솔의 노래를 좋아하여 날마다 그의 노래를 들었고, 송실솔이 노래하면 거문고를

끌어당겨 몸소 반주를 하기도 하였다. 서평군의 거문고 솜씨가 일세에 높아 서로 만나면 더없이 즐거웠다고 하였다.

 

송실솔은 한양의 노래하는 자다. 노래를 잘 했고 그 중에서도 실솔곡을 잘 불렀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름을

실솔10이라 하였다. 실솔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배웠다. 그러는 동안에 소리를 얻어서 급한 폭포가 넓은

물결을 이루다 바위에 부딪히는 곳으로 가 매일 노래를 했다. 한 해 남짓이 되자 오직 노래 소리만 있고 폭포

떨어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 북악산 꼭대기에 가서 아득히 높은 곳에 기대어 황홀하게 노래하였다.

처음에는 갈라지고 쪼개져서 모이지 않았다. 일 년 남짓 후에 회오리바람도 그 소리를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 김홍도 <관폭도(觀瀑圖)> 지본담채, 29.0 × 42.0㎝, 개인]

 

 

이때부터 실솔이 방에서 노래하면 들보에 소리가 있고, 처마에서 노래하면 소리가 문에 있고, 배에서 노래하면

소리가 돛대에 있고, 시내나 산에서 노래하면 소리가 구름 사이에 있었다. 노래의 굳세기는 징을 두드리는 듯,

맑기는 구슬인 듯, 가녀리기는 가벼운 아지랑이인 듯, 머물 땐 구름이 비낀 듯, 옥소리는 때 맞은 앵무새인 듯,

떨림은 용의 울음인 듯했다. 거문고ㆍ생황ㆍ퉁소ㆍ쟁과 안성맞춤이었으니 오묘함을 극진히 하여 남지 않게
하였다.

그래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의관을 정제한 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하면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귀를

기울여 공중을 향했기에 노래 부르는 사람이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 당시에 서평군 공자는 부유하고 호협하며

성품이 음악을 좋아했다. 실솔의 노래를 듣고 기뻐하여 날마다 함께 놀았다. 실솔이 노래하면 공자는 반드시

거문고를 뜯어서 몸소 응하였다. 공자의 거문고 또한 한시대의 묘한 솜씨로 서로 대단한 기쁨을 얻음이 같았다.

공자가 어느 날 실솔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가 거문고 좇음을 잃게 하여서 화답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느냐?”

실솔이 이에 소리를 길게 끌며 후정화(後庭花) 선율에 맞춰 취승곡(醉僧曲)을 불렀다. 그 노래는 이랬다.

長衫分兮 美人褌

장삼을 잘라내어 미인의 속곳 짓고

念珠剖兮 驢子紂

염주를 쪼개어 나귀 고삐 만들었네

十年工夫 南無阿彌陀佛

10년 공부 나무아비타불.

伊去處兮 伊之去

어디 가서 살까. 저리로 가자.

 

노래가 금방 3장 차례가 되자, 갑자기 ‘당’하며 스님의 바라소리로 만들었다. 공자가 급하게 채를 빼서

거문고의 배를 두들겨 그것에 맞췄다. 실솔은 또 낙시조(樂時調)로 바꿔 불러 황계곡을 노래하였는데

아랫장(下章)의 사설이 이러했다.

 

直到壁上 所畵黃雄鷄

벽 위에 그린 누런 수탉이

折長嚨喉 兩翼橐鼓

긴 목 늘어뜨리고 두 날개를 탁탁 치며

鵠槐搖啼時游

꼬끼오 울 때까지 놀이보세.

 

따라 꼬리를 끄는 소리를 짓고는 한바탕 크게 웃어젖혔다. 공자는 금세 궁성(宮聲)을 내고 각성(角聲)을 내어

여운을 다스렸지만 소리가 잘 들려 응답하지 못하자 손에서 활을 놓치는 걸 깨닫지 못했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진실로 잃어버렸다. 그러나 네가 처음엔 바라소리를 냈다가 또 한 번 크게 웃은 건 왜인가?”

실솔이 “스님이 염불 읊는 게 끝나면 반드시 바라로 마무리하고 닭 울음이 끝나면 반드시 웃어젖히고 싶을

것이기에 그랬습니다.” 공자와 함께 무리가 모두 크게 웃었으니 골계가 또한 이와 같았다.

공자가 원래 음악을 좋아해서 이세춘, 조욱자, 지봉서, 박세첨 무리 등 당대의 노래하는 자가 모두 날마다

공자의 문하에서 놀며 실솔과 우의가 좋았다. 세춘의 어머니가 상을 당하자 실솔이 무리들과 함께 조문을 갔다.

문에 들어가 상주의 곡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계면조이니 법엔 마땅히 평우조로 그걸 이어야 하네.”

