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亭子)는 조선시대 풍류의 상징적 장소다. 그래서 역대의 풍류객을 자처하는 많은 인물들이 풍광이
수려한 곳을 골라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실학자이자 문신이었던 김육(金堉, 1580 ~ 1658)1은
그의 『잠곡유고(潛谷遺稿)』에 이런 글을 남겼다.
누대와 정자를 짓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쓸쓸하고 고요한 것을 싫어하고 번잡하고 시끌벅적한 것을 좋아한다.
또한 건물 기둥을 높다랗게 세우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짓고, 멀게는 강가나 호숫가 나루터 근처나 바깥으로는
교외의 논밭 사이에 세운다. 그러나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관아로 출근해 유시(酉時, 오후 5~7시)에
퇴근하는 바람에 한 번도 누대나 정자에 올라가 볼 틈을 갖지 못해, 오히려 주변에 사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곳에 올라가 한가롭게 거니는 일만도 못하다. 이렇게 보면, 참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누대나
정자를 세운 꼴이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다. 더러 대문을 걸어 잠가놓고 다른 사람이 누대나 정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는데, 어찌 크게 비웃을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강호의 경치와 교외의 흥취가 즐겁고 또 즐겁다고 해도 항상 그곳에 머물러 거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번
왕래하고 두 번 왕래하는 사이에 해가 이미 기운다. 어찌 이곳에서 잠자고 거처하고 먹고 쉬면서 천 가지 기괴한
형상과 만 가지 이색적인 변화를 보며,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고 일 년 내내 창가에서 마주 대하는 것과 같겠는가?”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정자에 대하여 이렇게 적었다.
“내가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집 뒤쪽에 세 칸짜리 집을 지을 만한 조그마한 언덕이 있었다. 그래서 띠 풀을 엮어
초가집을 짓고, 안쪽 당(堂)의 이름을 공극당(拱極堂)이라고 하고 바깥쪽 정자에는 '구루정(傴僂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구루정이라는 이름은 정자의 지붕이 낮아 머리가 부딪히므로 반드시 허리를 굽혀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전국 팔도를 두루 유람했지만 감상할 만한 흥취가 일어난 풍경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가 태어나
7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빼어난 풍경을 얻어 정자를 지었다. 산골짜기의 물은 몸을 씻을 만하고,
바위 우물은 양치질을 할 만하다. 샘물이 내달릴 수 있도록 대나무를 쪼개 물길을 만들어 연못의 연꽃을 가꿀
만하고, 물고기를 감상하고 학을 길러 온갖 사물을 벗으로 삼을 만하다. 온종일 잠잠하고 고요하며, 저잣거리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곳이야말로 평소 꿈속에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별천지다.
그러나 멀리 내려다보면 여염집들이 나지막이 땅에 엎드려 있고, 궁궐을 바라다보면 우뚝 솟은 용마루가
하늘과 잇닿아 있다. 도성 안 사대부와 아녀자들이 구름떼처럼 오가며 이 정자를 보거나 감상할 텐데, 나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에 높게 짓는 일이 꺼려진다. 처마와 서까래를 나지막하게 세우고 담장을 낮게 해, 소나무와
대나무로 뒤쪽에 울타리를 쳐 검소함을 드러냈다.
높은 곳에 자리하면서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고, 방에 들어와서는 굽어봄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감히 마음이 아주 시원하고 개운해지기만 즐겨, 속세를 떠나 초야에 묻혀 사는 처사처럼 창가에
기댄 채 오만함에 취해서야 되겠는가?
옛 솥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에 "한 번 명을 받은 벼슬아치는 몸을 구부리고, 두 번 명을 받은 벼슬아치는
허리를 굽히고, 세 번 명을 받은 벼슬아치는 머리를 수그린다."고 적혀 있다. 나는 이 말에 매우 깊은 느낌과
울림을 받아, 머리를 수그리면서 내 정자를 '구루정(傴僂亭)2'이라고 이름 하였다.“
김육은 정자 터에서 보이는 백악산(白岳山, 북악산), 필운산(弼雲山, 인왕산), 목멱산(木覓山, 남산), 낙산
(駱山), 도봉산(道峯山), 무악산, 수락산 등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산들의 풍경에 매료되었다. 김육이
정자를 지으면서 구한 것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정취였다. 악인(樂人)을 불러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는 떠들썩한 흥취와는 전혀 다른 풍류다. 사전에는 풍류(風流)를 ‘속된 일을 떠나 풍치(風致) 또는 운치
(韻致)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이라 하는데 김육이 보기에는 누대나 정자에 모여 떠들썩한 모임을 갖는
것은 오히려 속되다고 했을 지도 모른다.
풍류를 음악적으로 좁혀서 얘기하면 정악(正樂)의 하나로 잔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형성된 음악을 가리킨다.
궁중잔치에서는 장악원(掌樂院)의 악공(樂工)들이 연주했고 민간잔치에서는 직업적인 악인(樂人)들이 담당했다.