마침내 신위에 나아가 곡했는데 곡하는 게 노래하는 듯하여 사람들이 듣고 웃으며 전했다.

 

공자집에 음악하는 종이 십여명 있었고 희첩들은 모두 가무에 능하였다. 거문고와 퉁소를 다루며 20여 년간

마음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다가 죽었다. 실솔의 무리 또한 모두 흩어져서 늙어 죽었다. 박세첨 혼자 그 아내

매월과 함께 지금도 북악산 아래에 살고 있다. 때때로 술에 취하면 노래를 그치고 사람들에게 공자와 놀던 옛

얘기를 하면서 흐느껴 울며 탄식하였다.

 

에 송실솔이 불렀다는 황계곡은 현재 전하는 12가사 가운데 <황계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어 그 사설

전체를 알 수가 있다. 

 

일조낭군(一朝郎君) 이별 후에 소식조차 돈절(頓絶)하다. 지화자 좋을시고

좋을 좋을 좋은 경(景)에 얼씨고 좋다 경이로다. 지화자 좋을시고

한 곳을 들어가니 육관대사(六觀大師) 성진(性眞)이는 팔선녀(八仙女) 데리고 희롱한다

얼시고 좋다 경(景)이로다. 지화자 좋을시고

황혼 저문 날 기약(期約) 두고 어디를 가고서 날 아니 찾나. 지화자 좋을시고

병풍에 그린 황계(黃鷄) 두 나래를 둥덩 치며

사오경 일점(一點)에 날새이라고 고기요 울거든 오랴시나. 지화자 좋을시고

달은 밝고 조요(照耀)한데 임 생각이 새로워라. 지화자 좋을시고

너는 죽어 황하수(黃河水) 되고 나는 죽어 돛대 선(船) 되여 광풍이 건듯 불 제마다

어화나 둥덩실 떠놀아 보자. 지화자 좋을시고

저 달아 보느냐 임계신데 명기(明氣)를 빌리렴 나도 보자. 지화자 좋을시고.

 

<황계사>란 제목은 병풍 속의 누런 닭을 노래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별한 낭군과 만나자고 약조를

했지만 그 임은 오지 않는다. 혹시 소설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이처럼 다른 여자와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그러면서 병풍 속의 닭이 새벽이 되어 울 때면 오느냐고 되묻는다. 병풍 속의 닭이 울 까닭이

없으니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 때문에 죽어서라도 한 몸이 되어 같이 놀기를 염원하면서

마지막으로 달에게 기원한다. 임이 계신 곳을 비추면 자신도 임을 보겠다고. 매우 슬픈 노랫말인데도 불구하고

‘지화자 좋을시고’라는 신명나는 후렴구를 달아 비장함을 더해주는 사설이다.

 

 

 

참조 및 인용 : 국악정보(2010, 국립국악원), 문화원형백과(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창악집성(2011, 하응백),

한겨레음악대사전(송방송, 2012. 도서출판 보고사)

 

  1. 조선 중기에 유몽인(柳夢寅,1559 ∼1623)이 은둔 생활 중에 야담(野譚)을 수집하여 1622년에 10여권으로 완성한 설화집. [본문으로]
  2. 지금의 용산지역의 한강은 ‘서호(西湖)’로 불렸다 [본문으로]
  3. 잠실 쪽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본 시각이다. 압구정동 일대와 그 맞은편 기슭인 옥수동, 금호동 일대를 그렸다. 압구정 강 건너가 독서당이 있던 두무개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검은 산이 남산이다. 기와집은 서울 대가집들의 별장으로 짐작된다. [본문으로]
  4. 광대, 기생, 악공 등에게 그 재주를 칭찬하여 사례로 주는 돈이나 물건 [본문으로]
  5. 결혼할 때는 여성위(礪城尉)가 되었고, 후에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본문으로]
  6. 심수경(沈守慶) ‘견한잡록(遣閑雜錄)’. ‘견한잡록’은 심수경(1516 ~ 1599)이 75세에 우의정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난 뒤에 자신이 평생에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들을 기록한 잡록이다. [본문으로]
  7. 왕이 궁궐을 떠나 멀리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別宮). 행궁(行宮) 또는 이궁(離宮)이라고도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본문으로]
  8. 선조의 왕자인 인성군(仁城君) 공(珙)의 증손이다 [본문으로]
  9. 이옥(李鈺)의 ‘가자송실솔전(歌者宋蟋蟀傳)’은 김려(金鑢)의 문집 ‘담정총서(潭庭叢書)’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실솔(蟋蟀)은 귀뚜라미를 뜻하는 한자어로 두 자가 모두 귀뚜라미 실(蟋), 귀뚜라미 솔(蟀)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