줄풍류, 대풍류, 사관풍류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풍류라고 할 때는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것, 멋이
있는 것, 음악을 아는 것, 예술에 대한 조예, 여유, 자유분방함, 즐거운 것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사대부들의 풍류는 자연 속에서의 시(詩). 서(書), 금(琴), 주(酒)를 근간으로 한다. 술과 자연에 흥취를 얻어
시를 지어 읊고, 좋은 문구를 찾아 붓을 움직이는가 하면, 거문고 줄을 퉁기고 그 위에 노래를 얹어 불렀다.
또한 이러한 풍류는 단순히 즐기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시나 문장의 형태로 전달되어 문학적인 축적이
가능하게 하였고,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으며. 그림의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김홍도 <군현도(群賢圖)>, 지본채색, 국립중앙미술박물관]
풍류는 혼자 즐기는 것과 여러 사람이 모여 즐기는 것이 다르고 또한 사람마다 모임마다 다르다. 한데 어울려
떠들썩한 풍류가 있는가 하면, 홀로 초당에 앉아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시를 읊거나 술 한 잔으로 은근한
흥취를 즐기는 조촐한 풍류도 있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시 <적의(適意)>에는 혼자 즐기는 풍류를 담았다.
獨坐自彈琴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고
獨飮頻擧酒
홀로 자주 잔 들어 마시니
旣不負吾耳
거문고 소리는 이미 내 귀를 거스르지 않고
又不負吾口
술 또한 내 입을 거스르지 않네
何須待知音
어찌 꼭 지음(知音)을 기다릴 건가
亦莫須飮友
또한 함께 술 마실 벗 기다릴 것도 없이
適意則爲歡
마음에 맞는 것이 곧 즐거움이라
此言吾必取
이 말을 나는 간직하겠네.
[傳 이경윤(李慶胤, 1545 ~ 1611) <월하탄금도> 견본 수묵, 31.2×24.9 cm, 고려대학교박물관]
그런가 하면 ‘국화의 그림자를 읊은 시(菊影詩)’의 서문에 나타난 다산 정약용의 풍류는 담백하다 못해 동심이
느껴질 만큼 천진스럽다.
곱지만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싸늘하지 않은 국화는 여러 꽃 가운데 유달리 뛰어난 네 가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늦게 꽃피는 것이 하나이고, 오래도록 견뎌내는 것이 둘이고, 향기로운 것이 셋이고, 곱지만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싸늘하지 않은 것이 넷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해 이름을 얻고, 또 국화의 취향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 역시 이 네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네 가지 외에 또 다르게 국화를 사랑한다.
그것은 촛불 앞에 어린 국화의 그림자다. 밤마다 꽃 그림자를 위해 담장 벽을 깨끗하게 쓸고 등잔불을 켠 다음,
그 가운데 쓸쓸히 앉아 홀로 즐기곤 한다.
하루는 벗 윤구범에게 들러 "오늘 우리 집에 와 함께 자면서 국화를 구경하세."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무리
국화가 아름답다고 해도 어떻게 밤에 꽃구경을 하겠는가?"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자꾸 사양하기에, 나는 한번 구경해 보라고 굳이 청해 함께 집으로 왔다. 저녁이 되자, 일부러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촛불을 국화 한 송이에 가까이 대어 보도록 했다. 윤구범을 이끌고 가 "꽃 그림자가 기이하지 않은가?"
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이해할 수 없군. 나는 하나도 기이한 줄 모르겠네."라고 대꾸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난 뒤에 다시 아이에게 평소 내가 한 방법대로 하도록 시켰다. 방 안의 어지럽고 들쭉날쭉한 옷걸이나
책상과 같은 물품을 치우고, 국화의 위치를 가지런하게 해 벽에서 약간 떨어지게 한 후 적당한 곳에 촛불을 두어
불빛을 밝히도록 했다. 그랬더니 기이한 무늬와 오묘한 형상이 벽에 가득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운 것은 꽃과
잎이 서로 어우러지고, 줄기와 잔가지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어 묵으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놓은 듯했다.
또한 너울너울, 어른어른 춤을 추듯 하늘거려 마치 달이 동녘에서 막 떠오를 때 마당의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걸려 있는 듯했다. 그리고 먼 것은 제멋대로 흩어져 가느다랗고 옅은 구름 혹은 노을과 같고, 홀연히 사라지거나
소용돌이치는 모습은 세차게 부딪치는 파도 같았다. 때때로 번쩍거려 서로 엇비슷하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 윤구범이 뛸 듯이 기뻐하며 크게 소리를 지르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기이하다. 천하제일의 경치로구나."
탄성과 흥분이 가라앉자 술을 마시고, 서로 취해 시를 읊으며 즐거워했다. 그 자리에는 이유수, 한치응, 윤지눌도
함께 있었다.
참고 및 인용 : 국어국문학자료사전(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2007,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 엄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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